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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아!그런뜻이었구나] 두려움 (2), 악한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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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움 (2), 악한면

고전 희랍어 “포보스”는 넓게 세 의미를 갖습니다. 첫째는 “공포”입니다. 호메로우스는 트로이 전쟁에서 대패한 그리스 진영의 상태를 설명할 때 이 낱말을 사용합니다. “그리스인들은 피로 얼룩진 참패로 무서운 공포에 사로잡혀 견딜 수 없는 슬픔에 빠졌고 왕자들은 모두 깊은 절망에 잠겨 있었다. 마치 트라키아에서 부는 두 바람인 북풍과 서풍이 갑자기 치솟아 올라 분노를 일으키는 파도가 바다를 휘젓는 것처럼, 그리스인들의 마음 속은 그렇게 찢어졌다.” 이 문장에 사용된 “공포”는 고대 희랍어 포보스입니다. 호메로스는 소름끼치는 두려움을 동반하는 “공포에 떠는 마음의 상태”를 표현하기 위해 이 낱말을 사용합니다.

   두번째는 절대 권력으로 통치하는 황제나 신에 대한 “경외심” 혹은 “숭배”를 의미합니다. 원시 시대부터 신은 인간 사회에 실제적이고 강력한 통치자였습니다. 기괴한 형상과 흉칙한 생물로 묘사된 원시 신들은 형상 자체로부터 두려움을 일으키며 사악한 자에게는 공포의 대상이었고 전쟁에 승리하여 백성을 보호하는 숭배의 대상이었습니다. 미물과 같은 인간이 범접할 수 없는 우월한 존재 앞에서 경험하는 감정입니다.     

   세번째로 가장 일반적이고 넓은 의미에서 “두려움”을 의미합니다. 포보스는 개인의 성결한 삶의 원천으로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은 필연적으로 삶에 방부 효과를 발휘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고 말씀합니다. 이 두려움은 신자가 하나님의 구원 활동에 전적으로 의존하게 하여 이웃을 받아드려 구원 사역을 성취하는 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에게 “두려워 하는 자가 되라”고 권합니다. 그렇지만 이 두려움은 사방에서 위협을 받는 무력한 사람의 불안을 낳지 않습니다. 오히려 확신과 희망의 태도를 갖게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희망이 있기 때문에 아주 담대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포보스 정신은 신자가 자신의 신앙을 삶으로 표현하는 동기입니다. 

   이와 대조적으로 포보스가 개인의 삶과 신앙에 해가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제 포보스의 다른 면, 즉 포보스가 지닌 악한 면을 살표 봅니다. 첫째, 포보스는 불경건한 두려움입니다. 두려움 그 자체로는 나쁘지 않지만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하게 하는 포보스는 악한 것입니다. 한 달란트를 받았던 종이 주인에게 와서 말합니다. “주인님, 저는 주인님이 심지 않는데서 거두고, 씨 뿌리지 않는 데서 거두는 완고한 분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두려운 마음으로 밖에 나가 돈을 땅에 숨겼습니다. 이제 주인님이 제게 주신 돈을 받으십시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그의 마음이 그 사람을 게으르게 만들었습니다. 그 두려움이 옳고 경건한 것이었다면, 이 사람이 달란트를 땅에 묻어 두었을까요? 이두려움은 사악한 두려움입니다. 주인은 그에게 “이 악하고 게으른 종아!”라고 칭하고 꾸짖습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읽을 뿐만 아니라 다른 믿음의 사람들처럼 신앙 생활을 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은 불경건한 두려움으로 인해 하나님과 함께하는 강력한 은혜를 막고 있습니다. 

   둘째, 포보스는 마음을 약하게 하는 두려움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들의 죄에 심판하실 것에 대한 두려움을 깨닫고도 자신들의 마음을 바꿔서 하나님께 복종하지 않는 마음의 태도입니다. 약속의 땅을 향해 여행하는 동안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 종종 이러한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곳에서 자신들을 멸망시키실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비록 그들은 심판에 관해 두려움이 있었지만 그 두려움으로 인해서 기꺼이 하나님께 복종하는 것을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두려움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을 대적하여 도망쳤습니다. 결국 이 두려움은 그들이 하나님을 불명예스럽게 하고 하나님 앞에 죄를 범하게 하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 하지만 마음을 바꾸지 않는 태도는 결국 하나님을 대항하는 것이 됩니다.
  셋째, 포보스는 악인의 마음입니다. 악인의 특징적인 감정인 포보스가 있습니다. 바울은 그 사실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다스리는 자들은 선한 일에 대하여 두려움이 되지 않고 악한 일에 대하여 되나니 네가 권세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려느냐 선을 행하라 그리하면 그에게 칭찬을 받으리라 그는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 네게 선을 베푸는 자니라 그러나 네가 악을 행하거든 두려워하라 그가 공연히 칼을 가지지 아니하였으니 곧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하심을 따라 보응하는 자니라.”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권위 앞에 두려워 하지 않습니다. 포보스는 악행의 자식이다. 

   넷째, 포보스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죽음에 대한 우리의 두려움을 없애 주셨습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이 사실을 다음과 같이 알립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 사로잡혀 사는 사람들을 자유롭게 하기 위해 사람과 같은 모습으로 죽으셨습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인간에게 너무나 자연스럽게 뿌리박혀 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그리스도인은 죽음의 두려움에 사로잡힐 수 없습니다.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그것이라 그런즉 우리는 몸으로 있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노라.”
  다섯째, 포보스는 율법주의와 밀접하게 관계합니다. 종의 특징은 언제나 두려워하는 마음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율법주의는 그리스도인을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종으로 격하시키셔 포보스 감정을 갖게 만듭니다. 신앙인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법이 지배하는 종교는 두려움 외에 다른 어떤 것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이 사도 바울의 가르침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은혜가 지배하는 믿음을 갖고 있으며, 그 믿음에서 그리스도인은 율법의 종을 벗어나 사랑의 아들이 된 것입니다. 

   두려움의 나쁜 면을 치료하는 방법은 사랑입니다. 사도 요한은 우리의 모든 두려움을 치료하는 약은 하나님의 사랑임을 강조합니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하나님은 사랑입니다! 이남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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