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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칼럼아! 그런뜻이었구나“시기,” 죽음에 이르는 죄 (2)

“시기,” 죽음에 이르는 죄 (2)

“시기,” 죽음에 이르는 죄 (2)

윌리엄 세익스피어는 시기를 “왕성하게 활동하는 병”이라 불렀습니다. 철학자 베이컨은 “시기는 공휴일도 없다”고 인정했습니다. 로마의 시인 호레이스는 “폭군들도 시기보다 더 잔인한 고문은 결코 발명하지 못했다”고 선언했습니다. 소설가 배리는 “악덕 중에서 마음을 좀먹는 최고의 강자는 시기다”고 말했습니다. 셰리던은 자신의 희곡 『비평 The Critic』에서 시기를 언급할 때, “인간의 마음 속에 이것만큼 강하게 뿌리를 내린 열정은 없다”고 했습니다. 과거 영국의 웅변적인 시인 필립 베일리는 시기를 “지옥에서 뜨겁게 달궈져 지금 막 나온 석탄”이라고 생생하게 묘사했습니다.

지옥에 대하여 말하자면, 단테보다 시기를 더 잘 표현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의 저서 『연옥 Purgatory』에서, 시기는 건물 벽 옆에 장님 거지들처럼 앉하 있고, 그들의 눈꺼풀이 봉합되어 있는 사람들을 떠오르게 합니다. 이 상징은 매우 적합한 것으로, 시기란 가장 앞을 보지 못하게 하는 죄 중의 하나임을 보여줍니다. 왜냐하면, 시기하는 사람들은 비합리적인 요소들과 또 자신 속에 갇혀 있는 일부분으로 합성되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독이 있는 생각으로 부풀어져 있고, 거의 견딜 수 없는 스스로 만든 고통의 어둡고 좁은 세계 안에 있는 자들입니다.

일반적으로 시기와 질투는 그 의미를 구별하지 않고 유사한 뜻으로 사용됩니다. 우리말 성경도 마찬가지로 이 두 단어를 구별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히랍어 성경은 시기와 질투를 구별하여 다른 낱말을 쓰고 있습니다. 시기는 히랍어 “프토노스 envy”며, 질투는 “젤로스 jealousy”입니다. 우리말 성경은 “포토노스”를 “시기”와 “투기”로 번역했습니다. “젤로스”는 “열심,” “시기,” 혹은 “맹렬한”으로 번역합니다. 이처럼 이 두 단어는 오늘날 그 의미의 명확한 뜻이 구별되지 않고 혼용됩니다. 하지만 고대 그리스 작품들과 신약 성경은 “프토노스”와 “젤로스”를 그 의미에 따라 명확히 구별하여 사용하고 있슴을 알 수 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작품 『수사학』에서 이 두 단어를 매우 예리하게 분리합니다. 질투로 번역되는 “젤로스”는 이웃이 가지고 있는 것이 자신에게는 없어서 마음 속에 느껴지는 고통으로 정의합니다. 자신과 같은 직종 혹은 환경에 종사하는 동료가 그 분야에서 성공하여 명예를 얻고 있지만 자신은 그렇지 못할 때 느끼는 아픔이 “질투”입니다. 질투는 때때로 상대방처럼 되고 싶은 경쟁 의지를 불러일으켜 열심을 내는 동력이 될 수 있습니다. 성장의 원동력이 될 수 있는 질투는 선한 용도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시기로 번역되는 “프토노스”도 동료의 탁월한 성공 때문에 느끼는 특정한 고통으로 정의합니다. 시기도 질투처럼 상대방 때문에 느끼는 마음의 아픔이지만, 시기는 완전히 부정적인 감정입니다. 왜냐하면 시기는 경쟁자의 성공에 도전 받아 열정을 유발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경쟁자가 그것을 즐기지 못하도록 막는 행위가 동반되기 때문입니다. “프토노스”는 선한 것으로는 결코 사용되지 않고, 언제나 악한 세계와 관계합니다. 

1945년 이집트 중부 나그함마디 마을에서 초기 기독교 문서들이 발견되었습니다. 그 자료들 중에 “인류의 기원”으로 번역되는 내용 속에 “시기”의 근원을 밝히고 있습니다. 인류가 창조될 때 혼돈 속에 어둠이라 불리는 그림자가 있었는데, 그림자는 자기 속에 강력한 것이 들어와 잉태됨을 느낍니다. 그것은 “시기”였습니다. 시간이 지나자 그림자는 시기를 출산합니다. 그 때부터 시기는 혼돈의 세계 속에 살면서 전형적인 악마의 역할을 합니다. A.D. 3-4세기에 활동했던 성자 안토니는 시기는 가장 악독한 악마로 인정합니다. 당시 기독교 공동체는 이 시기를 “프토노스”로 불렀습니다. 고대 유대교와 기독교에서 “프토노스”는 하나님과 인간을 적대하는 악마와 동일시했습니다. 

시기가 지배하면 옳은 것을 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망가지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는 유대인의 민담이 있습니다. 두 친구가 길을 가다 왕을 만났습니다. 한 사람은 욕심이 많았고, 다른 친구는 시기심이 많았습니다. 왕은 그들에게 “만약 너희 중에 한 명이 요청하면 무엇이든 그대로 주겠다. 대신, 옆 사람에게는 요청한 것의 두 배를 주겠다”고 말했습니다. 시기심 많은 친구는 왕의 말을 듣고 먼저 나서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먼저 말하면 친구가 두 배로 받는 것이 달갑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욕심 많은 친구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서로 눈치를 보며 요청하지 않고 있을 때, 왕은 부탁이 없으면 그냥 가겠다고 말합니다. 시기심 많은 친구가 드디어 입을 열었습니다. “임금님, 저의 왼쪽 눈을 빼 주십시오!” 이렇게 요청한 이유는 친구가 많이 갖거나 더 좋은 것을 갖는 꼴을 보느니, 차라리 자기 눈이 하나 빠지더라도 친구의 두 눈이 빠져 자기보다 더 불행해지는 편이 좋기 때문이었습니다. 시기는 나 자신 뿐만 아니라 가까이 있는 사람의 인생을 무너뜨립니다. 

일찍이 라일 (J. C. Ryle) 주교는 시기를 이기는 신앙의 태도에 관해서 이렇게 조언했습니다. “신앙에 열심 있는 사람은 한 가지 일에 몰두하는 사람이다. 그가 진지하고, 왕성하며, 타협하지 않고, 철저하고, 전심을 다하며, 영적으로 열렬하다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는 오직 한 가지 일만 보며, 한 가지 일만 신경쓰고, 한 가지 일을 위해 살고, 한 가지 일만 받아들인다. 그 한 가지 일이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 하나님의 영광을 촉진시키는 것이다. 바로 그러한 열심으로 해서 소진되어 버린다 할지라도 그는 괘념치 않고 즐거워한다.” 다른 사람을 보면서 시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달란트를 발견하고 그 것에 집중한다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광을 누리게 됩니다.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이남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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