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te icon The ChristianTimes

[설교단상]“선한 능력으로 사는 성도(사도행전 11장 24절-26절)_낙원장로교회 이진우 목사 

“선한 능력으로 사는 성도”(사도행전 11장 24절-26절)

낙원장로교회 이진우 목사 

사도행전은 교회의 역사에서 첫번째 페이지 같은 서신입니다. 최초의 교회가 예루살렘에서 탄생하고 세워지는 과정이 이 서신에 기록되어 있으며, 이후 로마제국 전역으로 복음이 전파되며 그 교회가 여러 지역에서 세워지는 과정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도행전 1장과 2장에는 최초의 교회인 예루살렘 교회가 세워지는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그 내용을 보면 예루살렘 교회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세워진 교회입니다. 예루살렘교회는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성령 하나님의 임재를 기다리며 기도하던 제자들에게 성령님이 임재하심으로 세워졌습니다. 제자들이 인간의 지혜를 모아 세운 교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루살렘교회는 하나님의 영, 예수님의 영이신 성령 하나님이 임재하심으로 세워진,  ‘성령 충만한 교회’ 였습니다. 

성령님의 임재를 통해 담대하게 된 제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의 복음을 전했으며 많은 사람들이 마음에 찔려서 회개하고 세례받아, 성령님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성령님의 은혜를 선물로 받은 성도들이 모여서 교회를 이룬 모습을 사도행전 2장에서는 이렇게 묘사합니다.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썼다. (행2:42)”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았다.(행2:46-47)”. 

이것이 ‘성령충만한 교회’의 모습이었습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빌2:5)” 라는 말씀처럼, 성령충만한 교회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은 교회였습니다. 이렇게 마음을 같이하며 예배하고 찬양하며, 자신의 것을 즐거운 마음으로 나누며, 주님안에서 사랑의 교제를 나누는 예루살렘 교회를 세상 사람들은 두려운 마음으로 존중했으며, 칭송했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고 성령으로 충만한 교회의 지체가 되어 교회를 이루는 성도 개개인의 모습과 삶의 자세는 어떠했을까요. 

오늘의 본문은 그 본보기가 되는 한 인물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바나바 입니다.

바나바는 지중해에 있는 섬인 구브로(사이프러스)에서 출생한 유대인 레위지파사람입니다. 그의 본래 이름은 요셉입니다. 바나바라는 이름은 사도들이 지어준 별명입니다. 그 이름의 뜻은 ‘위로자, 위로의 아들’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12제자 가운데 한 사람도 아니고, 초대 예루살렘교회 일곱 집사중에 한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누구보다도 열심히 예루살렘교회에서 복음을 위해 일하는 사람으로 인정받은 사람입니다. 예루살렘교회가 박해를 받아 유대인들이 흩어지면서, 이방인에게 복음이 전파돼 그 결과로 안디옥교회가 설립되었을때, 안디옥교회를 돕기위해 예루살렘교회에서 파송한 사람이 바로 바나바였습니다. 그는 예루살렘교회에서 대표로 뽑아서 다른 교회로 보낼정도로 인정받은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성경 본문말씀은 바나바에 대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행11:24)” . 바나바에 대해 성품이 착한 사람이고, 능력으로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고 간결하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의 성품과 능력을 나란히 소개하고 있습니다. 당시 초대교회 공동체안에서 사람을 평가할 때 그 사람의 성품을 그 사람의 신앙의 능력과 같은 무게로 동등하게 중요히 여겼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순서로는 성품이 능력보다 앞서있으니, 성품을 더 중요하게 보았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유감스럽게도 오늘날의 세상을 보면 성품보다는 능력을 우선으로 하고 있습니다. 능력도 성령과 믿음이 충만함 같은 신앙의 능력이 아니라,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것들을 능력의 기준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래서 재산, 학벌, 과학기술, 지식 등을 얼마나 많이 가지고 있으며, 얼마나 많이 사용할 수 있느냐에서 능력이 비교되고 있습니다. 또한 그 능력치를 높이기 위해 무한경쟁을 벌이고 있습니다.  그 성과의 끝을 우리는 알 수 없지만, 확실한 사실은 아무리 높은 성과를 계속 이룬다고 하더라도, 안심할 수 없으며 끝없는 경쟁으로 인해 오히려 불안함은 더 커진다는 것입니다.

과학기술분야를 예로 들면, 최근에는A.I.(Artificial Intelligence :인공지능)가 급격히 발전하고 있습니다. 단순히 데이타를 계산하는 수준을 넘어  소설, 논문, 보고서, 연설문까지 척척 작성하는 수준까지 이르렀습니다. 최근 주목받고 있는 ‘쳇 GPT ‘가 그러한 성과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앞으로 인공지능의 능력이 인간의 지능을 넘어설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놀라운 능력을 지닌 인공지능을 보유하게 될 인류의 미래에 대해서 걱정하는 시각이 많습니다. 인간의 감정과 감성과 윤리의식을 담지않은 인공지능은 자칫 인류를 파멸로 몰고 갈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걱정하는 배경은 이미 인간 사회가 능력본위의 사회가 되어서 인간의 감정과 감성과 윤리의식이 설 자리가 좁아져 버렸기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착한 사람’이라는 말도 예전에는 굉장한 칭찬이었는데, 요즘은 그 긍정적인 의미가 많이 약해졌습니다. 오히려 ‘그 사람은 착하다’하면 ‘그 사람은 그렇게 매사에 양보하고 온화한 자세로 착하게 살면 이렇게 험한 세상에서 늘 손해만 볼텐데 참 걱정된다.’는 뜻으로 들립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보다는 냉정하고, 계산적이고, 철저하게 자기중심적이어서 절대 손해보지 않을 것 같은 사람, 소위 ‘ 세상물정에 밝은 사람’이 인기가 있습니다. 

하지만, 착함, 선함이란 덕목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윤리적인 것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구원의 은총을 받고 ‘주예수 내마음에 들어와 계신후 변하여 새사람이 된뒤에’,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살아가는 성령충만한 그리스도인이된 뒤에,  나타나는 중요한 성품중 하나가 선함, 착함입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0장에서 스스로를 ‘선한 목자, 착한 목자’라고 하셨고, 마태복음 5장에서 자기를 따르는 제자들에게 산상수훈 설교를 하신 다음 제일 먼저 분부하신 말씀이 ‘세상 사람들 앞에 착한 행실을 나타내 보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즉, 선한 사람이 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 성령충만한 그리스도인은 착함을 삶에서 행하는 사람입니다.  성령충만한 사람인데 선하지 않다면, 뭔가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선함이 어떻게 삶에서 나타나는가는  성령충만하여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사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덕목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에서는, 바나바가 착하고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으로 성경에 기록될 정도로 선한 능력으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 었음을 보여주는 이유를 세가지로 나눠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모범은 바나나뿐만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나타나는 모습이기도 합니다. 

첫째, 착하고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은 상대를 위로하고 격려하는 사람입니다.

바나바라는 이름의 뜻은 ‘위로의 아들(son of encouragement), 위로자’입니다. 요셉이라는 그의 본래 이름이 있었지만, 사도들이 그의 이름을 이렇게 바나바라고 부른 것을 보면, 그가 얼마나 예루살렘교회에서 위로와 격려를 잘하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예루살렘교회에서 슬픔을 당한 사람의 마음을 어루만져주고, 낙심된 사람에게 용기를 주고, 섬김과 봉사를 잘하는 사람에게는 더 잘하도록 칭찬하는등 위로와 격려하는 말과 행실에서 가장 모범적이고 뛰어난 사람이었습니다.

바나바는 안디옥교회에 파송되어서도 위로와 격려로 교회에 힘을 주었습니다. 이방지역에서 처음 세워진 교회인 안디옥교회에 가서 그는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함께 복음을 받아들인 은혜로운 모습을 보고 기뻐했으며 “굳건한 마음으로 주와함께 머물러 있으라”고 격려했습니다. 설립된지 얼마안된 교회였으니, 지적할 점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비판보다는 격려와 위로에 힘썼습니다. 그 결과가 어떠했습니까.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더라(행11:24)”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나바의 격려에 따라서 주안에서 굳건하게 뭉쳐있으니, 더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게 된 것입니다.

‘위로의 아들’은 바나바라는 이름의 뜻이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안에 거하시는 성령님의 별명과도 연결됩니다. ‘위로자’ ‘위로의 영’은 성령님의 별명입니다. 우리가 마음이 상해서 주저앉아 있을때, 우리에게 다가와서 위로하고 격려하시며 손잡아서 일으켜주시는 분이 바로 성령님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으로서 위로와 격려를 하는 사람은 그 안에 계신 성령님을 잘 드러내는 성도들입니다.

이처럼 신앙생활에서 언행을 통한 격려와 위로는 큰 힘이 됩니다. 한국 전라남도에 증도라는 섬마을이 있습니다. 이 섬의 별명은 ‘천국의 섬’입니다. 섬주민 2000여명중에서 기독교인들이 90%를 넘는다고 합니다. 이 섬이 이렇게 복음화된 것은 문중경전도사님이라는 한 여자전도사님의 헌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문전도사님은 1950년 한국전쟁때 공산군의 총에 맞아 순교하기까지, 20년이 넘게 고무신이 닳도록 섬 곳곳을 다니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문전도사님의 묘비에는 그를 이렇게 추모합니다. ‘빈한 자의 위로되고, 병든 자의 의사, 아이 낳는 집의 산파, 문맹퇴치 미신타파의 선봉자되었으며,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설립했으며, 모든 것을 섬사람을 위하였다.’  ‘위로가 되었다’는 말이 맨먼저 나옵니다. 이 묘비를 세운 섬주민들을 문전도사님이 얼마나 열심히 신앙안에서 위로하고 격려해왔는지를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고 변화된 사람은 바나바처럼 격려와 위로가 넘쳐나는 사람이 됩니다. 교회나 가정과 직장에서 먼저 격려와 위로의 말을 던져보십시오. 반응이 달라지고, 관계도 달라질 것입니다. 내게서 비판과 지적의 말보다는 격려와 위로의 말이 넘쳐 흘러나와서 어디에서든지 긍정적인 변화를 일으키는 성도가 되기 바랍니다.

둘째, 착하고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은 한 사람의 영혼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입니다. 

오늘의 성경본문 25절, 26절에는 바나바가 다소라는 곳으로 찾아가 사울을 만나서 그를 안디옥으로 데리고 왔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사울은 나중에 바울로 이름을 바꾸고 이방인 선교를 위해 헌신했고 로마서, 고린도전서, 고린도후서, 갈라디아서등 신약성경 13권을 쓴 그 위대한 사도 바울입니다.

사울은 당시 유명한 유대인 스승이었던 가말리엘에게 교육받은 정통 바리새파 유대인이었습니다. 그는 초기 예루살렘교회와 기독교인들을 박해하는데 앞장섰던 사람입니다. 그러던 사울이 다메섹에 있는 기독교인들을 잡으러 가는길에 밝은 빛가운데서 예수님을 만나는 경험을 했습니다. 그는 이 사건 이후 세례를 받고 유대교에서 기독교인으로 전향을 했습니다. 그런데 사도행전 9장에 보면,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전향한 이후에 사울은 예루살렘에 가서 사도들을 만나려고 했었지만 사도들은 그를 만나기를 두려워했습니다. 한때 예수믿는 사람들을 잡으려고 다메섹까지 갔던 사울이 지금 무슨 음모를 꾸미려는 것인가 싶어 무서워서 만나주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처럼 예루살렘교회 사도들과 교인들 모두가 사울을 의심하고 있었을 때, 사울을 예루살렘 교회에 소개하고 보증을 선 사람이 바로 바나바였습니다. 바나바는 사울의 전향을 믿었습니다. 예수님께 돌아온 한 사람의 소중한 영혼으로 그를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그는 사울을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그가 부활하신 예수를 만났다는 것과, 세례를 받은 일과, 다메섹에서 예수가 메시아임을 증거 하다가 핍박을 받은 이야기를 전하면서 사울을 변호했습니다. 바나바의 중재로 사도들과 예루살렘성도들은 오해를 풀고 회개한 사울과 성도의 교제를 나눌수 있었습니다. 

이후 사울은 그에게 보복하려는 유대인들을 피해 고향인 길리기아 다소로 내려갔고, 바나바는 다소로 사울을 찾아가 그를 안디옥교회로 데려왔습니다.  사울은 고향에서 많은 사람들의 비난과 의심의 눈초리를 받으며 찾아오는 이 없고, 알아주는 이 없이 있을 때였습니다. 반면 바나바는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있는 안디옥교회를 맡아 바쁘게 사역하고 있던 때였지만, 직접 사울을 찾아가서 함께 안디옥으로 돌아왔습니다. 그 사이에 13년이라는 긴 시간이 지났지만, 바나바는 여전히 예수님께 돌아온 한 영혼인 사울을 소중하게 마음에 담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나바의 이런 모습은 누가복음 15장에서 예수님이 들려준 잃은 양의 비유를 떠올리게 합니다. 그 내용은 양 백마리중에서 한 마리를 잃어버린 목자가 아흔아홉마리 양을 놔두고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고, 찾아낸후에는 이웃들에게 알리고 크게 기뻐한다는 것입니다. 지금의 경제개념으로는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으러 시간을 들이고 위험을 무릎쓰고 돌아다니는 것보다는, 남은 아흔아홉마리 양을 잘 지키는 것이 더 실리적이고 효율적인 선택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 목자가 그 잃어버린 양을 진정으로 너무나 사랑해서 그 양이 어두운 골짜기에서 헤매거나 산짐승들의 먹이가 될까봐 걱정되서 잠을 못이룰 정도라면 그 양한마리를 찾아낼때까지 찾으러 다닐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선한 목자’ ‘착한 목자’라고 했을때, 그 목자는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소중히 여기고 찾아나서는 목자를 뜻합니다. 오늘날의 교회와 성도들도 이렇게 한 사람의 영혼을 무엇보다도 소중히 여기고, 그 영혼을 구하는 일에  힘을 기울이기를 바랍니다.

셋째, 착하고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은 혼자 일하지 않고 협력해서 일하는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 26절에는 바나바가 다소에서 데려온 사울과 함께 일년동안 안디옥교회 교인들을 가르쳤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허물 많은 과거가 있었지만 예수님을 증거하는 사람이 된 사울을 바나바는 귀하게 여겼고 함께 협력했습니다. 두 사람의 협력으로 안디옥 교회는 모범적인 교회로 잘 성장했습니다. 바나바가 이렇게 협력할 수 있었던 것은 자기의 인기나 명예, 권위, 성취욕보다는 하나님의 일, 하나님의 영광에 삶의 초점이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전파에만 관심이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의 유익을 구하는 삶이 아니라 많은 사람의 유익, 교회 공동체의 유익을 구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21세기 들어와 경영학에서 리더십의 모델로 새롭게 떠오른 것이 헬퍼십(helpership)입니다. 헬퍼는 도와주는 사람이니까, 헬퍼십은 협력자 모델, 섬김의 리더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혼자 결정하고, 혼자 일하고, 혼자 빛나는 것이 아니라, 조직 전체를 빛나게 하기 위해서 조직 구성원과 서로 협력하고, 주인공이 아니라 조연의 역할을 자처하는 것입니다. 헬퍼십은 헬퍼들간에 신뢰, 믿음을 바탕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조직 전체에 좋은 영향을 미쳐서 좋은 결과를 낳게 합니다. 

헬퍼십의 성공사례는 무수히 많습니다. 그중에 한가지로 해비타트운동을 소개합니다.이 운동은 해비타트 회원들이 전 세계적으로 집 없는 사람들에게 집을 지어 주는 운동입니다. 1976년 미국에서 처음 시작한 이운동을 통해 전세계적으로 30만채가 넘는 집이 지어져서 집없는 사람들에게 공급되었습니다. 이운동의 특징은 집을 짓는일에 회원들이 여러 가지 능력을 모아서 자원봉사로 협력한다는 것입니다.  대패질 잘하는 사람은 집지을때 대패질하고, 망치질 잘하는 사람은 망치질을 합니다. 기술이 없는 사람은 건축자재를 나르는등 허드렛일을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모든 사람들이 힘을 합해서 집을 완성시키고, 집없는 사람에게 제공합니다. 집을 얻은 사람은 건축비용을 무이자로 장기간에 걸쳐 조금씩 갚으면 됩니다. 모든 사람이 헬퍼로 참여해서 사회의 공동선을 쌓는, 참으로 유익한 일을 해내는 운동이 바로 이 해비타트운동입니다. 

그런데 주목할 점은 이런 헬퍼십의 모델이 성경에 등장한다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모델이 오늘 나온 바나바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헬퍼십으로 이루어진 조직, 공동체가 교회입니다. 교회의 원어인 헬라어 ‘에클레시아’는 ‘교회 건물’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모임’‘공동체’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해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의 모임’, 공동체입니다. 이러한 교회의 주인은 누구입니까. 교회의 머리는 누구입니까. 교회의 리더는 누구입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리더로 삼고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헬퍼로서 협력하는 공동체가 바로 교회인 것입니다. 교회를 통해서 드러나는 것은 인간의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협력하여 교회공동체를 든든하게 세워가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바나바는 선한 사람이었고,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은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는 격려와 위로가 넘치는 사람이었고,  한 영혼을 구원하는 일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었습니다. 협력해서 일할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성령과 믿음이 충만하여, 선한 능력으로 살아가는 바나바의 모습을 안디옥교회 교인들은 잘 본받았습니다. 교회안에서 격려와 위로가 넘쳤고, 한 영혼을 소중히 여겼고, 서로 협력하고 서로 섬겼습니다. 그 결과 안디옥에서 복음을 믿는 사람들이 크게 늘어났고, 이 복음을 믿는 사람들을 부르는 중요한 호칭을 얻게 됩니다. 바로 ‘그리스도인’이라는 호칭입니다. ‘그리스도인’에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이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그당시에도 수많은 종교들을 따르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들과 구별되는 이름을 얻은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이란 호칭입니다. 이 이름은 바나바와 같이 성령과 믿음이 충만하여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선한 능력으로 살아가는 선한 사람, 안디옥교회 교인같은 착한 성도들이 얻어낸 것입니다. 

오늘날은 능력이 성품보다 중요하게 여겨지며, 눈에 보이는 능력이 눈에 보이지 않는 능력보다 중요하게 여겨지는 시대입니다. 그러나, 성품이 능력보다 중요하며, 눈에 보이지 않는 신앙의 능력이 눈에 보이는 능력보다 중요합니다. 

우리의 선한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이 세상 죄악세력과 맞서서 찬란한 승리를 거둔 분입니다. 그 크신 구원의 은혜로 ‘선하고 성령충만한 사람’이라는 인정을 받았던 바나바는 안디옥 교회를 통해 풍성한 열매를 맺었습니다. 바나바처럼, 안디옥교회처럼,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선한 능력으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 되어,  서로 격려하고 위로하며, 한 사람의 영혼을 소중히 여기며, 모두가 헬퍼로서 협력하는 교회 공동체를 이루어 삶속에서 선한 열매를 풍성하게 거두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it mobile vers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