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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단상] 신앙인이 된다는 것은(마태복음 10장 34-39절)_키치너워터루 드림교회 고창석 목사

신앙인이 된다는 것은 마태복음 10장 34-39절

키치너워터루 드림교회 고창석 목사

34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35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36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37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38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39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요3 1:2). 세상을 떠난 여의도순복음교회 조용기 목사는 이 말씀을 근거로 삼박자 구원, 혹은 삼중축복을 선포했습니다. 결과는 대 히트였습니다. 한국에서 삼박자 구원이 얼마나 많이 퍼졌냐 하면, 여의도순복음교회를 여의도장로교회라고 할 정도로 삼박자 구원은 많은 사람에게 주목받았습니다. 삼박자 구원이란 우선 예수 믿으면 구원받고, 구원받으면 육체적으로도 건강하고, 물질적으로도 축복 받는다는 내용입니다. 순복음에서는 영혼과 육을 이원론적으로 분리할 수 없기에 영혼 구원을 받게 되면, 물질 축복도 받게 되고, 그리고 건강의 복도 받을 수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이라고 말합니다.

삼박자 구원이 나오게 된 배경에는 조용기 목사의 처음 목회하던 당시 상황과 관련하고 있습니다. 서울 은평구 대조동에서 여의도순복음교회가 시작할 당시는, 교회만 아니라, 대한민국에서 먹고사는 일 자체가 힘들었습니다. 절대 절망의 상황이었습니다. 그런 처지에 있는 사람에게 하나의 소망으로 삼박자 구원을 이야기한 것은 어느 정도 이해됩니다. 절망에 처한 사람에게 소망의 메시지를 주어야 합니다. 문제는 이 소망의 메시지가 기복신앙으로 변질되었다는 점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이 세상 모든 사람의 관심은 복에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 시대를 보면 우리가 보기에 어떤 사람은 이미 충분한 부를 누리는 것 같지만, 그 사람은 그 부에 만족하지 못합니다. 10억을 벌면, 20억을 벌려 하고, 20억을 벌면 그 이상을 벌려고 합니다. 이것이 사람입니다. 삼박자 구원은 바로 이런 사람의 욕심에 불을 붙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믿음이 있으면 초막이나 궁궐이나 그 어디에 살아도 좋습니다. 꼭 궁궐에 살아야 복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지금 한국교회의 문제점은 바로 이 점이 아닌가 합니다. 교회의 관심이 나라를 새롭게 한다든지, 세상을 변혁시킨다든지 하는 역사적이거나 사회적인 관심으로 가지 못하고, 개인의 병을 고치고 부자가 되는 개인 신앙으로 낙후된 원인이 이런 기복신앙에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런 기복신앙이 겉으로는 한국교회를 수적으로 성장시켰지만, 신학적으로나 신앙적 질을 약화시켰습니다. 아무리 먹고 살기 힘들다 하여도 진실한 것으로 소망을 가르쳐야 합니다. 예수께서, 충분히 가능하셨지만, 오병이어의 기적을 날마다 베풀지 않으셨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병 나으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보다 오히려 하늘나라의 삶이 무엇인지 가르치셨고, 십자가 지는 삶을 몸소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돈에 소망이 있다는 신앙은 있을 수 없습니다. 예수 믿으면 건강해진다, 이런 메시지는 정직한 것이 아닙니다. 단지 사람을 속이는 일입니다.

그러면 제대로 된 메시지, 올바른 메시지는 어떤 것입니까? 단적으로 말하면, 그 메시지가 우리를 흔들어야 합니다. 죄로 가득 찬 세상을 사는 신앙인에게 천국의 복음은 번영과 평화를 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검으로, 때로는 불화로 다가와야 합니다. 오늘 말씀이 바로 그렇습니다. “34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35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36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오늘 본문과 같은 내용이 누가복음 12장에도 등장하고, 또 외경 중에 도마복음이라고 있는데, 도마복음 예수의 어록 16번째를 보면 이런 말이 있습니다. “예수가 말했다. 아마도 사람들은 내가 세상에 평화를 가져올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내가 이 땅에 분열, 즉 불, 칼, 그리고 전쟁을 가져왔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집에 다섯이 있고 셋이 둘에 대항할 것이고 둘이 셋에 대항할 것이다. 아버지가 아들에, 아들이 아버지에 대항할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하나로 설 것이다.” 오늘 말씀에서는 검과 불화가 등장하지만, 도마복음에는 불과 전쟁까지 등장합니다. 기복신앙이 믿는 이에게 번영과 건강을 약속한다고 하지만,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불, 칼 그리고 전쟁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신앙이 기복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에게 전쟁 같은 엄청난 에너지가 덮쳐 우리를 완전히 흔들어 변화시켜야 합니다. 그래서 이전에는 십자가를 회피하던 신앙인이 예수처럼 십자가를 지는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전쟁을 말하기 전에 예수께서 말씀하신 평화가 무엇인지 살펴보겠습니다. ‘평화’는 히브리어로 ‘샬롬’, 그리스어로는 ‘에이레네’입니다. 샬롬이란 말은 단순한 평화가 아닙니다. 샬롬은 하나님이나 이웃과의 관계에서 모든 계약 조건을 다 이행했을 때 주어지는 완전한 관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죄지었을 때는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를 맺지 못한 상태가 되기에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샬롬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죄의 채무를 지불하시고, 그를 믿는 자마다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게 되면,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가 회복되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샬롬이 있게 되고, 인간은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누릴 수 있는 샬롬입니다.

물론 이렇게 신학적으로 말하는 평화도 있지만, 오늘 말씀에서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평화는 조금 다릅니다. 오늘 말씀에 나오는 평화는 본문의 맥락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사람이 부를 축적하고, 건강하고, 여유롭게 사는 삶을 평화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한 발 더 나가 정신적으로 보면, 이전에 알고 있던 생각을 그대로 유지하는 수동적인 상태를 의미합니다. 예수 믿게 된 사람이 있는데, 과거의 삶과 생각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면, 곤란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성장하게 되어 있습니다. 몸만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과 인격이 모두 성장해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창조 섭리입니다. 또한 말씀은 우리를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배웠음에도,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음에도 인격이 변하지 못하고, 사람이 과거와 하나도 달라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진정한 신앙인의 모습이 아닙니다. 작년에 나를 보았을 때, 지금의 내가 “어머나, 내가 저랬었구나!” 할 수 있을 정도로 지혜와 인격과 말씀이 자라야 합니다.

하지만 사람은 변화를 두려워합니다. 그리고 생각조차 바꾸려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생각은 자기 경험에서 오기에 생각을 바꾼다는 것은 곧 자신이 지금까지 금과옥조처럼 여겼던 경험을 다 버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는 이 땅에 하늘나라 복음을 들고 오셨습니다. 그 하늘나라 복음은 인간이 받아들이기에 어려운 것입니다. 수치를 당해야 하고, 원수까지 사랑해야 하며, 심지어는 십자가를 지어야 합니다. 예수께서 오시기 전 세상은 원수를 원수로 갚고 수치를 당하지 않는 세상이며, 이런 삶의 방식을 지키고 유지하는 것이 곧 평화였습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에서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불화에 있다고 말씀합니다. 불화는 인간이 기존에 알고 있었던 평화, 즉 이전에 알고 있던 세계를 해체하는 것입니다. 이전에 알고 있던 생각을 해체하여 각자 하나님이 원하시는 인간으로 변화하고 성장하는 과정입니다.

복음서와 도마복음을 보면 불화가 세 가지를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칼, 불, 그리고 전쟁입니다. 먼저 칼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우리는 칼을 무엇인가를 끊는 용도로 사용합니다. 즉 과거의 나와 단절을 의미합니다. 단절이란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기 위해서 반드시 거쳐야 하는 통과 의례입니다. 어머니 배 속에 있는 태아는, 온전한 아이로 태어나기 위해서, 자양분을 얻던 그 탯줄을 끊어야만 세상에 나올 수 있습니다. 그 탯줄을 끊기 위한 도구가 바로 칼입니다. 신체적으로도 온전한 인간이 되기 위해 칼이 필요한데, 세상에 태어나면 더 큰 칼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바로 결단입니다. 사람이 성인이 되면 가정을 이루고, 부모를 떠나야 합니다. 편하고 익숙했던 공간에서 떠나야 합니다. 내가 속해 있는 시간과 장소와 결별하여 생명의 근원인 하나님과 온전한 하나가 되기 위해 내 환경과의 과감한 결단이 필요합니다. 이 두 번째 탯줄로 끊어야 하는 결단이 바로 칼입니다. 창세기 12장에서 아브라함은 새로운 인간으로 태어나기 위해서 고향, 친척, 그리고 아버지를 떠나야 했습니다. 결별해야 했습니다. 그래야 인간은 이제 온전한 자신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불입니다. 불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불은 자기 자신, 과거의 자신을 완전히 불사르는 헌신을 의미합니다. 즉, 번제와 같습니다. ‘번제’는 히브리어로 ‘올라’입니다. 올라는 정신적으로는 과거의 자신을 완전히 없애고, 새로운 사람으로 태어나기 위한 노력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다른 의미로는 자신을 극한의 상황으로 몰아넣어 도저히 넘어설 수 없는 단계를 극복하여 새로운 신앙의 경지에 올라서는 것을 의미합니다.

밴쿠버에 숭실교회가 있습니다. 숭실교회를 개척하신 분은 변상호 목사입니다. 이분은 외항선원을 선교하기 위해 파송 받은 선교사였는데, 2008년에 숭실교회를 개척하였습니다. 지금 그 교회는 100여 명이 넘게 모이고 있고, 젊은 사람도 많습니다. 2019년에 변상호 목사의 외손자 돌잔치가 교회 주일에 있었습니다. 목사님이 인사말을 하시는데, 갑자기 담임목사직을 사임하겠다는 발표를 하신 후에 기도만 하고 식사도 하지 않고 집으로 가버리셨습니다. 딸과 사위만 아니라 교인 전체가 어안이 벙벙했습니다. 기쁜 날이 갑자기 황당한 날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후임 목사는 교회에 맡기고 한국에 들어가 교회 없는 섬을 돌아다니다 전남 보길도에 교회를 설립하셨습니다. 교회를 설립하는 과정이 만만치 않았습니다. 교회가 없던 마을에 교회가 들어서려니 사람들이 저항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지역에 살며 주민들과 교류를 이어오다 사람들의 신임을 얻어 교회를 설립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례비를 받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자기 자신을 벼랑 끝으로 밀어보자는 심정이었다고 합니다. 이런 모습이 진정한 번제입니다. 자신을 극한 상황으로 몰아넣어 도저히 넘어설 수 없는 단계를 극복하여 새로운 신앙의 경지에 올라서는 것입니다. 신앙인이 자기 자신을 완전히 불살라 하나님께 헌신하는 것은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새롭게 태어나기 위한 영웅적인 행위입니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보수적입니다. 가능하면 지금 상태를 유지하려 하고, 새로운 도전을 꺼립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불을 주러 이 땅에 오셨습니다. 여호수아 14장에 보면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라고 외치는 85세의 갈렙이 나옵니다. 출애굽 1세대 중에서 갈렙과 여호수아만이 가나안에 들어갔는데, 그렇다면 갈렙은 이스라엘 중에서 가장 나이 많은 사람입니다. 가장 나이 많은 갈렙이 그렇게 외친 이유가 있습니다. 이때 어느 정도 가나안 땅 분배가 끝난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가나안 정복은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어느 정도 자기 땅이 생기자, 가나안 정복에는 관심이 없고, 땅을 어떻게 하면 더 분배받을지에 관심이 갔습니다. 이때 노익장 갈렙이 가나안에서 가장 험한 땅, 헤브론을 정복할 터이니 그러면 그 땅을 달라고 외친 것입니다. 아무도 나서지 않을 때 나라도 해야겠다면서 자신의 극한의 상황으로 몰아넣은 것입니다. 우리에게 때로 이런 노력이 필요합니다. 나의 모든 것을 불태우는 마음으로 자신을 극한 상황에 몰아넣어 그 단계를 극복할 때 사람은 변화하고, 성장할 수 있습니다.

이 일련의 불과 칼로 대변되는 세 번째가 전쟁입니다. 전쟁은 외부와의 전쟁이 아니라 오래된 자신과의 싸움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에서 영적 전쟁이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그리고 그 영적 전쟁은 곧 마귀와의 싸움을 의미합니다. 영적 전쟁을 단순히 마귀와의 싸움으로만 보면 안 됩니다. 마귀와의 싸움도 중요하지만, 나 자신과의 싸움이 더 중요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 마음이 전쟁터가 되어야 합니다. 이전의 나, 현재의 삶을 유지하려는 나와 싸움을 통해서 새로운 나로 거듭나야 합니다. 사도행전 2장을 보면, 성령이 강림할 때 나타나는 현상이 있습니다.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고, 불의 혀 같은 것이 각 사람 위에 임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그 성령 충만 현상을 보고 소동했다고 전합니다. 강한 바람, 불, 사람들의 소동은 모두 전쟁을 암시하는 단어들입니다. 즉 성령이 임할 때 이런 현상이 나타났다는 것은 곧 전쟁과 같은 큰 충격이 임했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성령 충만을 받은 제자들은 달라졌습니다. 이전에는 유대 당국자들의 눈을 피하기에 급급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예루살렘 거리에 나서 용감히 하나님의 복음, 예수가 구원자이며 그리스도라는 것을 담대히 전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내적 전쟁을 겪고 변화된 사람의 모습입니다.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는 전쟁과 같은 현상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성령이 그들 안에 임했을 때 단지 뜨거움을 주거나 몽환적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들에게 자기 모습을 보게 하고, 과거의 나, 두려움에 떨고 있던 제자들의 과거 모습과 싸우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할지 알게 하셨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성령은 바로 생각나고 깨닫게 하는 영이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4장 26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을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그렇습니다. 성령이 오면 내가 누구인지 가르치십니다. 내가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객관적으로 보게 하십니다. 그리고 과거의 나와 내적 전쟁을 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성령 충만을 진정으로 받은 사람이라면, 변해야 합니다.

이 세상 사람에게 가장 큰 트라우마를 주는 것이 전쟁입니다. 과거 미국에서는 베트남전에 참여했던 군인들의 트라우마가 문제였고, 걸프전에 참전했던 군인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아는 미군이 한 명 있는데, 이 사람은 장교로 저격수가 저격하기 전에 최종적으로 확인 명령을 내리는 직책에 있었습니다. 이 사람도 정기적으로 심리상담과 치료를 받는다고 합니다. 전쟁에 직접 참여하지 않았는데도 이런데, 전쟁에 참여하여 내 동료가 죽고, 수많은 시체를 경험했으며 내 손으로 죽인 사람을 볼 때 그 인간은 온전할 수 없습니다. 영적 전쟁은 우리에게 전쟁을 경험한 미군처럼 부정적인 충격이 아닌 긍정적인 충격을 선사합니다. 전쟁과 같은 큰 충격을 통해 내가 누구인지 알게 합니다. 마치 욥이 큰 고난 속에서 새롭게 하나님을 만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성령 받는 것을 다른 말로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이 있었다고 말합니다. 인격적으로 만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 사람을 만났더니 내 사고 방식이 달라지고, 말이 달라지고 즉 내 삶의 변화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근묵자흑近墨者黑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먹을 가까이하는 사람과 가까이하면 내 손이 검어지는 법입니다. 내가 욕을 많이 하는 사람을 만나고 있다면, 처음에는 그 사람의 욕이 듣기 싫었지만, 나중에는 익숙해져서 별로 개의치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람을 만나 희생적이고 헌신적인 삶을 보면 나도 모르게 그를 닮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험지에서 선교하시는 분들을 보면 나도 모르게 돕고 싶다는 것이 결국 인격적으로 만난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20년 했다, 30년 했다, 세계에서 제일 큰 교회에 다닌다는 것이 자랑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정말로 그 사람이 변화되었는지 그것이 중요합니다. 사람이 덩치는 점점 커지는데, 생각하는 수준이 계속 초등학생 수준에 머물러 있다면 그것은 문제입니다. 10년을 넘게 교회 다녔는데 변화가 없다, 그것은 그 사람이 하나님과 인격적인 만남이 없었다는 증거이며, 하나님의 말씀을 전적으로 믿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신자는 자신이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어떻게 증명할 수 있습니까? 그 삶으로 증명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 삶은 변화되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보았을 때 더 이상 옛날의 그 사람이 아니라는 소리가 있어야 합니다.

오늘 말씀 38-39절에서 말씀합니다. “38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39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십자가를 지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지만 진정으로 예수를 인격적으로 만났다면, 그 사람은 예수를 닮게 되어 있습니다. 이 말은 우리와 예수가 하나가 된다는 말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큰 변화가 있다면, 이런 변화가 아닐까요? 죄인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거듭난 것, 예수처럼 살아가는 것 그것이 가장 큰 변화입니다.

신앙인이 된다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신앙 안에서 성장하는 것입니다. 그 성장이 저절로 오지 않습니다. 과거의 나와 온전히 결별해야 합니다. 그래서 신앙인이 된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길은 우리가 가야 합니다. 예수께서 이미 가신 길이고, 거기에 구원이 있으며, 그런 삶이 진리입니다. 그런 삶을 사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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