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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태,” 죽음에 이르는 죄 (4)

“나태,” 죽음에 이르는 죄 (4)

존 번연의 『천로역정』에서 제일 드라마틱한 이야기 중의 하나는 주인공 크리스천이 십자가의 은혜를 체험하는 부분입니다. 그가 오르막 길에 있는 십자가 가까이 갔을 때 자신이 지고 다녔던 무거운 짐이 풀리면서 밑으로 굴러갑니다. 짐이 굴러굴러 입벌린 무덤 속에 들어 갈 때 그의 마음에 기쁨과 쾌할한 심령이 일어납니다. 얼마나 기뻤는지, 그는 세번이나 껑충 껑충 껑충 뛰면서 노래를 계속 불렀습니다! “나를 묶었던 사슬이 풀린 이곳이여! 축복의 십자가여! 축복의 무덤이여! 더 축복이신 나를 대신하여 수치를 짊어지신 분이시여!” 크리스천은 언덕 밑으로 내려 오면서도 노래를 계속했습니다. 그때 길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발꿈치에 족쇄를 달고 잠들어 있는 세 남자를 봅니다. 그들의 이름은 미련쟁이, 게으름쟁이, 거드름쟁이입니다. 그는 누워 있는 그들을 깨우기 위해 다가가서 소리를 지릅니다. “당신들은 돛대 꼭대에서 잠을 자고있는 자들과 같습니다. 끝 없는 깊은 심연인 죽음의 바다가 당신들 아래에 펼쳐져 있습니다. 어서 깨어서 나와 함께 이곳을 떠나요. 원하시면 당신들의 발목을 묶고 있는 이 쇠고랑을 풀도록 기꺼이 도와주겠소.” 그는 또한 이런 말도 합니다. “이렇게 잠만자다가는 우는 사자같은 자가 다가 오면 반드시 그의 이빨의 먹이가 되고 맙니다.” 그러자, 이 셋은 크리스천을 올려다 보면서  각기 대답합니다. 먼저 미련쟁이가 “저는 위험한 것을 전혀 느끼지 못해요”라고 말했고, 게으름쟁이는 “지금은 잠을 좀 더 잡시다”라고 거절했으며, 거드름쟁이는 “나는 당신의 도움 없이 내 뜻에 따라 살아요”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들은 다시 곧 잠에 떨어집니다. 크리스천은 아쉬워 하며 자신의 길을 떠납니다.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고 위험에 처한 자신들을 깨워서 쇠고랑을 벗도록 도와주겠다고 제안한 자신의 친절을 보잘것 없이 평가한 것을 생각할 때, 그는 마음이 괴로웠습니다.

위에 언급된 잠을 자는 사람들의 태도를 고대 히랍 사회에서는 “오크네로스”라 불렀습니다. 이 낱말은 사람이 마땅히 해야 하는 일이나 책임에 관해서 “게으른,” “망설이는,” 혹은 “무관심한” 사람을 수식할 때 사용되었습니다. 개인이 처한 환경이나 여러 이유로 인해서 행동할 의지를 보이지 않는 사람을 “오크네로스”라 했습니다. 히랍어 학자 윌리엄 제임스는 “나태”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인간성의 한 부분이 실명되거나 혹은 인식의 능력이 결손되어 자신이 게으르고 냉담한 현실을 깨닫지 못하는 상태다. 그 결과 나태한 사람들은 어떤 일에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고 손을 놓고 행하려 하지 않는 태도를 갖는다.” 세이어즈는 나태에 대하여 이렇게 정의합니다. “아무 것도 관심 갖지 않고, 알려고 노력하지 않고, 관여하지 않고, 즐기지 않고, 사랑하지 않고, 미워하지 않고, 해야할 그 무엇도 없고, 또 죽어야할 이유도 없기 때문에 그저 살아 있는 죄다.”

죽음에 이르는 대부분의 죄는 하면 안되는 행위를 하는 것에 반해, 나태는 해야 할 행동을 하지 않기 때문에 성립되는 죄입니다. 인간의 상식으로 적극적 행위가 밖으로 나타나 보이지 않기 때문에 나태를 죄로 취급하는 것에 의문을 제기할 수 있습니다. 놀랍게도 성경에 나태는 능동적으로 사용됩니다. 일하지 않고 행하지 않는 것을 의지적으로 결정한 상태가 나태의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게으른 자여, 네가 언제까지 누워 뒹굴겠느냐? 네가 언제쯤 잠에서 깨겠느냐? ‘좀더 자자, 조금만 더 눈을 붙이자. 일손을 멈추고 조금만 더 쉬자’ 하면.” 이 곳에서 게으름은 의지의 결정입니다. 창조 질서에서 아름다운 자연을 보전하기 위해 인간이 마땅히 해야 하는 역할을 의지가 반대로 반응하는 태도가 게으름입니다. 리베가 영은 나태를 하나님의 요구에 거부하는 인간 의지의 태도로 설명합니다.

단란트 비유에서, 한 달란트를 받고 그것을 땅 속에 숨겨 둔 종의 태도는 나태한 상태를 잘 드러내 줍니다. 주인은 계산 할 때, 그 종을 향하여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며 그를 책망합니다. 이 종의 활동이 악했고, 게으름이 그 결과로 나타났습니다. 그의 내면의 악한 활동은 주인이 이득을 원치 않는다고 생각하게 하여 자신의 행동을 게으르게 나타나도록 선동한 것입니다. 샤먼은 이 종이 히틀러 시대에 독일에 거주했다면, 그의 의지가 유대인을 살상하는 쪽으로 반응하여 생명을 살려야 하는 인간의 사명에 게을렀을 것으로 해석합니다. 그의 의무 태만은 사악한 범죄에 대담했을 것이다고 덧붙입니다. 성경은 신자의 게으른 자와 관계를 이렇게 가르칩니다.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명하노니 게으르게 행하고 우리에게서 받은 전통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모든 형제에게서 떠나라.” 게으른 자는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사람이 아니고, 하나님의 질서에 반항하여 능동적이며 적극적인 행동가들입니다. 신앙인들은 나태한 자들에게서 떠나야합니다.   

천로역정에는 결국 미련쟁이, 게으름쟁이, 그리고 거드름쟁이가 철사에 목매여 죽는 것으로 끝납니다. 존 번연은 이 세 사람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이 세 사람은 매우 질이 나쁜 자들이었어요. 이들은 자신들만 나태와 어리석음을 좋아했을 뿐만 아니라, 설득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나 다 설득하여 나태와 어리석음을 좋아 하는 자들로 만들었죠. 그리고 그들 자신들이 결국 행복해질 것이라고 생각하도록 가르쳤어요. 그 외에도 우리 주님이 가혹하게 일을 시키는 주인이라고 갖은 악평을 다 하고, 또 사람들의 주장만큼 천국이 좋은 곳이 아니라는 악평까지 했답니다. 또한 저들은 주님의 종들을 중상하고, 주님의 종들 중 가장 훌륭한 사람들에게 쓸데 없이 참견하기 좋아하여 문제 일으키기에 바쁜자들이라고 평가했죠. 게다가 저들은 주님의 자녀들이 받을 위로를 헛된 환상이라고 하질 않나, 그리고 순례자들의 수고를 무익한 일이라고 했답니다.”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사명을 게를리 하는 나태는 죄입니다. 잠언은 자기의 일을 게을리하는 자는 멸망하는자 (마귀)의 형제다고 말씀합니다. 자신의 의무를 불이행 하는 것은 죄에게 충성하는 것이며, 그 사람은 심판을 면치 못합니다. 오스 기니스는 “소명은 죽음에 이르는 죄인 나태함에 대한 최고의 해독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사모하는 우리에게 바울은 이렇게 씁니다.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이남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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