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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교회를향한 하나님의 메시지] 예수님의 이름으로 선을 행하는 자를 환대하라

예수님의 이름으로 선을 행하는 자를 환대하라

예수님의 두 번째 수난 예고(Passion Prediction: 막 9:30-32)와 섬김과 관련된 참된 제자도의 가르침(막 9:33-37) 이후에 사도 요한은 예수님을 따르는 자신들의 공동체에 소속되어 있지 않지만,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는 알려지지 않은 축귀자(unknown exorcist)에 관하여 예수님께 질문합니다. 요한의 질문은 자연스럽게 예수님께서 역설적 대조를 통한 참된 섬김의 모습을 가르쳐 주신 내용 중 예수님의 ‘이름’(onoma: name)이라는 주제와 연결 고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섬김에 관한 참된 제자도에 관하여 제자들에게 가르치실 때 자신의 이름으로 어린 아이를 받아들이는 것이(accepting) 예수님 자신을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막 9:37). 그리고 요한의 질문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는 축귀자에 관하여 그가 예수님의 권능 안에서 행동하고(acting in the power of Jesus)있음을 내포하고 있습니다(막 9:39-40). 이처럼 마가복음 9장 38-41절은 9장 33-37절의 핵심 어구인 “내 이름으로”라는 표제어를 가져와 연결(catchword association)하는 방법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막 9:38) 요한이 그(예수)에게 말했습니다. “선생님, 우리가 어떤 사람이 당신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를 막으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우리를 따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39) 그러자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를 막지 말라. 왜냐하면 나의 이름으로 능력을 행하는 사람은 아무도 곧바로 나를 비방하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40) 왜냐하면 누구든지 우리를 대적하지 않는 사람은 우리를 위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41) 왜냐하면 누구든지 그리스도에게 속해 있다는 이유로 [그] 이름으로 너희들에게 물 한잔을 주는 자는,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는] 결코 자신의 보상을 잃지 않을 것이다.” (Translated by YG Kim)

야고보와 더불어 ‘우뢰의 아들’(sons of thunder: 막 3:17)인 요한은 제자들을 대표해서 예수님께 질문합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의 공동체 밖에 있는 어떤 사람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는 것을 목격하였고, 그가 자신들의 공동체에 속해 있지 않다는 이유로 그의 행동을 금지하려고 하였습니다. 요한을 중심으로 한 제자들의 요점은 비록 그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있었지만, 그는 열두 제자의 그룹에 소속되어 있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따르는 자신들의 공동체에 소속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축귀 행동을 금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표면적으로 소속감의 문제를 제기하였지만, 제자들의 속 마음에는 시기(phthonos: envy)가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으로부터 이미 귀신을 쫓아내고 병자를 고치는 능력을 받았지만(막 6:7),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높은 산에 올라가 변화되셨을 때 산 아래에서 “말 못하는 영”에 의해 사로 잡혀 있는 아이를 고치지 못하는 무능력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들을 따르고 있지 않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모습을 통하여 마음에 시기가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시기’를 헬라적 개념에서 생각해 보면 ‘악한 눈’(evil eye)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제자들이 귀신을 쫓아낼 수 없는 자신들의 무능력을 깨달았을 때 그들은 악한 눈으로 자신들의 공동체 밖에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는 사람을 바라보았습니다.

요한을 중심으로 한 제자들의 특권 의식에서 비롯된 시기와 달리 예수님께서는 공동체 밖에서 귀신을 쫓아내는 자의 행동을 금지하지 말라는 근거를 이유를 설명하는 접속사 ‘gar’(for)을 세 번 사용해서 말씀하십니다(막 9:39-40).

첫째, 왜냐하면 그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능력을 행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막 9:39c).

둘째, 왜냐하면 그는 예수님과 제자들을 대적하지 않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막 9:40).

셋째, 왜냐하면 제자들이 그리스도에게 속해 있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막 9:41).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첫 번째, 두 번째 근거는 제자들의 공동체 밖에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는 자의 태도에 관한 문제라면, 세 번째 이유는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의 관용적인 태도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첫째,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의 공동체 밖에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능력을 행하는 사람은 단순히 병고치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귀신을 쫓아내는 초자연적인 ‘능력’(dynamis: power)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능력은 예수님의 사역을 통하여 나타나는 능력입니다(막 5:30; 6:2, 5). 따라서 마가는 우리에게 공동체 밖에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능력을 행하는 사람이 어떠한 신앙을 가지고 있었고, 그가 누구인지 구체적인 정보를 제공해 주지 않지만, 그가 예수님의 이름을 근거하여(epi: in the name of someone) 능력을 행하고 있는 모습을 통하여 그 역시 하나님의 나라에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계십니다.

둘째, 예수님께서는 자신들의 공동체 밖에서 귀신을 쫓아내는 사람이 우리를 대적하지 않는 사람으로 결과적으로 예수님을 위하는 자임을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마가복음에서 예수님의 대적자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방해하는 자들로 복합적인 개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대적하는 자들은 외부적인 종교, 정치 집단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내부적인 대적자들과 초자연적인 대적자들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근본적으로 사탄의 세력과 싸우는 종말론적 전투(eschatological combat)입니다. 따라서 초자연적인 대적자인 사탄과 귀신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the Son of God)이라는 사실과(막 1:24; 5:7) 하나님의 능력을 인정하고 있지만, 그들의 목적은 예수님의 사역이 열매 맺는 것을 방해하는 것입니다.

또한 자신들의 전통을 지키기 위해서 종교적으로 정치적으로 예수님의 사역을 반대하는 대적자들은 유대 종교 지도자들과 로마의 권력 아래에 있는 세속적 지도자들입니다. 서기관들은 예수님의 권위에 도전하면서 예수님이 신성 모독을 했다고 비난하였고(막 2:7), 바리새인들과 헤롯 당원들은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서 질문하면서 예수님을 적대적으로 비난(hostile accusation)하였습니다(막 2:18; 3:2; 5:35; 10:2).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자들의 질문이 종교적 동기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려는 위선적인 시도임을 알고 계셨습니다(막 12:15). 또한 대제사장들과 산헤드린은 예수님을 죽음에 처하게 하는 핵심적인 세력들이었고(막 15:1), 로마 당국으로부터 권력을 위임 받은 세속적 대적자 본디오 빌라도는 예수님을 ‘유대인의 왕’(막 15:2, 9, 12, 18, 26)이라는 혐의로 십자가에 처형하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이러한 외부적인 대적자들과 함께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와 공동체 안에서도 내부적인 대적자들(internal adversaries)이 있었는데, 바로 예수님의 제자들과 가족들입니다. 예수님의 가족과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의 사역을 이해하지 못하고 배척했으며(막 3:20-21; 3:31-35; 6:1-6), 심지어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는 예수님의 첫 번째 수난 예고에 반대하였고, 그 결과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사탄아 나의 뒤로 물러가라”(막 8:33a)라고 책망하였습니다. 가룟 유다 역시 예수님을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에게 돈을 받고 넘겨주었습니다(막 14:10-11, 43).

결과적으로 예수님을 대적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대적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요한의 질문으로 등장하고 있는 예수님의 공동체 밖에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는 사람은 예수님의 공동체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예수님을 지지하는 사람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일하는 자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그를 포용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마지막 세 번째로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공동체 안에서 제자들에게 환대와 관련해서 말씀하십니다. 학자들은 마가복음 9장 41절이 9장 38-40절과 연결되어 있는 내용인지 또는 개별적인 내용인지 논의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우리가 사용하는 헬라어 성경 가운데에서도 NA27, 28(Nestle-Aland 27th, 28th)에서는 마가복음 9장 41절을 별개의 문장으로 구분하여서 단락을 나누고 있지만, UBS5(The Greek New Testament 5th)에서는 41절을 단락 구분 없이 요한의 질문에 관한 예수님의 답변으로 포함시키고 있습니다.

마가복음 9장 41절이 38-40절에 포함되었다는 이유는 첫째, ‘gar’라는 접속사로 연결되어 있고, 둘째, ‘이름’이라는 ‘catchword’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는 자를 포용해야 하는 이유를 환대의 신학(Theology of Hospitality)으로 설명하십니다.

마가복음에서 환대의 신학의 핵심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병자들과 귀신 들린 자, 사회적 약자인 여인들과, 어린이들, 그리고 이방인들과 죄인들처럼 사회적 경계 밖에 있는 자들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참된 제자도와 관련된 가르침에서 환대의 대상을 사회적으로 가장 보잘 것 없고, 중요하지 않은 어린 아이(paidion: very young child or infant)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예수님을 영접하는 행동이라고 말씀하십니다(막 9:37).

마가복음 9장 41절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환대의 행위는 물 한잔을 나누는 사소한 행동에서 시작됩니다. 이렇게 물 한잔을 나누는 동기는 물을 받는 사람이 “그리스도에게 속해 있다는 이유”입니다. 따라서 환대의 조건은 소속감이지만, 그 행위는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리스도에게 속해 있다는 이유”로 물 한잔을 나누는 행위는 지극히 작은 자의 행동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행동의 보상은 결코 작지 않습니다. 누군가가 제자들에게 ‘그리스도의 사람’이라는 이유로 물 한잔을 나누는 것은 결과적으로 그들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자리에 함께 서 있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요한의 질문에 제자들이 어떻게 환대의 신학을 실천할 수 있는지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는 자가 자신의 공동체에 소속되어 있지 않더라도,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함께 걸어가는 자임을 인정하였을 때 그들에게는 종말론적 보상(eschatological reward)이 주어질 것입니다.

<함께 나누기>

  1. 마가복음 9장 40-41절은 9장 33-37절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습니까?
  1. 사도 요한을 중심으로 제자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는 자의 행동을 금지하려고 했던 외면적 이유와 내면적 이유는 무엇입니까?
  1. 예수님께서 공동체 밖에서 자신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는 자의 행동을 막지 말라는 세가지 이유가 무엇입니까? 첫 번째, 두 번째 이유와 세 번째 이유는 어떻게 구분되어져 있습니까?
  1. 에수님께서는 공동체 밖에서 자신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는 자가 예수님을 대적하지 않았다고 말씀합니다. 마가복음의 중심 주제 가운데에서 하나인 ‘대적자’에 관하여 정의해 보고, 외부적인 대적자와 내부적인 대적자를 구분해서 설명해 보십시오.
  1. 마가복음 9장 41절은 근거해서 환대의 신학에 관하여 설명해 보십시오. 환대의 신학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1. 마가복음 9장 41절에 기록되어 있는 환대의 신학의 이유는 무엇입니까?
  1.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환대의 신학의 결과는 무엇입니까?

복음에 빚진 자 김윤규 목사 (토론토 쉴만한물가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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