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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얍복강, 어떻게 넘어야 합니까? – 장동철 목사

  인생의 얍복강, 어떻게 넘어야 합니까?

창세기 32:1-33:4

토론토 은혜와 평강교회 장동철 목사

어렸을 때 고향 마을에 홍수가 났던 기억이 있습니다. 홍수로 인해서 마을의 다리가 V자로 꺽 였습니다. 다리는 마을 사람들에게는 아주 중요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다리를 넘어야 논과 밭으로 나갈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때만해도 대한민국 정부는 재해에 대해서 지금처럼 신속하게 대처하는 때가 아니었습니다. 더욱이 제가 살던 강원도 산골 마을은 더 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논밭을 돌볼수 없어서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동네 어르신 한분이 꺽인 콘크리드 다리 위를 조심스럽게 건너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안전하게 다리를 건너고 다시 안전하게 돌아오셨습니다. 그 이후로 다른 사람들도 조심스럽게 꺽여진 다리를 건너 논과 밭으로 갔습니다. 

인생에는 강을 넘지 않으면 결코 밟을 수 없는 땅이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그 강을 넘지 못합니다. 두가지 이유때문인것 같습니다. 첫째는 희생이 두려운 것입니다. 강을 넘다가 가진 것을 모두 잃을까 두려워서 넘지 못합니다. 둘째는 자존심입니다. 강을 넘다가 잘 지켜온 자존심이 무너지거나 상하기라도 할까봐 겁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강을 넘지 못합니다.  

창세기 32장에는 강 앞에 서 있는 한 사람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야곱입니다. 하나님은 야곱에게 얍복강을 건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강을 건너는 것이 간단하지 않습니다. 강 건너편에는 형 에서가 장정 400명과 함께 야곱을 치기 위해 다가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야곱의 고민은 깊었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는 강을 넘기로 결심합니다. 야곱은 어떻게 그런 결심을 할 수 있었던 것일까요? 우리는 야곱의 삶을 통해서 우리 삶의 얍복강을 어떻게 넘어야 하는지 세가지로 나눌 것입니다. 

첫째, 얍복강은 능력이 아니라 믿음으로 건너는 강입니다. (32:1-23)

야곱은 얍복강을 건너기로 결심합니다. 그리고 가족들과 가축떼를 강 건너편으로 먼저 건너 보냅니다. 강 건너편에는 그를 치려는 에서가 여전히 야곱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곱은 강을 건너기로 결심하는 것입니다. 야곱은 어떻게 그런 결정을 하게 된 것입니까? 이유는 간단합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야곱의 믿음은 도데체 어디서 나온 믿음입니까? 현실을 파악하지 않은 즉흥적이고 감정적인 믿음은 아닙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야곱의 믿음은 그의 전 인생을 통해서 경험되고 축척 된 믿음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삶에 이미 훈련해 주신 믿음입니다. 어떻게 그 믿음이 훈련되고 축척 되었습니까? 

20년전 야곱은 지팡이 하나만 의지한 체 도망자의 삶을 시작합니다.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야곱에게 나타나셔서 그를 지키시고 보호하시고 마침내 가나안땅으로 다시 돌아오게 하신다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약속대로 때때마다 야곱의 인생에 개입하셨습니다. 그를 먹이시고, 입히셨고, 결국에는 큰 가축떼를 이끄는 거부가 되게 하셨습니다. 야곱은 얍복강까지 오는 길에서도 자기와 함께 하는 하나님을 경험합니다. 하나님의 군대가 야곱의 길에 함께 있는 것을 환상 가운데 보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을 지키고 계시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이 믿음을 가질수 있도록 충분히 훈련 시켜 주시고, 경험하게 하셨습니다. 이제는 야곱이 그 믿음을 하나님께 보일 때입니다. 야곱은 그 믿음 가운데 얍복강을 건너기로 결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뜬금없는 믿음을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이미 우리에게 보여주신 믿음, 우리가 경험을 통해서 체험한 믿음, 우리의 인생가운데 훈련해 놓으신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나안땅을 점령하라고 명령하실 때 뜬금없는 믿음을 요구하신게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미 그들이 그 믿음을 고백 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하나님을 경험하게 하셨습니다. 반석에서 물이 나오게 하셨고, 때때마다 만나와 메추라기로 먹이셨고, 밤에는 불기둥으로 따뜻하게 하시고,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시원케 해주셨습니다. 그들이 40년간 광야를 떠돌았지만 신발과 옷이 헤어지지 않는 기적을 보게 하셨고, 광야에서 그들을 치는 적들을 기적적인 방법으로 제압해 주셨습니다. 그 모든 훈련을 하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나안을 정복하라고 명령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근거 없는 믿음을 요구하신것이 아닙니다.  

인생의 얍복강은 믿음으로 건너는 강입니다. 우리의 능력으로 건너는 강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 믿음은 이미 우리안에 하나님께서 훈련해 놓으신 믿음입니다. 우리는 그 믿음을 고백 할만한 충분한 믿음을 이미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경험하게 하시고, 훈련하시고, 심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당신께서 우리에게 훈련하신 것 이상의 믿음을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우리에게 훈련하신 만큼의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그 믿음은 우리 인생앞에 놓인 얍복강을 충분히 넘을 수 있는 믿음입니다. 그 믿음으로 여러분의 얍복강을 넘으시기 바랍니다. 

둘째, 얍복강은 내 자아가 꺽여야 건널 수 있는 강입니다. (32:24-32) 

야곱은 가족들과 가축떼를 강 건너편으로 보냅니다. 그리고 그 날밤 자신은 얍복강 나루터에 홀로 남습니다. 야곱의 고뇌와 번민이 얼마나 컸는지 상상이 가는 장면입니다. 믿음으로 결정하긴 했지만, 여전히 두려운 것입니다. 야곱을 위협하는 상황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결정을 했다고 두려움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상황이 변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을 지키고 앞으로 나가시기 바랍니다. 

야곱이 홀로 고뇌의 밤을 보내고 있을 때, 한 사람이 얍복강 나루터로 다가옵니다. 야곱은 그가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으로 알아차립니다. 그가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성경 학자들사이에도 의견이 분분합니다. 어떤 학자들은 천사라고 말하고, 어떤 학자들은 사람으로 현현하신 예수님이라고 말합니다. 그의 정체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분명한 것은 그가 하나님께로 부터 온 존재이며 사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야곱은 그를 붙들고 자신을 축복하라고 강청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 나루터를 지나가게 하지 않겠다고 말입니다. 

그와 야곱의 실랑이는 밤이 지나 새벽이 될 때까지 이어집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야곱을 떼어 놓기 위해서 그의 허벅지 뼈를 내려칩니다. 개역한글성경에서는 이 부분을 환도뼈라고 번역했습니다. 이부분은 엉덩이 바깥 측변에 살며시 들어간 부분인데, 골반과 허벅지 뼈가 힘줄로 연결된 부분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야곱의 환도뼈를 치자, 골반뼈와 허벅지뼈가 서로 어긋나고, 그 부분을 잇는 힘줄도 상했습니다. 그일로 야곱은 절름발이가 됩니다. 그는 야곱에게 이름을 묻습니다. 야곱은 “나는 야곱입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야곱이라는 이름의 뜻은 “발뒷꿈치를 잡는자”라는 뜻입니다. 그 이름의 뉘앙스는 “뺴앗는 자, 탈취하는 자”입니다. 야곱의 이름에는 야곱의 인격과 그의 삶의 방식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야곱에게 “다시는 그 이름으로 너를 부르지 말라”고 말합니다. 대신 이스라엘이란 이름을 쓰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의 뜻은 “하나님과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다”는 뜻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결국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얻어낸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사람들로부터 장자로 인정받을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야곱에게 한 일은 두가지 입니다. 첫째, 그를 절름발이로 만든 것입니다. 둘째, 야곱의 지난 정체성을 지우고 새로운 정체성을 부여해 준 것입니다. 종합적으로 말한다면 야곱의 옛 자아를 꺽어 버린 것입니다. 자기 힘을 의지해서 살던 야곱의 자아를 꺽었고, 부족한 인격 대로 살아온 옛 자아를 꺽은 것입니다. 이것이 축복을 구한 야곱에게 하나님의 사람이 행한 것입니다. 야곱은 그 상태가 되었을 때 얍복강을 건너게 됩니다. 

인생의 얍복강을 건너기 위해서는 우리의 옛 자아가 죽어야 합니다. 좀더 쉬운 적용을 한다면, 우리의 자존심을 하나님 앞에 내려 놓아지는 것입니다. 그 자존심을 내려 놓지 않고서는 인생의 얍복강은 넘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내 자아를 주님께 철저히 맡기는 것입니다. 그것의 신앙의 첫발입니다. 예수님을 주인으로 고백한다고 하면서, 여전히 내 자존심의 주인이 나라고 한다면, 우리는 아직 진정으로 예수님이 주인삼은게 아닐수도 있습니다. 신앙의 중심축에 여전히 내 자존심이 있어서, 예배를 해도 그것을 위해하고, 기도를 해도 그것을 위해하고, 헌금을 해도 그것을 위해서 한다면, 우리는 어쩌면 우상숭배를 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골자기 성황당대신, 교회건물을 선택한 것이고, 묵주대신 십자가를 선택한 것일뿐입니다. 

예수님께 여러분의 자존심을 내려 놓으시기 바랍니다. 불교가 말하는 것처럼 무아(無我)의 상태, 즉 자존심이 사라지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불교의 이론이 그럴싸해 보이지만, 존재하는 인간에게는 불가능한 말입니다. 자존심을 예수님께 내려 놓는다는 것은, 내가 그것을 지키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철저히 주님께 내어 맡기는 것을 말합니다. 주님이 높이시면 감사하고, 낮추시면 뜻이 있는줄 알고 받아들이는 마음입니다. 그럴때 주님께서 우리안에서 주인으로 일하실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 인생의 얍복강을 넘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자존심이 예수님의 뜻 앞에 굴복 되기를 축복합니다 

3. 얍복강은 우리에게 지난날의 삶의 방식을 버리라고 요구합니다. (33:1-4)

야곱은 얍복강을 건너 에서를 향해 나갑니다. 그는 형이 그를 칠지도 모르는 상황을 대비해서 대열을 정비합니다. 먼저 여종들과 그의 자식들을 첫번째 대열에 세웁니다. 두번째는 레아와 그의 자식들이 서게 합니다. 그리고 맨 마지막 대열에 자기가 가장 사랑하는 라헬과 아들 요셉을 세웁니다. 야곱은 왜 이런 대열을 만드는 것입니까? 만약에 형 에서가 자신들을 공격하면, 가장 아끼는 사람들에게 도망갈 시간을 주기 위해서 입니다. 그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들은 라헬과 요셉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이 레아와 그의 아들이들이었고, 맨 마지막이 여종과 그의 아들들이었던 것입니다. 

이 대열을 보면 야곱의 삶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는 자기가 원하는 것을 반드시 취하고 지키는 사람이었습니다. 남의 것을 뻇았지 자기를 희생하는 법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야곱의 대열에는 그런 야곱의 삶의 방식이 여전히 드러나 있습니다. 야곱의 삶은 바뀐게 하나도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창세기 33:3절을 주의 깊게 읽어보면, 놀라운 광경을 보입니다. 대열 정비를 마친 야곱이, 모든 대열의 가장 선두로 나가는 것입니다. 만약 희생을 치뤄야 하는 상황이 온다면 자신이 먼저 치루겠다는 것입니다. 에서가 공격해온다면 자신이 가장 먼저 그 위협에 맞서겠다는 것입니다. 야곱에게 삶에서 지키고 싶은 소중한 것들은 여전히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 가운데 정작 자기 자신은 없었습니다. 이것은 지난날 야곱의 삶의 방식과는 전혀 다른 모습입니다. 

우리가 넘어야 하는 인생의 얍복강은 우리에게 다른 삶의 방식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삶의 방식을 바꾸지 않으면, 얍복강 넘어에서의 삶을 살아갈 수 업습니다. 설사 변하지 않은 모습으로 그 강을 넘었다해도, 그 땅에서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얍복강은 여러분에게 지금까지와 다른 삶의 방식을 결단하라고 도전하고 있습니다. 

지난 1월에 은혜와 평강교회는 <비하와 영광지>라는 작은 메거진 하나를 발행했습니다. 그곳에 최선수 장로님이라는 분이 글을 하나 써 주셨습니다. 장로님은 서울대 치대와 박사학위를 받으신 분입니다. 강남에서 아주 잘 운영되던 치과 병원을 운영하셨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께서 그분을 평신도 선교사로 부르신 것입니다. 그분의 나이 54살이 되셨을 때입니다. 병원이 한참 잘 되고, 많은 돈을 벌며, 사회적으로 뻗어 나갈 수 있을 때 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내려두고 선교사로 나가라고 도전하신 것입니다. 주변에서는 모두 그 삶을 반대했습니다. 너무 감정적이고 즉흥적인 결정이라고 생각했던것 같습니다. 그러나 장로님은 모든 것을 내려놓고 선교사로 나가셨습니다. 그리고 남은 평생을 평신도 선교사로 살았습니다. 지금 장로님은 여든이 넘으셨습니다. 장로님은 그 때의 선택을 한번도 후회해 본적이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때가 당신의 삶에서 가장 평온하고 자유로웠던 때라고 고백합니다. 사랑하는 주님과 온전히 동행했던 때라고 말씀하십니다.  

선교사님은 그때의 변화를 나무 접붙이기에 비유하셨습니다. 마치 멀쩡하게 자라던 가지를 뚝 잘라내어 전혀 다른 나무에 접붙여 놓은 것 같았다는 것입니다. 잘나가던 치과 의사의 삶에서 선교사로서의 삶의 변화가 힘들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 삶에 적응하기 이해서 힘들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접붙이기가 끝났을 때, 놀라운 열매들을 경험했다고 고백합니다. 

얍복강 앞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새로운 삶의 방식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 변화는 분명 힘들고 아플것입니다. 그러나 그 아픔을 죽음으로 향하는 아픔이 아니라, 새로운 소망과 열매를 나가는 아픔입니다. 그 변화를 기꺼이 결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얍복강을 건너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여러분이 넘어야 할 인생의 얍복강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의 능력으로는 그 강을 넘을 수 없습니다. 믿음으로 그 강을 넘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뜬금없는 믿음을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이미 여러분에게 훈련하신 믿음을 요구하실 뿐입니다. 그 강은 회피한다고 사라지는 강이 아닙니다. 지금 믿음으로 넘지 않으면, 그 강은 여러분의 인생에 다시 나타납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앞에서 믿음을 고백하지 않으면, 하나님은 여러분을 다시 믿음학교로 데려가십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여러분의 믿음을 다시 훈련하시고, 다시 그 강 앞에 세우십니다. 시간을 낭비하지 마시고 인생의 압복강을 믿음으로 넘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충분히 넘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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