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칼럼아! 그런뜻이었구나너희 하나님 & 나의 종

너희 하나님 & 나의 종

너희 하나님 & 나의 종

“보호 아래”를 뜻하는 “undercover”은 영어권 문화에서 다양하게 사용됩니다. 단순하게는 어린 아이가 따뜻한 이불을 덮고 누워 있거나 위험한 상황에서 엄마 뒤로 피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강한 바람과 함께 폭우가 쏟아지는 때에 식구들이 집안에 들어가 있는 안전한 모습도 표현합니다. 사회적으로는 한 도시를 경찰이 순찰하며 보호하는 상황을 나타냅니다. 비밀 경찰이나 첩보원을 “undercover police”라고 부릅니다. 간편하게 “undercover”라고 합니다. 자신들의 상태를 안전하게 가린 상태에서 정부의 보호를 받으며 활약하기 때문입니다. 이 낱말의 용례는 다양하지만, 사람은 자신을 안전하게 보호해 주는 대상을 찾아 의지한다는 속 뜻이 있습니다. 

   팀 켈러는 “모조품 신들” 혹은 “위조된 신들”로 번역되는 자신의 책『Counterfeit Gods』에서 인간의 마음은 끊임없이 열심으로 자신을 안전하게 지켜 줄 주인을 찾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 결과 자신이 찾아 선택한 주인에게 지배당한다고 언급합니다. 그리고 인간의 마음과 삶을 지배할 수 있는 대상 목록을 이렇게 나열합니다. “무엇이든 우리를 지배하는 것이 우리의 주인이다. 권력을 구하는 사람은 권력에 지배당하고, 사람에게 받아들여지기 원하는 사람은 좋아하는 사람에게 지배당한다. 우리는 스스로 지배하는 게 아니라 자기 삶의 주인에게 지배당한다.” 사람은 스스로 인식하든 못하든 안전한 삶을 보장받기 위해 자신이 선호하고 의지하는 마음의 주인이 있습니다. 아니, 사람은 보호와 안전을 위한 주인이 필요한 존재입니다. 어떤 주인을 선택하느냐는 삶의 질과 미래를 결정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인의 통치 방식과 목적이 곧 종들의 생활을 좌우지하기 때문입니다.  

   고대 그리스 로마 (Greco-Roman) 문화는 오늘날처럼 개인주의적이지 않았습니다. 가족 구성원 모두가 한 집안에 살았기 때문에 개인의 꿈과 성공보다는 가문의 위상을 더 중요시 여겼습니다. 가족의 잔치, 결혼 예식, 그리고 가정 전반의 운영은 한 사람이 주도했습니다. 이 사람을 “데스포테스”라 불렀습니다. “데스포테스”란 땅의 소유자 혹은 가정의 주인으로 집안의 모든 기능을 통치했습니다. 가족 구성원은 “데스포테스”의 소유물로써 절대적 순종이 요구되었습니다. 사회적으로 종과 노예가 제도화된 이 문화에서 주인의 힘은 압제를 낳았습니다. 상전인 “데스포테스”는 월등한 위치에서 그에게 종속된 종들에게 무제한의 권력을 행사 할 수 있었습니다. 국가 법이 “데스포테스”를 통제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종과 노예들의 절대 통치자였습니다. 신으로 숭배 받던 로마 황제는 자연스럽게 최상위 “데스포테스”가 되었습니다. 고대 그리스 로마 사회에서 “데스포테스”의 이미지는 영향력과 힘을 상징했습니다. 

   이에 반하여, 성경적 토양에 뿌리 내린 유대 사회에서 백성들의 “데스포테스”는 하나님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창조하신 분으로 만물의 소유주였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그들의 고백은 “땅과 거기에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가운데 사는 자들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데스포테스”는 듣거나 글을 읽어서 이해하는 주님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권능과 통치는 개인의 생활에 실제로 경험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조상들의 삶은 하나님의 전능하신 통치 행위가 현실로 나타났던 생생한 증거들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전능하심은 매우 구체적인 실재였으며, 추상적이거나 단지 개념적인 것과는 상관이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100세까지 자식이 없던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약속합니다. 전혀 가능성 없은 현실이었지만 아들 이삭이 태어났습니다. 그 후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아들을 희생 제물로 바칠 것을 명령합니다. 어떤 이유도 없이 아들을 바치는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는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라고 말씀합니다. 일상에서 하나님의 권능을 날마다 직면했던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나의 데스포테스,” 즉 주님이라 불렀습니다. 신약 성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만물을 통치하시는 “데스포테스”로 바뀝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으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으로 표현합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모든 것을 그의 뜻대로 이루시는 하나님”으로 기술합니다.

   개인의 삶을 지배하는 주인의 타이틀인 “데스포테스”는 그리스 로마 사회나 기독교에서 동일하게 불렀습니다. 차이점은 통치 목적입니다. 한쪽은 종들을 향한 주인의 권력 행사였고, 다른 한쪽은 종들에게 자비와 긍휼을 베풀어 그들의 인생을 선대하는 것입니다. 존 맥아더 (John MacArthur)는 그리스도가 우리의 주권자 되신 이유는 종들의 인생을 책임지기 위해서다라고 말합니다. 도마가 예수님을 향하여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라고 고백한 것은 하나님의 신성과 주님의 절대 주권을 인정한 것입니다. 종으로서 하나님의 권위, 지배권, 통치권, 명령권을 믿고 복종하여 주권자의 보호 아래 살겠다는 결단입니다. “종”은 하나님의 백성을 지칭하는 새로운 용어가 아닙니다. 일찍부터 하나님의 백성이 스스로를 이해하는 핵심적인 말이었습니다. 오랫동안 자신들을 종으로 속박했던 애굽을 벗어나 홍해를 넘었던 위대한 구원 사건은 단지 자유를 얻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을 다른 주인, 즉 하나님의 종으로 만들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은 나의 종들이 됨이라 그들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내 종이요,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니라.” 

   “종”이라는 타이틀은 현대인들에게 환영받지 못하지만, 하나님의 보호 아래 안전한 삶을 보장받는 삶의방식입니다. 하나님의 종이 되어 어둡고 두려운 시기를 통과할 때, 다윗은 주님의 은혜를 경험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간증합니다.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하는 자는 전능하신 자의 그늘 아래 거하리로다 내가 여호와를 가리켜 말하기를 저는 나의 피난처요 요새요 나의 의뢰하는 하나님이라 하리니.” 이제 시작된 2021년, 하나님을 주권자 삼아 그분의 권위 아래 종으로 살기를 소망합니다. 이남규 목사

너희 하나님 & 나의 종

“보호 아래”를 뜻하는 “undercover”은 영어권 문화에서 다양하게 사용됩니다. 단순하게는 어린 아이가 따뜻한 이불을 덮고 누워 있거나 위험한 상황에서 엄마 뒤로 피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강한 바람과 함께 폭우가 쏟아지는 때에 식구들이 집안에 들어가 있는 안전한 모습도 표현합니다. 사회적으로는 한 도시를 경찰이 순찰하며 보호하는 상황을 나타냅니다. 비밀 경찰이나 첩보원을 “undercover police”라고 부릅니다. 간편하게 “undercover”라고 합니다. 자신들의 상태를 안전하게 가린 상태에서 정부의 보호를 받으며 활약하기 때문입니다. 이 낱말의 용례는 다양하지만, 사람은 자신을 안전하게 보호해 주는 대상을 찾아 의지한다는 속 뜻이 있습니다. 

   팀 켈러는 “모조품 신들” 혹은 “위조된 신들”로 번역되는 자신의 책『Counterfeit Gods』에서 인간의 마음은 끊임없이 열심으로 자신을 안전하게 지켜 줄 주인을 찾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 결과 자신이 찾아 선택한 주인에게 지배당한다고 언급합니다. 그리고 인간의 마음과 삶을 지배할 수 있는 대상 목록을 이렇게 나열합니다. “무엇이든 우리를 지배하는 것이 우리의 주인이다. 권력을 구하는 사람은 권력에 지배당하고, 사람에게 받아들여지기 원하는 사람은 좋아하는 사람에게 지배당한다. 우리는 스스로 지배하는 게 아니라 자기 삶의 주인에게 지배당한다.” 사람은 스스로 인식하든 못하든 안전한 삶을 보장받기 위해 자신이 선호하고 의지하는 마음의 주인이 있습니다. 아니, 사람은 보호와 안전을 위한 주인이 필요한 존재입니다. 어떤 주인을 선택하느냐는 삶의 질과 미래를 결정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인의 통치 방식과 목적이 곧 종들의 생활을 좌우지하기 때문입니다.  

   고대 그리스 로마 (Greco-Roman) 문화는 오늘날처럼 개인주의적이지 않았습니다. 가족 구성원 모두가 한 집안에 살았기 때문에 개인의 꿈과 성공보다는 가문의 위상을 더 중요시 여겼습니다. 가족의 잔치, 결혼 예식, 그리고 가정 전반의 운영은 한 사람이 주도했습니다. 이 사람을 “데스포테스”라 불렀습니다. “데스포테스”란 땅의 소유자 혹은 가정의 주인으로 집안의 모든 기능을 통치했습니다. 가족 구성원은 “데스포테스”의 소유물로써 절대적 순종이 요구되었습니다. 사회적으로 종과 노예가 제도화된 이 문화에서 주인의 힘은 압제를 낳았습니다. 상전인 “데스포테스”는 월등한 위치에서 그에게 종속된 종들에게 무제한의 권력을 행사 할 수 있었습니다. 국가 법이 “데스포테스”를 통제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종과 노예들의 절대 통치자였습니다. 신으로 숭배 받던 로마 황제는 자연스럽게 최상위 “데스포테스”가 되었습니다. 고대 그리스 로마 사회에서 “데스포테스”의 이미지는 영향력과 힘을 상징했습니다. 

   이에 반하여, 성경적 토양에 뿌리 내린 유대 사회에서 백성들의 “데스포테스”는 하나님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창조하신 분으로 만물의 소유주였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그들의 고백은 “땅과 거기에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가운데 사는 자들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데스포테스”는 듣거나 글을 읽어서 이해하는 주님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권능과 통치는 개인의 생활에 실제로 경험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조상들의 삶은 하나님의 전능하신 통치 행위가 현실로 나타났던 생생한 증거들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전능하심은 매우 구체적인 실재였으며, 추상적이거나 단지 개념적인 것과는 상관이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100세까지 자식이 없던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약속합니다. 전혀 가능성 없은 현실이었지만 아들 이삭이 태어났습니다. 그 후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아들을 희생 제물로 바칠 것을 명령합니다. 어떤 이유도 없이 아들을 바치는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는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라고 말씀합니다. 일상에서 하나님의 권능을 날마다 직면했던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나의 데스포테스,” 즉 주님이라 불렀습니다. 신약 성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만물을 통치하시는 “데스포테스”로 바뀝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으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으로 표현합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모든 것을 그의 뜻대로 이루시는 하나님”으로 기술합니다.

   개인의 삶을 지배하는 주인의 타이틀인 “데스포테스”는 그리스 로마 사회나 기독교에서 동일하게 불렀습니다. 차이점은 통치 목적입니다. 한쪽은 종들을 향한 주인의 권력 행사였고, 다른 한쪽은 종들에게 자비와 긍휼을 베풀어 그들의 인생을 선대하는 것입니다. 존 맥아더 (John MacArthur)는 그리스도가 우리의 주권자 되신 이유는 종들의 인생을 책임지기 위해서다라고 말합니다. 도마가 예수님을 향하여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라고 고백한 것은 하나님의 신성과 주님의 절대 주권을 인정한 것입니다. 종으로서 하나님의 권위, 지배권, 통치권, 명령권을 믿고 복종하여 주권자의 보호 아래 살겠다는 결단입니다. “종”은 하나님의 백성을 지칭하는 새로운 용어가 아닙니다. 일찍부터 하나님의 백성이 스스로를 이해하는 핵심적인 말이었습니다. 오랫동안 자신들을 종으로 속박했던 애굽을 벗어나 홍해를 넘었던 위대한 구원 사건은 단지 자유를 얻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을 다른 주인, 즉 하나님의 종으로 만들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은 나의 종들이 됨이라 그들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내 종이요,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니라.” 

   “종”이라는 타이틀은 현대인들에게 환영받지 못하지만, 하나님의 보호 아래 안전한 삶을 보장받는 삶의방식입니다. 하나님의 종이 되어 어둡고 두려운 시기를 통과할 때, 다윗은 주님의 은혜를 경험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간증합니다.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하는 자는 전능하신 자의 그늘 아래 거하리로다 내가 여호와를 가리켜 말하기를 저는 나의 피난처요 요새요 나의 의뢰하는 하나님이라 하리니.” 이제 시작된 2021년, 하나님을 주권자 삼아 그분의 권위 아래 종으로 살기를 소망합니다.

이남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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