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te icon The ChristianTimes

[특별연재] 행복을 당신 손 위에(4)

woman doing hand heart sign

Photo by Hassan OUAJBIR on Pexels.com

뜨거운 여름

고난의 씨앗들

연년생으로 태어났던 언니는 4살에 천국으로 가게 되었다. 백혈병에 걸린 언니를 살려보고자 어머니는 대학병원을 데리고 다니시며 애를 많이 쓰셨다고 한다. 1970년 당시, 백혈병은 치료되기 어려운 병이었고, 결국 언니는 하늘나라로 먼저 떠나게 되었는데 그 일로 인해 둘째인 나는 장녀가 된 것이다. 부모님은 언니를 잃고 슬픔에 잠겨 있을 때, 내가 있어 위로를 많이 받으셨다고 하니 생각할수록 다행이다. 

 안타깝게도 언니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다. 우리 집은 대가족으로 증조할머니, 조부모님, 부모님, 남동생, 그리고 내가 살았는데 언니와 내가 함께 자전거를 타고 있는 사진 한 장을 보여주신 것 외에 다른 사진들은 본 적이 없다. 추억이 없어서인지 언니의 존재가 그다지 내 마음에 크게 자리 잡지 않았지만, 나이가 들수록 언니가 없다는 사실이 아쉬웠다.

감사하게도 우리 집안은 4대째 기독교 집안으로 증조할머니께서는 고향인 음성에 교회를 세우실 만큼 믿음 생활을 열심히 하셨다. 친척들 대부분도 거의 다 기독교 신자셨고 특히 어머니는 장로교 목사님의 딸로 자라셨다. 이모도 전도사님으로 교회에서 헌신하셨고 사위를 목사로 얻는 복을 받으셨다. 외할머니는 목회자의 아내이면서 전도사님으로 일하셨는데 병 고침의 은사가 있으셔서 부흥사처럼 이곳저곳에서 치유도 하시며 전도를 하러 다니셨다.

학교 선생님이셨던 외할아버지는 늦게 목회를 시작하셨는데 어머니와 가족들은 늘 가난하게 사셨다. 고학생으로 홀로 자취하다 연탄가스를 맡고 죽을 뻔한 적도 있었다고 하신다. 사역자들이신 외조부모님은 열심히 목양의 사명을 감당하셨다. 외할머니는 늘 교회 강대상 앞에서 교인들의 기도 제목을 놓고 눈물로 간구하셨고, 어머니가 아플 때도 밤새워 기도하시는 외할머니를 기다리던 날도 있으셨다고 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외할아버지는 목회를 열심히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노년에 당뇨가 심해지셔서 합병증으로 인한 실명으로 앞을 못 보게 되셨다. 그러나 그분들은 끝까지 믿음을 지키시며 후손들을 위해 늘 기도하시고 삶과 믿음의 모범을 보여주셨다. 외할머니는 손주들을 위해 기도를 많이 해 주셨는데, 그중에서 나에게는 가정을 갖고 사역하는 여 선지자, 드보라 같은 여종이 되게 해 달라는 특별한 기도를 해 주셨다고 한다. 왜 그런 기도를 하셨는지 내가 사모가 된 이후에서야 어머니는 깨닫게 되었다고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 믿음의 뿌리를 내릴 수 있는 복된 가문을 주셨으나 자녀를 잃는 고난은 목회자 딸인 어머니도 피해 갈 수는 없었다. 

5살 무렵, 아버지의 직장 일로 포항에서 살았다. 그곳에서도 어머니는 약국을 경영하셔서 나는 종종 약국 앞에서 자전거를 타고 놀곤 했다. 어느 날, 약국 앞에서 놀다가 손수레에 부딪혀 이마를 땅바닥에 세게 찍힌 후 언제부터인가 눈이 사시 현상을 보였다고 한다. 초등학생이 되고 경기도 시흥으로 이사를 오면서 나는 사시 수술을 받게 된다. 겁이 많은 나를 걱정하신 어머니는 수술 이야기도 하지 않으신 채, 어느 날 아무 말 없이 병원으로 데리고 가셨고, 의사는 크고 무서운 목소리로 눈 수술에 대한 말을 꺼냈다. 그 목소리는 두려움을 불러오기에 충분했다. 불안하기만 했던 나는 처음으로 전신마취를 하고 양 눈 사시 수술을 받게 된다. 어린 나이였기에 수술에 대한 것도 잘 몰랐던 나는, 눈 수술을 한 후 회복 기간이 너무 길어 수술 자체보다 더 고통이 컸다. 나이는 어렸지만, 하나님을 간절히 찾을 수밖에 없었다. 처음으로 받은 수술이었으며 근심과 두려움과 싸운 첫 영적 전쟁이었다.

Exit mobile vers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