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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희년 이야기] 공의와 은혜는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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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년 이야기] 공의와 은혜는 하나

세례 요한에게 그 이름 ‘요한’은 하나님이 가브리엘 천사를 통해 친히 지어주신 이름이므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눅 1:13). ‘요한’으로 번역된 헬라어 ‘요안네스’의 히브리 이름은 ‘요하난’으로, ‘요’는 ‘여호와’의 단축형이고, ‘하난’은 ‘은혜롭다’라는 뜻이다. 그래서 ‘요한’이라는 이름은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다”라는 뜻이다. 

세례 요한은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다”라는 뜻을 가진 자신의 이름처럼, 장차 이스라엘 백성에게 죄 사함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알게 하고 그들을 하나님께로 많이 돌아오게 하는 은혜의 사역을 할 것이다. 불의를 자행하는 사람들에게 “독사의 자식들아”라고 부르며 당장 회개하고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강력하게 촉구한 세례 요한의 추상같은 예언 사역은 모두 본질적으로 은혜 사역이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불의한 자들이 회개하지 않으면 그들은 하나님의 진노에 의한 무서운 심판을 피할 수 없으므로, 회개야말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공의를 위해 회개를 촉구하는 예언자의 사역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를 본질로 삼아 그 하나님의 은혜를 드러내는 사역인 것이다. 공의와 은혜는 서로 다른 둘이 아니라 본질상 하나인 것이다.

세례 요한은 천사가 사가랴에게 전한 하나님의 말씀과 같이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눅 1:15), 아이 때부터 “주의 손이 그와 함께 하심”(눅 1:66) 가운데, “심령이 강하여지며”(눅 1:80) 빈들에서 살았다. 그럼 세례 요한이 이스라엘에게 나타나는 날까지 빈들에서 산 목적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그 빈들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기 위해서였다. 그럼 그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그가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선지자”(눅 1:76)로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이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결국 하나님의 말씀이 빈들에서 그에게 임하였다(눅 3:2).

그럼 왜 빈들인가? 첫째, 빈들은 다른 사람들의 방해를 받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만 집중하여 기도할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빈들은 골방과 같다(마 6:6). 둘째, 빈들 곧 광야는 ‘옛 출애굽’의 길이었으므로 그때를 기억하며 장차 주께서 이루실 ‘새 출애굽’의 길을 준비할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럼 빈들에서 요한에게 임한 하나님의 말씀은 무엇인가? 그것은 이어지는 다음 구절에서 알 수 있다. 바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눅 3:3)에 대한 말씀이었다.

그런데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는 누가복음의 앞부분(눅 3:3)과 뒷부분(눅 24:47)에 등장하여 누가복음 전체를 봉투처럼 감싸고 있다. 이는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누가복음의 매우 중요한 주제라는 사실을 드러낸다. 

하나님의 말씀이 빈들에서 세례 요한에게 임했는데, 그 말씀은 바로 ‘회개’에 대한 것이었다. 세례 요한은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를 전파했고, 그 회개 의식이 바로 세례였다. 그는 회개가 단순히 세례 받는 것에서 그쳐서는 안 되고 반드시 “회개에 합당한 열매”(눅 3:8)를 맺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오늘날 한국 교회는 수많은 문제들을 갖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2천 년 전에 빈들에서 세례 요한이 “회개하라!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외친 소리를 우리는 반드시 가슴에 새겨야 한다. 회개 없이는 개혁도 없다. 회개 없이는 부흥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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