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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아!그런뜻이었구나] 기쁨 (3) 우리의 문화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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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쁨 (3) 우리의 문화유산

젊은 날 방탕한 생활은 했던 성 어거스틴은 현재 자신의 삶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삶이 엉망이 될 때도 나는 기쁨이 넘쳐납니다. 이 기쁨은 신체의 감각으로나 눈으로 보거나 귀로 들은 것이거나 냄새를 맡거나 손으로 만지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이전에 기뻐했던 그 때에 내 마음 속에서 경험된 것이 현재 기억 속에 떠오르기 때문입니다. 이 기쁨은 불경건한 자들에게는 주어지지 않고 오직 주님을 사랑하는 자들에게만 주어지는 기쁨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곧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행복한 삶이란 진리로 인해서 얻는 기쁨입니다. 그것은 진리이신 주님 아래서 얻는 기쁨입니다.” 어거스틴은 자신이 그리스도인으로 회심할 때 얻게된 기쁨은 변치 않고 계속되고 있다는 것을 고백한 것입니다. 그 기쁨의 원동력은 현재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의 삶에 주님께서 공급해 주시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신약성경에서 기쁨을 뜻하는 단어들이 언급되는 내용을 면밀히 살펴보면 기쁨은 기독교 신앙의 주요 교리에 확고히 기초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와 그 국가를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성품에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마태는 하나님의 나라를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라고 표현합니다. 고대 유대 문화에서 웨딩 잔치는 기쁨 가득 찬 축제였습니다. “한 기쁨 (결혼의 기쁨)과 다른 기쁨 (민족 명절의 기쁨)이 섞이지 않기 위해” 유대법에는 민족의 대 축제일에 결혼은 금지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혼인잔치에 비길만큼 기쁨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통치자 하나님은 결혼하는 아들을 사랑하는 아버지로 비유됩니다. 하나님의 칭호는 오늘날 어린 아이가 부를 수 있는 익숙한 용어인 “아빠”로 표현되어 하나님 나라는 지배자의 힘보다는 친밀감과 보호와 책임이 그 특색임을 보여줍니다. 사도 바울은 이 사실을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는니라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라고 설명합니다. 

   아버지 되신 하나님께서 자녀인 성도를 은혜로 통치하신다는 원칙은 교독교 신앙의 핵심입니다. 이 사실은 기쁨으로 번역되는 희랍어 “카라”에 대한 가장 일반적인 동족어가 은혜를 뜻하는 희랍어 “카리스”와 동일한 어근에서 파생되었다는 것에서 증명됩니다. 은혜와 기쁨, 이 두 개념 사이에는 매우 밀접한 연관성이 있습니다. “죄인들 중에서 가장 큰 우두머리”였던 바울이 하나님의 은혜로 완전한 변화를 경험한 후에 “그러므로 여러분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십시오”라는 말을 반복합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그리스도인은 축제 때에 접하게 되는 기쁨을 자신들의 삶에서 지속적으로 경험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 즉 그 나라 주권자의 통치 영향력이 끼치는 신앙인의 삶에 기쁨이 가득 차게 된다는 가르침은 예수님의 탄생이야기에 잘 나타납니다. 마태복음의 저자는 별에 이끌려 아기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곳에 다다른 동방박사들의 마음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들이 별을 보고 매우 기뻐하고 기뻐하더라.” 원문대로 번역하면 “그들은 과도한 큰 기쁨으로 기뻐했다”입니다. 아기 예수를 만난 동방박사들의 내면에 일어난 반응은 이루말할 수 없는 기쁨이었습니다. 들판에서 양을 치던 목자들에게 예수님의 탄생 소식을 전했던 천사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하나님 나라의 통치자인 예수님은 기쁨입니다. 이 기쁨은 어거스틴이 회심할 때 체험하여 자신의 삶 전체를 통해서 만났던 즐거움입니다. 

   이 기쁨의 근원은 자기 자신이라는 사실을 예수님께서는 친히 말씀하십니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예수님은 이 기쁨을 우리에게 주시겠다고 거듭 말씀하십니다. “지금 내가 아버지께로 가오니 내가 세상에서 이 말을 하옵는  것은 그들로 내 기쁨을 그들 안에 충만히 가지게 하려  함이니이다.” 마틴 루터는 이 기쁨을 설명하면서 그리스도인이란 밤낮으로 기뻐하는 사람, 어떤 상황에서도 기뻐하는 사람, 마음이 기쁨으로 가득하여 용감하고 담대하게 기뻐하는 백성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리고 이 기쁨과 반대되는 기쁨을 “배의 기쁨 [배가 불러서 느끼게 되는 기쁨]” 이렇게 설명합니다. 

   “누군가 부자이고 귀족 출신이기 때문에 기뻐한다면, 이것은 그리 오래 지속되지 않습니다. 욕심쟁이는 참으로 기뻐하는 마음을 갖지 못합니다. 맘몬은 진실로 기쁨을 표현할 수 없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돈을 셀 때에는 기분이 좋고, 먹고 춤출 때에도 즐거워하지만, 그들의 마음은 기쁨을 느끼지 못합니다.”  

   기쁨의 근원인 예수님으로부터 나오는 기쁨은 우리의 상황에 따라 요동치거나 변경되지 않습니다. 그 기쁨은 마르지 않는 샘에서 흐르는 생수처럼 날마다 맛볼 수 있습니다.    

   이 기쁨은 밭에 감추인 보화로 비유됩니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 예수님께서 주시는 기쁨은 우리가 이 땅에서 얻는 무엇보다 더 귀중하고 가치 있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이 기쁨은 자주 씨뿌리는 비유로 설명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으니,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예수님께서 주시는 기쁨을 수확의 때 농부가 얻는 기쁨과 비교한 것입니다. 일상에서 이 기쁨을 누렸던 다윗은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그들의 곡식과 새 포도주가  풍성할 때보다 더하니이다”라고 표현합니다. 

   바울은 이 기쁨을 성령의 열매 중의 하나로 설명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기쁨은 환경에 지배를 받지 않습니다. 바울은 “내가 우리의 모든 환난 가운데서도 위로가 가득하고 기쁨이 넘치는도다”고 자신의 경험을 소개합니다. 이 기쁨은 현재 성령이 하나님의 나라 백성을 통치하시는 영향력의 증거입니다. 그리스도의 다스리심을 잘 알고 있는 바울은 성도들에게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고 당부합니다. 이 말씀은 주님께서 나에게 기쁨을 주셨던 것처럼, 너희를 다스리시는 주님이 너희를 행복하게 만드시는 분이 되게 하라는 의미입니다. 버틀러가 찬양 시로 드러낸 것처럼 높은 산이나 거친 들이나 초막이나 궁궐이나 주 예수와 동행하면 그 어디나 하늘나라입니다.

이남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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