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설교 (2), 철학이 아닌 복음
“목수는 와서 ‘내 건축 기술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 보세요’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는 건물을 빌려서 설치하고 자신의 능숙한 기술을 보여준다. 이같이 하는 것이 여러분이 할 일이다. 먹고 마시고 옷 입는 방식에서 인간답게 행동하라. 결혼하고 자녀를 낳고 시민의 의무를 다 하라. 비난을 참으라. 불합리한 형제에 대하여 참으라. 아버지께 순종하라. 자녀를 노엽게 말라. 이웃이나 친구에게 악을 행하지 말고 한 인간으로 대우하라. 이것들을 보여주라. 여러분이 철학자들에게서 정말로 무언가를 배웠다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도록 말이다.
어리석은 인간이여, 이런 일들은 부주의하고 무계획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적절한 나이, 적합한 삶의 방식, 그리고 인도하시는 신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겠는가? 신들에게 제물을 바치고 도움을 간청하기 전에는 아무도 항구를 떠나거나 배를 출항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먼저 신에게 기도하지 않고는 씨를 뿌리지 않는다. 이토록 위대한 일을 감행한 사람이 신 없이 무사히 시도할 수 있겠는가? 사제가 있으니 내가 여기에 사제를 세우겠다. 케릭스 (전령자, 설교자)가 있으니 내가 케릭스를 임명하겠다. 신은 소크라테스에게 반박의 직무를 맡기셨고, 디오게네스에게 권위 있는 질책의 직무를, 그리고 제논에게는 교리적 가르침의 직무를 맡으라고 권고하셨다.”
위의 글은 고대 로마 황제 네로가 지배하던 시대에 활동했던 철학자 에픽테노스의 『담론 Discourses』에 있는 내용입니다. 그에 따르면 철학자는 신성한 존재로 하나님의 뜻을 인간에게 전하는 케릭스, 즉 전령자였습니다. 철학자는 하나님의 뜻을 인간 사회에 선포하는 설교자였습니다. 철학자들은 하나님이 자신들에게 주신 사명을 깊게 인식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신성한 비밀을 계시해 주셨고, 이제 자신은 그것을 선포해야 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통해서 말씀하신다고 믿었습니다. 자신의 가르침은 가르침은 하나님의 계시이고, 그의 설교는 곧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래서 자신 가르침을 따르기를 거부하는 것은 하나님을 무시하고 거스르는 행위였습니다.
고대의 철학자들은 자신들은 하나님의 목소리로서 세상을 두루 다니며 온갖 고난을 감수하는 것을 사명으로 받아드렸습니다. 그는 가족도, 집도, 나라도 모릅니다. 그는 배낭과 지팡이 하나만으로 부족함이 없다고 선포하며, 약한 자를 위로하고, 부유한 자에게 경고하고, 모든 사람의 구원을 염려합니다. 그는 거리와 시장에서 사람들에게 선과 악에 대해 가르치고, 오류를 꾸짖으며, 자신을 본받도록 권합니다.
철학자들의 설교와 사도들의 설교는 겉으로 같은 것으로 보여져서 시민들에게 상당한 혼란을 일으켰습니다. 둘 다 하나님의 사자입니다. 둘 다 투철한 사명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둘 다 사람들에게 구원을 가져다 주는 새로운 메시지를 전합니다. 그들의 활동 방식에는 큰 차이가 없습니다. 그들의 사역은 설교, 즉 자신에게 맡겨진 메시지를 큰 소리로 선포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유사성은 매우 강해서 자신을 방랑하는 철학자로 오해하는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에게 바울은 반증해야 했습니다.
“우리의 권면은 간사함이나 부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속임수로 하는 것도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 옳게 여기심을 입어 복음을 위탁 받았으니 우리가 이와 같이 말함은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함이 아니요 오직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함이라 너희도 알거니와 우리가 아무 때에도 아첨하는 말이나 탐심의 탈을 쓰지 아니한 것을 하나님이 증언하시느니라.” 곧 이어 자신들은 그리스도의 사도로서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서는 목숨을 내 놓는 것도 기쁨이라고 덧붙입니다.
철학을 배우는 한 제자가 에픽테노스에게 “철학자란 어떤 사람입니까?”라고 질문합니다. 스승인 그는 철학자는 하나님의 전령자로 “욕망을 완전히 절제하고 의지를 통제하는 자”로 정탐꾼이며 천사라고 정의합니다. 자신들의 임무는 인간들의 삶을 관찰하고 조사하는 스파이로, 이러한 관찰을 바탕으로 자신들의 메시지를 선포하는 자들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기독교 설교자는 인간관계를 엿보는 스파이가 아닙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을 선포하는 자입니다. 선포하는 내용의 어떤 부분, 특히 인간에 관한 내용은 비슷할 수 있지만, 그 출발점은 완전히 다릅니다. 그리스도인의 설교 중심은 인간의 사악함이나 부정함이나 방탕함이 아닙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임재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사절이자 설교자인 반면에, 철학자들은 제우스와 같은 신들의 사자입니다. 사명감에 있어서 누구의 전령인가는 매우 중요한 요소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만물의 주인 되신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이 있는 반면, 철학자들은 잡다한 신들에게 받은 사명이 있습니다.
기독교 설교는 선지자들의 예언의 말씀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다는 깨달음에서 시작합니다. 원시 교회의 설교는 이 원칙을 벗어나지 않습니다. 초기 교회 설교자들은 는 메시지를 선포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렇게 소개합니다. “나사렛이란 동네에 가서 사니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에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 하심을 이루려 함이러라.” 그들은 예수님의 사역을 소개하면서, 예수님의 죽음을 알리면서, 그리고 제자들의 예수님 배반을 언급할 때도예언의 말씀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다는 케리그마의 원칙을 준수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된 것은 다 선지자들의 글을 이루려 함이니라 하시더라 이에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 예수님도 예언된 내용이 자신의 삶을 통해 성취된다는 사실을 가르쳤습니다. “이르시되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철학자들의 설교는 인간의 근본적인 회심과 쇄신을 수반하는 새로운 시대를 열어주는 내용이 아닙니다. 그것은 단지 정신이 건강한 인간으로 성장하기 위한 변화를 목표로 합니다. 그것은 가르쳐야 합니다. 그것은 자기 계발로 이어져야 합니다. 악덕과 미덕의 목록은 이러한 목적에 부합됩니다. 철학자는 인간의 그릇됨을 끊임없이 꾸짖어야 합니다. 철학자들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선포하지 않습니다. 대신 도덕과 윤리와 사회 정의를 외칩니다. 그들의 관심은 인간의 사악함과 개선을 통한 선함입니다. 그들의 메시지는 죄의 용서가 아니라 인간의 고행을 통한 선의 발전입니다.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깊은 사랑인 성육신의 행위가 아닙니다. 처절한 고행을 이루고 더 많은 자비를 실천한 사람을 신격화하는 것입니다. 기독교 설교의 중심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그리스도입니다.
이남규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