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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서의 행복론 – 양승훈 목사

전도서의 행복론

전도서 1:1-2 / 12:13-15

쥬빌리 채플 양승훈 목사

I. 어리석은 부자 – 눅16:20, 마16:26

류한(劉漢)은 쓰촨성 지역에서 사업을 하며 엄청난 재산을 축적한 중국의 대표적 ‘신흥 재벌’이다. 그는 미국 경제 전문지 포브스가 2012년에 발표한 ‘중국 부호 순위’에서 재산 400억 위안으로 148위에 올랐다. 하지만 그는 사업을 확장해 가는 20년 동안 경쟁관계에 있는 사람들 중 최소 8명을 살해하는 등 여러 범죄로 법원에서 사형선고를 받았고 재산을 모두 몰수당했다. 2015년 2월 9일, 48세로 사형 당하면서 류한은 이런 유언을 남겼다:

“다시 한 번 인생을 살 수 있다면 노점이나 작은 가게를 차리고 가족을 돌보면서 살고 싶다. 내 야망, 인생, 모든 게 잠깐인 것을, 그리 모질게 살지 않아도 되는 것을, 바람의 말에 귀를 기울이며 물처럼 그냥 흐르며 살아도 되는 것을, 악 쓰고 소리 지르며 악착같이 살지 않아도 되는 것을 그렇게 못살았다. 말 한마디 참고, 물 한 모금 먼저 건네주며, 잘난 것만 재지 말고, 못난 것도 보듬으면서 살았더라면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것을 이제야 알았다. 세월의 흐름이 모든 게 잠깐인 것을, 흐르는 물은 늘 그 자리에 있지 않다는 것을 왜 나만 모르고 살았을꼬? 무엇을 얼마나 더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그동안 아등바등 살아왔는지 모르겠다.”

류한의 유언을 보면서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어리석은 부자 비유가 떠오른다(눅16:20). 예수님은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마16:26)고 말씀하셨다. 전도서는 무엇이 인간의 행복인가라는 질문에 대답하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전도자가 말하는 행복의 원리는 뭘까?

II. 전도서 개요

전도서에는 솔로몬이라는 이름은 등장하지 않지만 1절에서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 왕 전도자”라고 한다면 솔로몬 외의 다른 사람을 생각하기 어렵다. 여기서 전도자로 번역한 코헬렛(קֹהֶ֫לֶת, Qohelet)은 설교자(preacher)로도 번역할 수 있는 말이다. 솔로몬은 구약성경에서 세 권을 쓴 것으로 전해진다. 첫째는 아가서이다. 아가서는 사랑의 노래이다. 인간의 사랑에 빗댄 일종의 연애편지이므로 사랑을 노래한 성경이라고 할 수 있다. 내용으로 미루어 솔로몬이 젊었을 때 썼을 것으로 생각된다. 둘째는 잠언이다. 잠언은 인생의 여러 가지 일들을 경험하면서 깨달은 지혜를 담고 있다. 내용으로 미루어 솔로몬이 중년 이후에 썼을 것으로 생각된다. 셋째는 오늘 우리가 살펴보는 전도서이다. 전도서는 내용으로 미루어 인생의 말년에 가서 인생을 회고하면서 인생이 무엇인지, 인생의 진정한 가치가 무엇인가를 정리하고 있다.

전도서의 키워드는 “헛되다”라고 할 수 있다. “헛되다”(vanity)로 번역된 히브리어 명사 ‘헤벨’(הֶבֶל)은 문맥에 따라 수증기(vapour), 호흡(breath), 무가치함(worthless), 헛됨(vanity), 무의미함(meaninglessness), 공허함(emptiness), 허무함(futility), 무용함(uselessness) 등 다양한 의미가 있지만 번역하기 어려운 단어이다. 전도자는 인생의 허무가 무엇인지를 지적하고, 이 허무를 극복하는 비결을 제시한다. 그러는 과정에서 전도자는 인간 경험과 지식의 한계, 지혜로운 삶의 요소를 지적하고, 마지막으로 하나님 경외하는 것이 인생의 본분임을 제시한다. 

1장 1절은 이 글의 저자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의 왕 전도자의 말씀’이란 말로 시작한다. 다윗의 아들이고, 예루살렘 왕의 말씀이니 거창한 말이 이어질 것으로 생각되지만 1장 2절은 뜻밖의 말로 시작한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얼마나 헛되면 이 짧은 한 절에 헛되다는 말을 5번이나 사용하고 있다. 이어지는 전도서의 글을 읽다 보면 인생의 희망이나 행복보다는 오히려 절망감을 준다.

헤벨을 중심으로 전도서 본문을 분석해 보면 전도자는 ‘해 아래’ 새것이 없다고 선언한다. 그는 “무엇이든지 내 눈에 원하는 것을 금하지 아니하며, 마음이 즐거워하는 것을 막지 않고(2:10)” 희락도 즐길 만큼 즐겨 보고, 술도 먹을 만큼 먹고, 사업도 크게 하고, 남녀 종들이나, 각종 금은보화로 부귀도 누리고, 처첩도 많이 두었지만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한다. 한마디로 ‘해 아래’ 있는 모든 것이 헛되다고 말한다.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가득 차지 아니하“다고(1:8) 말하면서 사람의 욕심과 만족은 끝이 없다고 탄식한다.

그렇다면 도대체 희망도, 행복도 없는 인생을 무엇 때문에 그렇게 열심히 살아야 하는가? 재물을 쌓고 지식을 쌓는 것도 결국 뒤에 오는 사람에게 좋은 일만 시키는 것인데… 전도자는 산 자들보다 죽은 자들이 더 복되고, 선한 자나 악한 자나 지혜자나 우매자나 모두 죽는 것은 동일하다고 냉소한다. 하지만 전도서가 이것으로 끝난다면 인생을 “공수래 공수거”(空手來 空手去 ·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간다)라고 하는 불교의 가르침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전도서는 여기서 머물지 않고 인간의 진정한 행복과 인생의 진정한 가치가 무엇인지에 대해 답한다.

III. 전도서가 가르치는 행복의 원리

전도서는 무엇이 인간의 행복인가라는 질문에 대답하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세상의 상식은 사람의 행복과 성공이 그 사람의 행동에 달렸다고 생각한다. 류한과 같이 열심히 살면, 그래서 어떻게든 부귀영화를 얻으면 행복할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전도서는 이를 정면으로 부정하면서 지식과 지혜도, 부귀영화도, 심지어 바르게 열심히 살아도 행복하지 않다고 말한다. 때로 잠깐 행복을 느낄 수 있으나 해 아래 어떤 사람도 지속적으로 행복을 누릴 수 없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결국 죽음이 모든 사람을 평등하게 만드는데 그런 세상에 살면서 인간의 행복의 원리는 무엇일까?

1. 타인에게 선을 행하는 원리 – 3:12

전도자가 말하는 첫 번째 행복의 원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선을 행하며 사는 것이라고 말한다. 3장 12절에서 전도자는 “사람들이 사는 동안에 기뻐하며 선을 행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는 줄을 내가 알았”다고 말한다(3:12).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하고 다른 사람에게 선을 행하는 것이야말로 자신이 행복하게 되는 가장 단순한 원리이다. 다른 사람에게 선을 행한다고 해서 뭐 거창하고 큰 것 아니다. 먼저 내 가족, 내 이웃, 내가 늘 만나는 사람들을 따뜻하게 대하고, 작은 도움을 주고, 내게 주신 재물과 작은 권력을 통해 작은 선을 나누며 사는 것이다. 이것이 무라카미 하루키가 만든 소위 소확행(小確幸), 즉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이다.

다른 사람에게 선을 행하면 상대가 복을 받기 전에 자신이 먼저 행복해진다. 선을 행하면 그로 인해 죽은 후에 천국에서 상급을 받기 전에 먼저 이 땅에서 행복해진다. 성도들은 이 행복의 비밀을 아는 자들이다. 그래서 신약성경은 곳곳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선을 행할 것을 권면한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선을 행하고 선한 사업을 많이 하고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며 너그러운 자가 되게 하라”(딤전6:18)고 했다. 

다른 사람에게 선을 행하는 것이 먼저 자신에게 복임을 기억할 때 우리는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않을 수 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갈6:9)고 했다. 데살로니가후서에서도 “형제들아 너희는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라”(살후3:13)고 했다. 

다른 사람들에게 기뻐하며 선을 행하는 것은 우리 교회의 모토이기도 하다. 다른 사람을 복되게 하는 것은 먼저 자신에게 복이 된다고 믿는 성도들이 모일 때 쥬빌리 교회는 세상을 복되게 하는 교회가 된다. 그런 성도들, 나아가 그런 교회는 아브라함의 복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2. 자기 일을 기뻐하는 원리 – 3:22

전도자가 말하는 두 번째 행복의 원리는 자기 일에 즐거워하는 것이다. 3장 22절에서 전도자는 “그러므로 나는 사람이 자기 일에 즐거워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음을 보았나니 이는 그것이 그의 몫이기 때문이라”(3:22)고 했다. 여기 외에도 2장 24절은 사람이 수고하는 중에 심령으로 낙을 누리는 것이 복되다고 말했고, 3장 12-13절에서도 사람이 사는 동안 기뻐하며 수고함으로 낙을 누리는 것이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했다. 비슷하게 공자님도 논어에서 말하기를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못하다”(子曰, 知之者不如好之者, 好之者不如樂之者)고 했다. 

자기가 지금 하는 일이 너무 좋아서 먹고살 수만 있다면 돈을 받지 않고도 일하고 싶다면 그 사람은 복 받은 사람이요 행복한 사람이다. 반대로 하고 싶지 않은 일이지만 처자식 먹여 살리기 위해 구체 없이 일하는 사람은 행복해질 수가 없다. 현대인들이 긴 주말을 보낸 후 월요일 아침에 출근하기 싫은 직장에 가는 우울증을 먼데이 블루스(Monday Blues)라고 부른다. 춤이 아니다. 직장에 가는 것이 소가 푸줏간에 가는 것과 같다면 도무지 행복할 수가 없다.

모든 사람은 해 아래서 허무한 인생을 살아간다. 하지만 그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일을 찾아 성실하게 행하고, 그 일 가운데서 기쁨을 누리는 것이 행복하게 사는 비결이다. 일이 즐거우면 힘도 덜 들고, 지치지도 않고, 끝까지 갈 수 있다. 이를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자기가 좋아하는 일거리 혹은 직장을 찾는 것이다. 이를 위해 우리는 대학에서 자기가 좋아하는 전공을 택해야 한다. 부모의 소원이 아니라 부모가 자녀들이 적성을 따라 진로를 결정하도록 도와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만일 자기가 좋아하는 전공을 선택하지도 못했고, 자기가 좋아하는 일거리도 찾지 못했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마지막으로 남은 방법은 자기가 하는 일을 즐거워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본문에서 “자기 일”이란 사람이 세상에서 하는 다양한 직업과 책임과 취미의 일들을 가리킨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주신 재능, 은사, 직분은 다양하다. 로마서 12장 68절은 하나님께서는 교회 안에 섬기는 일, 가르치는 일, 권위하는 [권면하고 위로하는] 일, 구제하는 일, 다스리는 일, 긍휼을 베푸는 일 등 여러 은사들을 주셨다고 했다. 우리 교회에서도 자기가 즐거워하는 일을 스스로 찾아서 해야 행복한 교회생활을 할 수 있다. 다른 사람의 수고에 무임승차해서는 절대로 영적으로 성장하지 못한다. 

자기의 하는 일을 즐거워하며 행하는 자는 행복한 사람이다. 바울은 젊은 여자들이 그 남편과 자녀를 사랑하며 집안일을 하라고 교훈했다(딛2:5). 베드로는 장로들이 즐거운 마음으로 교인들을 돌보아야 한다고 권면했고(벧전 5:2-3), 바울은 종들에게 단 마음으로 육신의 주인들을 섬겨야 한다고 말했다(엡6:5-8; 딛2:9-10). 사람은 살아 있는 동안 자기 일에 즐거워하는 것이 복인 줄 알고 하나님께서 주신 현실 속에서 항상 즐거워하며 일하고 살 때 행복해진다.

3. 서로 도우며 사는 원리 – 4:9-12

전도자가 말하는 세 번째 행복의 원리는 서로 돕고 사는 것이다. 이것은 대인관계의 행복이라고 할 수 있다. 4장 9절 이하에서 전도자는 이렇게 말한다: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그들이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 10 혹시 그들이 넘어지면 하나가 그 동무를 붙들어 일으키려니와 홀로 있어 넘어지고 붙들어 일으킬 자가 없는 자에게는 화가 있으리라 11 또 두 사람이 함께 누우면 따뜻하거니와 한 사람이면 어찌 따뜻하랴 12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맞설 수 있나니 세 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4:9-12)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마음을 나누고, 삶을 나누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 외로움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바로 그런 사람 될 때 다른 사람들도 내게 그런 사람이 된다. 길동무, 말동무가 되어 주고, 삶을 거들어 주는 동무가 되어 주는 것이다. 그래서 험한 세상에 지지대가 되어 주는 것이다. 

오늘 우리 한국 사회를 보면 극심하게 양극화 되어서 서로를 증오한다. 사회만 그런 것이 아니라 교회도 양극화 되어 서로 미워하고 있다. 아마 이러한 증오와 미움은 요즘 뿐 아니라 바울 시대에도 여전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바울은 갈라디아서 5장에서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갈5:15)고 말했다. 소아시아 교회만이 아니라 그리스에 있었던 교회들도 그랬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피차 권면하고 피차 덕을 세우기를 너희가 하는 것같이 하라”고 했다(살전5:11).

4. 화목한 가정의 원리 – 9:9

전도자가 말하는 네 번째 행복의 원리는 부부간에 화목한 가정을 이루는 것이다. 전도자는 9장 9절에서 “네 헛된 평생의 모든 날 곧 하나님이 해 아래에서 네게 주신 모든 헛된 날에 네가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즐겁게 살지어다 그것이 네가 평생에 해 아래에서 수고하고 얻은 네 몫이니라”고 했다. 이것도 세 번 째 원리처럼 다른 사람과의 관계로 인한 행복이라고 할 수 있다. 주어진 가정에 감사하고 소박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 행복이라는 것이다.

함께 살아가는 부부지만 부부간의 일상적인 것, 평범한 것이 얼마나 소중하고 아름다운지… 부부는 바른 믿음 안에서 인격적으로 서로 사랑함이 있어야 한다. 잠언 기자는 “네 샘으로 복되게 하라. 네가 젊어서 취한 아내를 즐거워하라. 그는 사랑스러운 암사슴 같고 아름다운 암노루 같으니 너는 그 품을 항상 족하게 여기며 그 사랑을 항상 연모(戀慕)하라”고 교훈하였다(잠5:18-19). 또한 잠언 기자는 “어진 여인은 그 지아비의 면류관”(잠12:4)이라고 했다. 바울도 에베소서 5장에서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 25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고 했다(엡5:22,25). 

부부가 화목하지 못하면 어떤 사람도 행복할 수가 없다. 이것을 잠언 기자는 기막힌 시적 언어로 “다투는 여자는 비 오는 날에 이어 떨어지는 물방울이라”(잠27:15)고 표현했다. 또한 잠언 기자는 “…욕을 끼치는 여인은 그 지아비로 뼈가 썩음 같게 하느니라”(잠12:4)고 했다. 물론 화목하고 행복한 가정은 부부만이 아니라 자녀들과의 관계도 중요하다. 그래서 잠언 기자는 “미련한 아들은 그의 아비의 재앙이요 다투는 아내는 이어 떨어지는 물방울이니라”(잠19:13)고 했다.

가정을 위한 쥬빌리의 중보기도제목을 아는가? 주보 뒷면에 있는 중보기도란 끝 부분을 보라: “쥬빌리에 속한 부부들이 서로를 존경하고 귀히 여기며 하나님이 계획하신 아름다운 가정을 이룰 수 있게 하시고 각 가정에 허락하신 자녀들이 하나님의 형상을 온전히 회복하고 밝고 건강하며, 하나님 말씀을 소중히 여기고 부모님을 공경하며 자라도록”. 쥬빌리에 속한 가정들이 부부간에 화목하고 자녀들이 밝고 건강하게, 부모를 공경하면서 자라고 있다면 메아리 기도회의 중보기도 덕인지 알아야 한다. 그리고 앞으로는 다른 사람의 기도의 빚만 지지 말고 모두 기도회에 참석해서 함께 다른 사람들을 위해 중보기도하기 바란다. 

5. 창조자를 경외하는 원리 – 12:13-14

전도자가 말하는 마지막 행복의 원리는 창조자 하나님을 기억하고 그를 경외하는 것이다. 전도자는 12장 맨 끝에 이르러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12:13)고 했다. 이 원리는 앞에 있는 다른 네 가지 원리의 결론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원리는 너무나 중요하기 때문에 전도서에서도 한 번이 아니라 여러 차례 반복하고 있다. 3장에서는 “하나님이 이같이 행하심은 사람들이 그의 앞에서 경외하게 하려 하심인 줄을 내가 알았도다“(3:14)라고 했다.

유스나 청년대학부 청년들도 아직 나이가 어리다고, 젊다고 마음대로 살아서는 안 된다. 전도자는 말하기를 “청년이여 네 어린 때를 즐거워하며 네 청년의 날들을 마음에 기뻐하여 마음에 원하는 길들과 네 눈이 보는 대로 행하라 그러나 하나님이 이 모든 일로 말미암아 너를 심판하실 줄 알라”(11:9)고 했다. 12장에 가서도 “너는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에,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들이 가깝기 전에 2 해와 빛과 달과 별들이 어둡기 전에, 비 뒤에 구름이 다시 일어나기 전에 그리하라”(12:1-2)고 했다. 창조자를 기억하고 그를 경외하고 그의 명령을 지키는 것, 그것이 사람의 본분이요 행복이라는 것이다(12:13).

이 마지막 행복의 원리는 너무나 중요하기 때문에 성경 전체에서 반복해서 강조한다. 신명기 10장에서 모세는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 내가 오늘날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신10:12-13)라고 했다. 미가 6장에서 선지자는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6:8)라고 했다. 사람의 본분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분의 말씀을 지키며 사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살 때 행복한 인생을 살 수 있다.

IV. 결론과 권면

Conclusion and Encouragements

결론적으로 전도자는 인생은 헛되다(1:2)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수고도 헛되고(1:3), 지식과 지혜도 헛되고(1:14), 쾌락도 헛되고(2:1), 사업도 헛되고(2:3), 뛰어난 재주도 헛되고(4:4), 부요함도 헛되고(4:8, 5:10, 5:15, 6:2), 권력도 헛되고(4:15-16), 장수와 자녀가 많은 것도 헛되고(6:3, 6:6), 젊음도 헛되고(11:9), 지식도 헛되다(12:12)고 말한다. 전도서에 등장하는 말 중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는 “헛되다”(헤벨)는 표현이다. 불과 12장에 불과한 전도서에 이 말이 무려 38회나 등장하고 있다. 

헛되다는 말에만 집중하면 전도서는 성경이라기보다 무슨 허무주의, 염세주의 철학책 같기도 하고, 숙명론이나 운명론을 말하는 것 같기도 하다. 헛되다는 말에만 집중하면 전도서는 세상을 고해라고 말하는 불교의 가르침과 다르지 않다. 그래서 적극적 사고방식, 긍정의 힘 따위의 설교가 인기를 얻는 시대에 헛되다는 말만 하는 듯 한 전도서 설교는 별 인기가 없다. 

하지만 우리는 전도서를 읽을 때 표면적 표현만 봐서는 안 된다. 역설적이게도 전도자는 인생이 헛되다는 것을 수없이 반복하면서 헛되지 않은 것을 찾아가는 치열한 과정을 보여준다. 그리고 맨 끝에 가서 전도자는 이 세상에서 추구하는 모든 것이 헛되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만이 하나님을 만나게 되고, 영원한 것, 참 가치가 있는 것을 찾는다고 결론짓는다. 

전도서는 허무주의나 염세주의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저것 누려 본 왕이 ‘해 아래’ 이 땅의 모든 삶에 새것이 없고 헛되지만, ‘해 위에’는 하나님이 계시고, 영원한 삶이 있고, 심판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기, 권력, 명예 등에 한 눈 팔지 말고 인간의 참된 본분을 돌아봐야 한다는 것이다. 주어진 삶에 감사하며 소박한 삶을 살고, 겉으로 볼 때 너무나 평범하고 뻔한 것 같은 삶이지만, 바로 우리에게 주신 삶이며, 우리가 살아가야 할 삶인 것이다.

전도서에 등장하는 말 중에 두 번째 많이 등장하는 말은 “해 아래서”라는 표현이다. 이것은 전도서 전체에 걸쳐 30회나 등장하고 있다. 이것은 “해 위의” 세계가 있음을 은연중에 나타내는 말이다. 해 아래서 이루어지는 모든 것들이 허무하지만 그렇지 않은 영원한 해 위의 세계가 있음을 의미한다. 

양력설을 맞아서 다짐했던 새해 결의가 희미해진 분들은 음력설을 지나면서 다시 한 번 우리 인생이 무엇인지, 내가 몇 번이나 설이 더 남았는지를 헤아려보자. 그리고 3천 년 전 전도자가 말해 준 행복의 원리를 되새기면서 복된 한 해, 복된 남은 인생을 살아가는 쥬빌리의 식구들이 되시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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