작성일 : 15-09-10 13:00
채 에스더 목사 - "자살... 그리고 또 자살"
 글쓴이 : 관리자
 
   https://lh3.googleusercontent.com/-ZhJDWIeEJ1I/VfHhjkj7bBI/AAAAAAAAEXU… [156]

 

자살... 그리고 또 자살


 

채 에스더 목사  간증<2>

채에스더 목사는.....

미국 플로리다 주 잭슨빌에서 ‘지구촌 사랑의 나그네 선교센터’를 운영하고 있는 채에스더 목사(본명 채경자)는 이곳에서 노숙자들에게 식사를 제공하며 전도해 왔으며 중국에 기독병원 설립, 양로원 선교, 감옥 선교, 상담 사역 등을 위해서 헌신해 왔다. 특별히 해외선교 및 목사, 선교사 지원 등으로 헌신을 해오고 있다.

어느 날, 또 나를 때리기 시작하는 어머니를 피해 뒷 산에 있는 나무 위로 도망가서 숨어있다가 졸다 땅에 떨어지는 바람에 다리에 부상을 입은 적도 있었습니다. 다른 어느 날, 어머니와 같이 논두렁 길을 걷다가 발이 미끄러져 논에 고인 흙탕물에 빠지게 되었는데, 나를 일으켜 세우기는 커녕 아예 빠져 죽으라고 논두렁에 고여 있는 흙탕물 속으로 나를 짓밟기 시작했습니다. 소리 내어 울면 더 많은 매를 맞아야 했기 때문에 나는 울지도 못했습니다.
 
우리 집은 동네에서 제일 가난한 집이었습니다. 어떤 때는 내가 깡통에 밥을 얻어와 가족들과 함께 먹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중 제가 열한 살이 되던 어느 날 어머니는 집을 나가 아예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동네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엄마가 시집갔거나 아예 거지가 되어  떠돌아 다닌다고 하면서 어린 나를 또다시 울렸습니다.
 
엄마 없이 동생과 사는 저는 밥을 굶기가 일수였습니다. 그러던 중 집에 친척이 찾아 왔습니다. 동생과 나는 "이제 살았다"고 기뻐하였습니다. 그러나 친척은 동생만 데려가고 나는 다시 혼자가 되었습니다. 혼자서 집에 있을 수가 없어 집을 나간 어머니와 작은오빠를 찾으려고 무작정 서울로 향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와 작은 오빠를 어떻게 찾아야 하는지 막막한 가운데 하루 하루를 길에서 생활하게 되었고 며칠이 지나자 나는 거지가 되어 길에서 잠을 자고 쓰레기 속에서 음식을 찾아 먹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길거리에서 병이 든 불구자 거지 할아버지를 만나게 되었는데 할아버지는 팔다리가 없어 기어 다니는 장애인이었습니다. 그 할아버지는 나보다 더 불쌍해서 내가 밥을 얻어다 드리기시작했습니다.
 
병든 할아버지의 집은 다리 밑 작은 천막이었습니다. 길거리에서 생긴 처음 가족인 할아버지와의 동거가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기어 다니면서 사는 할아버지와 나는 특히 겨울에는 배 고픔과 추위로 너무 힘들었고 그 고통 때문에 우리는 죽고 싶었습니다. 외로운 나에게 할아버지는 언제나 힘이 되었고 고마운 분이었습니다. 어느날 할아버지는 나에게 “나는 올 겨울 여기서 죽을 것이다. 그러니 너는 다리 밑 거지생활을 청산하거라.  너는 너무 예쁘니 거지생활 하지 말고 남의 집 식모살이라도 해라”하시면서 나를 다리 밑에서 쫓아내셨습니다.
 
갈 곳이 없어 길거리 어느 미장원 앞에서 하루 종일 쪼그리고 있다가 미용사 언니의 눈에 띄었습니다. 나는 미용실 의자에서 자게 되었고, 청소와 빨레 밥을 지으며 허드레일들을 하며 미용실에서 생활하게 되었습니다. 이 후 여기저기를 전전하며 식모살이를 하면서 살았습니다. 청소년시기가 된 저는 공부가 너무 하고 싶어 야간 중학교에 다니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당시 가족들에게 버림받고 거지 할아버지마저 나를 버렸다는 절망적인 생각에 나를 사로잡았고 나는 나의 삶을 저주하기 시작했습니다. 시간이 지나자 나의 절망은 더 심한 나락으로 빠져 들었고, 내 나이 15살의 꽃다운  나이에 나는 죽기 위해 쥐약을 사서 정릉 산으로 들어가 쥐약 한 병을 다 마시고 정신을 잃었습니다.
 
마침 산으로 산책을 나왔던 젊은 연인들이 나를 발견해 병원으로 옮겼고 나는 다시 극적으로 살아났습니다. 경찰은 나의 연고를 찾으려고 애를 썼으나, 결국 집과 가족이 없는 나를 한남동 고아원으로 보내게 되었습니다. 그로인해 다리밑 거지생활에서 식모살이를 지나 이제는 고아원 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고아원 생활도 나를 자유롭게 할 수 없었습니다. 나는 다시 죽을 생각으로 가득 찼고 하루는 한남동 옆에 있는 한강으로 가서 몸을 던졌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눈에 띄어 또 살아나게 되었습니다. 이후에는 다른 방법으로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게 칼로 손목 동맥을 잘랐지만 또 발견되어 기적적으로 살아났습니다. 이처럼 매번 자살을 시도하자 고아원에서도 문제아로 주시의 대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고아원에서 행사가 있을 때마다 미국 사람들이 먹을 것과 입을 것을 갖고 찾아와 고아인 우리들을 위로해 주었습니다. 그중 한 분이 내가 매번 죽으려 한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고 그분은 나를 미국으로 초청하여 1965년 나는 미국 알칸사스로 초청 이민을 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미국을 향한 나의 아메리칸 드림은 잠시였습니다. 나를 초청한 집은 한국보다 더 가난한 시골 농장 집이었습니다. 화장실도 없고 아홉 식구가 한 방에서 자고 다람쥐 고기를 먹으며 자급자족하는 더 비참한 환경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곳에서도 식모살이를 하다 미국 가족들이 이사를 하게 되었는데 나를 두고 떠나 버렸습니다. 다시 미국에서 혼자가 된 나는 샌디에고, 라스베가스 등지에서 베이비시터로 고생을 하며 살다가 콜로라도 주에서 청소일을 거쳐 식당 웨이트리스를 하며 살게 되었습니다.                

웨이트리스를 하며 하루하루 어렵게 살아가던 중, 하루는  내가 일하는 레스토랑에 식사를 하러 온 미국 웨스트포인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장교인 현 남편 Ray Menard씨를 보게되었는데 나는 한눈에 그에게 내 마음을 빼앗겨 버렸습니다. 나는 그를 만나기 위해 그가 잘 가는 곳을 알게 되었고, 그가 가는 곳마다 나는 그곳에 나타났습니다. 그는 나를 피해 독일까지 자원해서 떠났으나 나는 그가 있는 부대까지 알아내어 전화를 하자 그는 전화를 받고 기겁을 했습니다. 그이후 그는 나를 떠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나와 결혼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알고 보니 내가 청소부로 있을 때, 내가 청소하던 장교 숙소 방에서 살았고  장차 장군을 바라보는 꿈 많은 젊은 미국 총각 장교였습니다. 결혼 후 나의 인생은 하루아침에 신데렐라처럼 180도로 변했습니다. 남편과 나는 부자 동네의 큰 맨션에 살았고 우리가 사는 집에는 이태리, 미국, 동양의 호화 가구가 가득했습니다. 쇼핑을 나갈때면 고급 자동차를 타고 나갔고, 손에는 여러 개의 다이아몬드반지와, 화려한 장신구로 치장한 옷을 입고 유명메이커 제품인 백을 들고 나갔습니다. 사람들의 시선이 나를 향하는 것이 나는 좋았습니다. 화려하고 아름다운 용모를 갖춘 사관학교 출신 장교 부인인 나를 동네 사람들은 부러움으로 보았습니다. 그들은 나를 영화배우나 명문가의 딸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갈수록 나는 시어머니에게 눈에 가시였습니다. 그것은 아들인 Ray Menard가 장군이 되려면 아내가 미국인이어야 하고 그 과정에서 부인이 감당해야 할 사교적인 부분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한국 여자인 나로 인해 남편의 장군 진급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 현실 속에서 시어머니의 좌절감으로 인해 나는 어쩔 수 없이 미운오리 새끼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음 주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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