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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아!그런뜻이었구나] 완악함 (1), “돌의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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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by John-Mark Smith on Pexels.com

완악함 (1), “돌의 마음”

『돌의 역사 History of Stone』의 저자 테오프라스투스는 고대 그리스 석공들이 즐겨 사용했던 돌들을 소개합니다.  “포루스”라 부르는 대리석은 자신의 연구 결과 조각 작품을 위해 제일 가치 있는 돌이며, 이 돌의 특징은 밝고 윤기가 난다고 평가합니다. 그리스 사람들은 이 돌을 또한 “포리나”라고도 불렀는데 단점은 거칠고 쉽게 부서지는 성질을 가졌다고 묘사합니다.

그리스 고전 어휘 사전인 렉시콘도 이돌을 설명합니다. 

이 단어는 기본적으로 단단한 돌을 의미하는데,명사형은 “포로시스”고 동사형은 “포로오” 입니다. 희랍어 “오 w”의 발음이 영어 “우u”가 되기 때문에 포로오가 포루스로 표기된 것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동굴 천장에서 뚝뚝 떨어진 물과 같은 액체가 응고된 것 중 하나인 종유석을 지칭할 때 포로우라 했습니다. 이집트 나일강 지역에서 발견된 파피루스에서 이 단어는 건물의 기초를 다지는 데 사용되는 돌이었습니다. 의학적으로 이 단어는 특정 기술 용도로 사용됩니다.  포로시스는 관절 속에 쌓여서 활동을 마비시키는 백악석을 의미합니다. 이는 또한 방광의 결석을 지칭했습니다. 동사 포로오는 골절된 뼈가 결합할 때 부러진 부위의 접합부에서 굳은 살이 형성되는 과정을 의미합니다.

   “단단하게 하다” 혹은 “완강하게 하다”는 기본 의미를 지닌 이 두 단어는 생리학이나 의학 그리고 교육학과 심리학에서도 그 분야의 용도에 맞게 사용됩니다. 아테나이오스의 작품에는 이 단어가 사람의 감각을 묘사할 때 사용됩니다. 고대 도시 헤라클라의 독제자 디오니시우스는 과식으로 인해 과체중이 되었습니다. 그의 외과 의사는 혼수상태에 빠진 그를 긴 바늘로 찔러 깨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놀랍게도 그의 살은 지방이 두꺼워 감각을 잃었기 때문에 어떤 부분을 찔러도 감각이 반응하지 않았습니다. 감각이 반응하지 않는 표현을 위해 포로오가 사용되었습니다. 이 단어는 감정의 모든 힘을 상실한 것과 연결되었슴을 알 수 있습니다. 

   유대인의 구약 성경인 70인 역 (LXX)에는 이 단어가 “맹인” 또는 “볼 수 없음”이라는 개념과 연결되어 사용됩니다. 욥은 자신의 고통스런 마음의 상태를 이렇게 표현합니다. “내 눈은 근심 때문에 어두워지고 나의 온 지체는 그림자 같구나.” 그의 고통스런 마음은 앞을 볼 수 없이 어두워졌습니다.
  이 두 단어가 사용되는 모든 경우에 기본 의미는 감각의 상실과 뚫기에 매우 힘든 단단함, 즉 뼈나 심지어 대리석과 같은 딱딱하고 완강함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이 단어들의 근본 개념은 단단함, 맹인, 이해 결핍, 그리고 감정 결함으로 요약됩니다. 이같은 배경을 간직한 이 단어들이 신약성경에서 사용될 때는 “인간 마음의 완악함”을 표현합니다. 이 낱말들은 가르침을 주기 위해 고안된 사건이 발생했지만 그 교훈이 무엇인지를 깨닫지 못하는 마음의 상태를 묘사할 때 사용됩니다. 

   예수님께서 물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실 때 그들은 유령인 줄로 알고 두려워 소리질렀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내니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고 말씀하시며 배 위로 오르시니 바람이 그칩니다. 이때 제자들의 마음이 심히 놀랬는데, 마가복음은 그 이유를 이렇게 기록합니다. “이는 그들이 그 떡 떼시던 일을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그 마음이 둔하여졌음이러라.”  마가복음에서 이 에피소드는 예수님께서 오병이어로 오천명을 먹이신 사건 다음에 나옵니다. 제자들은 기적을 행하시는 자신들의 스승이신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아직 몰랐던 것입니다. 

   마가복음은 이 사건 후에 귀신들린 어린 딸을 둔 한 여인의 이야기를 기록합니다. 그녀는 예수님을 찾아와 그 발 아래 엎드려 자기 딸에게서 귀신을 쫓아 달라고 간구합니다.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녀가 집에 왔는데, 아기에게서 귀신이 나갔습니다. 곧 예수님은 귀 먹고 말 더듬는 자의 양 귀에 손가락을 넣고 침을 뱉어 그의 혀에 손을 대시며 “에바다”라고 외칩니다. 그러자 그의 귀가 열리고 혀가 맺힌 것이 곧 풀려 말이 분명해 집니다. 그리고 곧 사천명을 먹이는 사건이 이어집니다.  

   광야에서 사흘이나 먹지 못한 무리를 보시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저들에게 음식을 주라”고 말씀합니다. 제자들은 “이 광야에서 어디서 떡을 얻어 이 사람들로 배부르게 할 수 있습니까?”라고 부정적으로 반응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소지한 빵 일곱 개와 또 생선 두어 마리를 가져 오게 하셔서 약 사천 명을 먹이십니다. 다음 행선지를 위해 배에 올라 탔을 때, 제자들은 떡 가져 오는 것을 잊었다며 서로 수근 거리며 걱정합니다. 이 때 예수님께서 그들을 향하여 “떡이 없음으로 수군거리느냐 아직도 알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둔하냐 너희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또 기억하지 못하느냐.”    

   이곳 사용된 “마음이 둔하다”는 포로오는 교훈을 배우지 않는 맹목적인 무감각을 묘사하는 단어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사물은 인간의 마음에 어떤 감명이나 영감도 주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고대 그리스 사상가들은 사물은 그 자체로 인간의 마음에 영감을 불러 일으킨다고 믿었습니다. 입술의 언어와 눈에 보이는 광경과 두뇌의 생각은 마치 녹아지는 밀랍 같이 부드러운 우리 마음의 실체에 영향을 주어 감명을 일으키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지만, 마음이 굳어지면 사물을 통해서 어떤 인상이나 감명도 얻을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마음의 둔함을 표현하는 포로시스는 자신만의 작은 세계에 깊게 갇혀서 다른 세상의 어떤 것도 그를 건드릴 수 없는 사람, 자신의 생각 외에는 모든 생각에 마음이 닫혀 있는 사람, 사건이 가르치기 위해 의도하는 교훈에 둔감한 사람을 묘사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주의를 줍니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이남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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