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가난한 과부” – 탄식인가, 탄복인가?
예수님은 성전에서 사람들이 헌금하는 것을 보셨다(눅 21:1-2). 그 가운데는 어떤 가난한 과부도 있었다. 그녀는 자기의 전 재산인 두 렙돈을 헌금했다. 두 렙돈은 약 천 원 정도의 금액이다. 이 가난한 과부에게 전 재산이 두 렙돈밖에 없었다는 사실은 그녀가 땅은 물론이고 집도 없는 상태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본문 직전에 서기관들이 과부들의 가산을 삼키고 있다는 예수님의 말씀이 있기 때문에(눅 20:46-47), 이 가난한 과부는 불의하고 외식하는 서기관들에게 자신의 가산을 모두 빼앗긴 결과, 전 재산이 두 렙돈밖에 남지 않은 극빈층으로 전락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 가난한 과부가 두 렙돈밖에 남지 않은 자기 전 재산을 헌금하는 것을 보시고 예수님은 두 가지 감정을 느끼셨을 것이다. 하나는 탄식이고 다른 하나는 탄복이다. 탄식은 그 가난한 과부에게 전 재산이 두 렙돈밖에 남지 않게 만든 불의한 강탈 체제에 대한 것이다. 그리고 탄복은 그런 불의한 강탈 체제의 희생자임에도 불구하고 그 고난을 승화시켜 모든 재산을 바치고 여선지자 안나(눅 2:36-38)처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금식하며 기도하려는 그녀의 헌신에 대한 것이다.
그럼 이 본문을 오늘날 우리에게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까? 네 가지이다.
첫째, 이 가난한 과부의 헌신을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한 우리 헌신의 모범으로 삼아야 한다. 당시에 과부는 소외된 자였다. 거기에 가난한 과부라면 더 말할 나위가 없다. 그것도 전 재산이 두 렙돈 밖에 안 되는 극도로 가난한 과부라면 더욱 그러하다. 한마디로 이 가난한 과부는 소외된 자 중의 가장 소외된 자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런 가난한 과부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해 헌신할 수 있다면, 그녀보다 훨씬 더 나은 처지에 있는 우리는 더욱더 헌신할 수 있는 것이다. 이 가난한 과부의 헌신은 우리 헌신의 모범인 것이다.
둘째, 오늘날 교회 안에 과부들의 가산을 삼킨 서기관들과 같은 악을 자행한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은 즉시 회개해야 한다. 예수님을 만난 삭개오의 고백처럼 “속여 빼앗은 일”에 대해 즉각 배상해야 한다. 그런데 이런 강탈에는 개인적 강탈뿐만 아니라 구조적 강탈이 있다. 개인적 강탈은 인식하기 쉬우나 구조적 강탈은 인지하기 어렵다. 예컨대 건물주들이 그 부동산 가격의 폭등과 전월세 가격의 폭등으로 막대한 이익을 보는 반면 세입자들은 피눈물을 흘려온 문제는, 가난한 세입자로부터 부유한 건물주에게로 부를 구조적으로 이전시켜 빈부 격차를 심화시킨 구조적 강탈이다. 따라서 이런 구조적 강탈에 대해서도 회개하고 배상해야 마땅한 것이다.
셋째, 우리 사회에서 더 이상 이 가난한 과부와 같은 희생자들이 우리 시대에 생기지 않도록 불의한 구조적 강탈 체제를 혁파해야 한다. 현대판 ‘지주-소작’ 제도인 ‘건물주-세입자’ 제도를 무력화시키는 토지평등권 개혁과 같은 희년 대개혁을 강력하게 실시해야 한다. 희년 실천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제도적 희년’이고 다른 하나는 ‘자원적 희년’이다. 토지평등권 개혁은 ‘제도적 희년’에 해당되는데, 이런 사회 개혁을 통해 더 이상 이 가난한 과부와 같은 희생자들이 생기지 않게 해야 한다.
넷째, 우리 교회에서 이 가난한 과부와 같은 희생자들을 돌보고 책임져야 한다. 이런 코이노니아는 ‘자원적 희년’에 해당되는데, 이런 교회 개혁을 통해 이 가난한 과부와 같은 불의한 강탈 체제의 희생자들이 적어도 교회 안에서는 더 이상 죽음을 생각하지 않고 존엄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