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9-04-11 18:58
[연재] 곽상학 목사의 '다움세움' <아버지의 서늘한 옷자락>
 글쓴이 : 관리자
조회 : 2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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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상학 목사의 '다움세움'
<아버지의 서늘한 옷자락>

이른 봄날, 다른 어떤 나무보다 먼저 샛노란 꽃을 잔뜩 피우는 산수유. 손톱 크기 남짓한 작은 꽃들이 옹기종기 모여 조그만 우산모양을 만들면서 나뭇가지를 온통 뒤덮는다. 우리나라 어디에서나 수십 수백 그루가 한데 어울려 꽃동산을 이루는 산수유나무의 모습은 새 생명이 움트는 봄날의 가장 아름다운 풍광 중 하나이다. 
어두운 방 안엔/빠알간 숯불이 피고,//외로이 늙으신 할머니가/애처로이 잦아드는 어린 목숨을 지키고 계시었다//이윽고 눈 속을/아버지가 약을 가지고 돌아오시었다//아, 아버지가 눈을 헤치고 따오신/그 붉은 산수유 열매······//서러운 서른 살 나의 이마에/불현듯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을 느끼는 것은,//눈 속에 따오신 산수유 붉은 알알이/아직도 내 혈액 속에 녹아 흐르는 까닭일까 (김종길/성탄제)

가난한 아버지가 병든 자식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이 겨우 붉은 산수유 열매밖에 따다 줄 수 없는 현실을 아련한 추억으로 처리한 따뜻한 이 시에는 그리스도의 희생적 삶과 작가가 체험한 유년 시절의 부성애가 각자 비슷한 무게의 등가물로 형상화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펄펄 끓는 아이의 이마와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은 절묘한 촉각적 대비를 이루면서 자식을 위해 추운 날 밖에서 고생하는 아버지를 잘 그려내었다. 대부분의 우리네 아버지들도 자신의 식솔들의 안위와 행복을 위해서 기꺼이 밖으로 열심히 뛰어다니며 서느런 옷자락을 자초한다. 

어릴 적 아빠의 당당한 뒷모습을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나는 ‘나의 영웅’을 굳이 TV나 만화에서 찾을 필요가 없었다. 언제나 나를 지켜주고, 그 어떤 나의 필요도 기꺼이 채워주는 전지전능한 존재가 아빠였으니까 말이다. 사실 이것은 나만의 이야기가 아닐 것이다. 이 세상의 모든 아버지들은 이 세상 모든 아들들의 생애 최초의 우상들이다. 더욱이 시인의 아버지처럼 자식에게 희생적 모티브를 강렬하게 각인시켰다면 생애 마지막 우상도 가능할 것이다.
    
초등학교 5학년 때로 기억한다. 장남에게 거는 기대가 유난히 크셨던 아버지는 학교 시험 결과에 유독 민감했다.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는 일방적 통보는 다름 아닌 ‘시험 한 문제 틀리는데 종아리 열 대’라는 청천벽력이었다. 시험 채점 결과는 열 한 문제가 오답. 방문을 걸어 잠군 상태에서 나무 빗자루 손잡이로 무려 110대의 매질을 고스란히 당한 그 날 밤은 아픔과 억울함으로 좀처럼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울음과 눈물이 범벅이 되어 가까스로 잠이 들던 그 순간, 매질을 당해 터져버린 종아리 한 쪽에 갑자기 차가운 기운을 느꼈다. 직감적으로 아버지의 손길임을 알아챘지만 눈을 뜰 수가 없었다. 이내 따끔따끔한 무언가가 종아리 전체를 뒤덮었고, 골똘히 어떤 생각에 잠기다 그렇게 잠이 들고 말았다. 아침에 눈을 떠 보니 방구석 한 쪽에서 발견된 동그란 연두색 연고 안티푸라민. 그것은 시인이 기억하는 나만의 붉은 산수유 열매이다.    
    
이 세상의 모든 아버지는 아들들의 영웅으로 존재한다. 언제나 그렇듯 예외는 존재한다. 할머니로부터 아버지의 외도(外道) 사실을 들었던 중학생 시절, 나의 영웅 신화는 산산조각 나버리고 말았다. 믿고 의지했던 만큼 아버지에 대한 증오와 분노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할머니는 매일 거친 욕을 한바가지 쏟아내셨고, 어머니는 가족을 건사하느라 밤늦게까지 통닭을 튀겨야만 했다. 그늘진 얼굴의 여동생들은 급격히 말수가 사라지면서 세상과 담을 쌓기 시작했다. 남부러울 것 없었던 스위트 홈을 풍비박산으로 몰고 간 그 장본인은 더 이상 나의 영웅도 내 아버지도 아니었다. 그저 내 손에 처단되어야 할 적(敵)에 불과했다. 한 가정의 가장을 유혹한 그 여자도, 그 사이에서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그 아이도 모두 내 복수 리스트에 올라 있었다. 그 모두에게 처절한 복수를 다짐하며 내게 힘이 더 생기기를 기다리고 또 기다렸던 나의 청소년기는 생각만 해도 끔직한 시절이었다.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요1:9) 

늘 복수와 죽음을 되 뇌이며 어두움에 갇혀있던 그 시기에 나는 빛으로 다가 오신 한 분께 온전히 점령당했다. 빛 되신 그 분이 내 인생에 뚫고 들어오신 것이다. 빛이 비추이자 내 인생을 잠식했던 캄캄한 어두움은 사라지기 시작했고, 삶의 소망은 느리지만 분명히 내게 다가왔다. 따뜻한 믿음의 공동체가 기울어진 가정을 지탱해 주었고, 서툴지만 사랑이라는 단어도 조금씩 알아갈 수 있었던 것은 빛 되신 그 분의 포기하지 않는 열심이었다. 

“위에서 오시는 그분은 모든 것 위에 계시는 분이시다. 땅에서 난 사람은 땅에 속해 땅의 것을 말한다. 그러나 하늘에서 오시는 그분은 모든 것 위에 계신다.”(요3:31) 

저 위에(Up) 계신 그 분께 나의 모든 힘과 권리를 드릴 때(Give) 그 분은 나를 위해(For) 한 마음을 주셨으니(Give), ‘포기(give up)’와 ‘용서(Forgive)’의 정확한 어원은 잘 모르겠지만, 빛으로 오신 그 분의 은혜가 내 인생을 뒤덮어버린 것은 내게 너무나 명확한 사실이다. 

그 분은 한 곳을 바라보며 평생을 함께 걸어갈 수 있는 한 여인을 아내를 보내주셨고, 그 사이에서 네 아이를 허락하셨다. 자연 분만으로 얻은 첫 딸과 가슴분만으로 얻은 세 아들. 생모가 십대 미혼모였던 장남 은택이는 태교는커녕 생명의 위협으로부터 간신히 살아남은 기적의 아들이다. 차남 은찬이, 삼남 은준이도 각자 처절한 사연을 하나씩 갖고 태어난 기적의 아들들이다. 우리 집에서는 차남, 삼남이 되었지만 원래는 장남이었던 이 아이들은 모두다 나와 같은 장남이었다.  

태어나자마자 친부모로부터 분리된 불쌍한 아이들. 그런데 나는 어떠한가. 한 때 제 아비를 죽이려하던 폐륜아가 아니던가. 매일같이 가슴에 증오를 품고 인생을 저주했던 그 아이가 지금은 그 가슴으로 세 아이들을 품고 있다. 매일같이 복수를 뇌까렸던 그 입술로 아이들과 즐거운 동요를 부르고 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할까? 칠흑 같은 내 인생에 바늘구멍 같은 빛이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그 빛은 마침내 증오와 저주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던 내 인생을 송두리째 점령해 버렸고 어두움에서 빛으로 나올 수 해주었다. 
    
그 옛날 갈보리 언덕까지 나무 형틀을 메고 올라간 한 유대인의 서늘한 옷자락. 그 옷자락을 만져가며 함께 따라 가는 수많은 군중들 사이로 스쳐 지나가는 내 얼굴. 빛이신 그 분은 그런 나를 위해 결국 그 나무 형틀에 매달리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 저주를 받으시고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구속해 주셨습니다. 기록되기를 ‘나무에 달린 사람마다 저주를 받았다’고 했기 때문입니다.”(갈3:13)      
    
가지마다 줄줄이 매달려 있는 산수유 붉은 열매와 그 사이로 올려다보는 파란 하늘은 눈이 시리게 맑다. 구름 한 조각이라도 걸려 있다면 그야말로 환상적일 텐데. 눈을 감고 아이들과 산수유 열매를 엄지와 검지로 살살 간질이는 놀이가 소중한 까닭은 나의 두 아버지를 추억하는 가장 행복한 시간이기 때문이다. 

   [온누리교회 차세대교육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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