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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단상] 변화의 능력은 어디에서 오는가?(사도행전 2장 1-13절)_밴쿠버 동산교회 장천득 목사

변화의 능력은 어디에서 오는가?(사도행전 2장 1-13절)

밴쿠버 동산교회 장천득 목사

   사람은 아기로 태어나서 노년에 이르기까지 변화와 성장의 과정을 거칩니다. 변화와 성장은 모든 생명체에 일어납니다. 모든 생명체에 변화의 과정은 필수입니다. 변화를 거부할 때 세상에서 도태되고, 건강이나 관계안에 문제가 일어납니다. 변화와 적응은 생존에 필요 충분조건입니다. 그런데, 변하지 않는 것도 문제이지만 강제적으로 누군가를 변화시키는 것도 문제가 됩니다. 변화를 원하지 않는 사람이나 조직을 억지로 변화시키려 할 때 얼마나 많은 갈등과 충돌이 일어나는지 우린 잘 압니다.

   가정에서는 배우자와 아이들이 변하지 않는다고 한탄합니다. 한 여자 집사님이 남편이 수십년 하나도 변한 것이 없다고 한탄하며 불평합니다. 그러면 오히려 “여보 당신만 변하면 아이들 다 변해. 당신만 한번 변해봐 .” 남편은 한마디 잔소리 합니다. 변화를 위한 공격과 방어의 연속입니다. 변화를 기대하며 아내는 잔소리를 하다가 역풍을 맞습니다. 우리 모두 경험적으로 잘 알지 않습니까? 강제적으로 변화를 원할 때 “작용과 반작용”의 법칙이 흔히들 일어납니다. 변화시키려는 힘만큼 변하지 않으려는 반작용(Reaction)이 얼마나 강력한지요. 큰 변화를 요구할수록 아이들은 반항하며 성도들도 힘들어 합니다. 관계는 악화되고 어려워지고는 합니다. 특히 변화의 방식을 한국식으로 요구할 때 캐나다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부모로부터 더욱 멀어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변화를 내가 주도하고 강요할수록 상황은 악화되고 우린 무력감을 느끼게 됩니다.

  한국에서 목회를 하는 친구가 종종 성도들이 변하지 않는다고 저에게 전화로 푸념을 한 친구가 있었습니다. 설교를 최선으로 준비해서 은혜를 받았다고 성도들이 말하는데 문제는 성도들의 모습이 말 뿐이지 좀처럼 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제자훈련에 목숨 걸고 5년, 10년을 했는데도 왜 변하지 않는지… 뭐가 문제인지 잘 모르겠다고 합니다. “친구야 변해야 하는 것은 성도들이 아닌 것 같다. 다른 사람 변화시키려 하지 말고 너 자신부터 변해야겠다! 성도들은 변화의 대상이 아니라 섬김의 대상이고 사랑의 대상이지, 변화시키려 하면 할수록 도망가지. 내 습관, 내 인격 하나 변화시키기 힘든데 누구를 변화시키겠나? 우린 신앙생활에 있어서 변화의 주체가 아니라 변화의 대상이야. 율법으로 강요한다고 사람이 변하겠니?” 라고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사실 누군가 나를 변화시키려 덤벼들면 기분 나쁠 때가 있습니다. 우린 변화를 이야기할 때 내 기준, 내 욕심, 내 경험인 경우가 참 많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포장합니다. 사랑의 이름으로 잔소리하면서 수많은 상처를 가족들에게 주기도 합니다. 물론 사랑하기 때문에 기대하며 잔소리하지만 좀처럼 변하지 않는 아이들, 남편과 아내를 보면서 낙심하게 됩니다. 

   사람들이 문제를 몰라서 변화를 거부하는 것일까요? 문제를 알면 습관을 고치고 더 나아질 수 있을까요? 노상 스마트폰만 하는 아이들…. 중독이라는 문제만 알면 해법이 있고 문제가 다 해결할 수 있을까요? 좀더 지식이 있으면 절제하지 못하고 낭비하는 습관에서 변화가 가능할까요? 부분적으로는 가능할 수 있습니다. 살아가면서 지식과 경험 다 중요하지만 사람을 근본적으로 바꾸지는 못합니다. 그리스도인 중에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요? 교회생활 2, 3년 하신분 중에 그리스도인은 용서해야 한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요? 분노를 통해서 하나님이 기뻐하는 선한 일들이 성취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다 배워서 압니다. 그러나, 교회와 가정안에 수많은 갈등이 일어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돈과 성과 권력이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빠지기 쉬운 함정이자 우상임을 모르는 그리스도인이 있을까요? 사단 마귀의 유혹인 줄 알면서도 넘어지고 쓰러지는 유명한 사람들을 심심치 않게 봅니다. 우린 몰라서 죄를 짓지만 알면서 죄를 짓는 경우가 오히려 더 많은 것 같습니다. 말씀을 알아도 말씀대로 살아갈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나 자신의 변화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종종 깨닫습니다. 우리 스스로 선을 행할 능력, 겸손의 능력, 섬김의 능력, 사랑의 능력이 없음을 깨닫습니다. 하나님으로 채워지지 않은 깨어지고 망가진 마음 안에는 선한 능력이 없습니다. 우리 스스로 근본적인 변화의 능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조차 바꾸지 못한 제자들(?)

   예수님은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 오셨습니다. 죄로 인해 멸망 가운데 있는 우리에게 영생을 주기 위해 오셨습니다. 죄인을 의인으로 변화시키기 위해 오셨습니다. 우린 심판 받을 존재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변화되었습니다. 주님은 만물을 새롭게 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종말에 이 세상을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만들기 위해 오셨습니다. 이를 위해 예수님은 12명의 제자들을 선택해 3년간 제자 훈련을 합니다. 예수님 이야말로 사람을 변화시키는 전문가입니다. 제자훈련의 전문가입니다. 예수님 만한 멘토와 상담가도 없습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하는 제자훈련이 1,2년 코스라면 예수님은 365일을 제자들과 동거동락을 하면서 강도높은 훈련을 하셨습니다. 천국의 비유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설명하셨고 기적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싸인(Messianic sign)을 제자들에게 직접 보게 하셨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해 생명의 떡이심을 말씀하셨고 직접 자신의 생명을 내어 주셨습니다. 십자가에 죽고 3일만에 부활할 것을 제자들에게 수차례 말씀하셨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에 제자들은 다 도망갑니다. 3년 훈련이 도루묵처럼 된 순간이 있었습니다. 주님의 공생애 사역 3년 마지막, 부활 승천하실 떄 제자들의 모습은 근본적으로 변한 것이 없어 보입니다. 그러다가 사도행전을 보면 제자들의 갑작스런 변화는 도대체 뭐지? 저에게 이런 질문이 들었습니다. 무엇이 부족한 것일까요? 4복음서의 제자들과 사도행전의 제자들의 모습은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수차례 제자들에게 알려줍니다. 성경을 제대로 관찰하면 사실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제자는 없었습니다. 도마만 주님의 부활을 의심한 것이 아닙니다. 육체의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도 영으로 생각합니다(누24:37). 예수님의 부활이 꿈인가 생시인가? 묻습니다.. 요한복음 21장에서 베드로와 제자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도 디베랴 바다가, 과거의 물고기 잡는 어부의 일로 돌아갑니다. 베드로가 생각한 하나님의 나라, 혁명적 변화는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예수는 생존과 생활에 전혀 도움이 안 된다. 예수를 믿는 믿고 따르는 일이 돈 되는 일도 아니고…. 현실에 도움이 안 된다. 무슨 의미가 있는가? 메시야 예수를 왕으로 삼으려던 유대인들은 예수가 현실적 도움이 되지 않는다 결론 내립니다. 그리고는 십자가에 죽입니다. 유대인 군중들이나 제자들의 실망한 모습이나 포인트는 비슷합니다. 실망과 낙심한 마음으로 예수님을 만나기 전의 Job으로 돌아갑니다. 한마디로 제자들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 과거로 회귀(back-sliding) 합니다. 예수님과 3년간의 제자훈련, 하나님 나라는 뒷전으로 하고 과거의 일상으로 돌아갑니다. 저는 베드로의 실패를 통해 오히려 은혜를 받습니다. 왜냐하면 베드로의 모습을 통해 우리 자신의 연약함을 확인하기 때문입니다. 변화를 원하지만 변화되지 못한 베드로의 실패를 통해 우리의 모습을 확인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변화를 원하지만 정작 나자신이 변해야 한다는 사실을 잊고 살아갑니다. 변화를 위한 우리의 결단과 의지가 중요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습니다. 변화를 위해서 제자훈련도 필요하지만 그 이상의 무엇인가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변화의 힘은 어디서 오는가? 변화를 위해서는 세상은 말합니다. 인간 스스로 자기 계발을 해야 하며 자신의 감정에 충실해야 한다고 합니다. 자신의 내면의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 말합니다. 그러나, 이는 거짓된 충고입니다. 우리의 내면이 깨어지고 무너져 있다면, 변화의 힘은 내 스스로가 아닌 나의 바깥, 외부에서 변의 힘은 와야 합니다. 변화의 능력은 땅이 아닌 하늘로부터 와야 합니다. 우리의 구원은 전적으로 나의 바깥, 하늘로부터 와야 합니다. 

자동차를 운전하는 중 당황스러운 일이 있었습니다. 아무리 악셀을 밟아도 자동차가 나가지 않습니다. 차가 시동이 꺼진 것처럼 맥없이 서버리는 것이었습니다. 급히 갓길에 차를 세웠습니다. 이유는 간단했습니다. 자동차에 기름이 완전히 떨어져 텅 빈 상태가 되었습니다. 다른 어떤 것보다 기름만 채워주면 되는 일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도 마찬가지 입니다. 인격이신 성령 하나님은 우리의 삶에 변화의 근거입니다. 성령님은 우리의 능력이십니다. 인격의 변화, 살아갈 힘, 세상을 이길 힘과 능력의 근원입니다. 성령님은 우리의 인격을 변화시켜 주시며,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능력과 은사를 주십니다. 우리에게 훈련이나 교육이 반드시 필요하지만 그것은 변화의 필요충분조건은 아닙니다. 변화의 능력은 외부로부터 와야 합니다. 자동차와 운전자가 존재하지만 기름이 주입되지 않으면 자동차가 가지 않는 것처럼 그리스도인으로 살기 위해서는 생명이요 능력이신 성령 하나님이 우리 안에 찾아 오셔야 합니다. 성령님이 우리를 소유하고 우리를 사로잡아 주셔야 합니다. 변화의 힘, 생명과 능력은 외부로부터 내 안에 임해야 합니다. 죽은 영을 살리는 영이 내 안에 임해야 합니다. 내 의지와 능력으로 복음을 믿을 수 없고, 전할 수 없기에… 성령님이 “우리 곁에서 우리를 도우시는” 보혜사 (파라클레토스)로 오셔서 우리를 변화시켜 주셔야 합니다.

여러분 말씀 하나면 충분할까요? 이 말을 이상하게 오해하지 말기 바랍니다.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3년간 제자훈련을 하셨습니다. 말씀훈련이 얼마나 중요한지 3년간을 제자들을 특별훈련 하셨습니다. 문제는 무엇일까요? 제자들은 말씀에 순종할 능력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순종할 능력, 사랑할 능력, 용서할 능력이 없다는 점입니다. 주님도 이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우리 예수님조차 제자들을 가르치면서도 당장 변화시키려 하지 않았습니다. 제자들의 변화를 기대하지만 오히려 사랑으로만 섬기시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주님은 제자들이 당장 변화시키려 애쓰지 않았습니다. 제자들의 한계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도 우리의 연약함과 한계를 알아야 합니다. 두 주먹 불끈 쥐고 사람들을 변화시키려 애쓸 필요가 없습니다. 내 힘을 빼야 합니다! 근본적인 변화의 능력이 우리 안에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변화의 주체가 되려 하면 할수록 문제만 생깁니다. 관계만 망가뜨릴 뿐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성령을 보낼 때까지, 하늘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질 때까지 기다리라고 제자들에게 당부하십니다.(눅24:49). 성령님이 임하시면 우리가 권능을 받아서 (행1:8)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살아갈 수 있다고 말씀합니다. 진리의 성령, 보혜사가 오시면 예수님이 가르친 것,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할 것이라(요14:26)고 주님은 말씀합니다. 성령님이 오시면 영원히 함께 하셔서 우리를 고아처럼 버려두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합니다. 성령님은 우리 안에서 우리 영과 더불어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언하십니다. 양자의 영이 되셔서 우리가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로 부르게 하십니다(롬8:14-15). 오순절 성령강림은 예수님이 복음서에 약속하신 바로 그 분입니다. 성령님은 우리의 인격의 변화, 존재의 변화, 능력의 변화, 본질적이며 근본적인 변화를 주시는 그리스도의 영이십니다. 

성경은 이 세상은 죄로 인해 깨어지고 망가진 (Brokenness) 상태임을 증언합니다. 우린 약간의 수리(Repair) 정도가 아니라 근본적인 변화(transformation)가 필요한 존재입니다. 그런 점에서 오순절 성령강림사건은 매우 중요합니다. 예수님의 탄생과 부활절 못지 않게 중요합니다. 세속역사를 BC와 AD로 나누지만 교회의 역사, 그리스도인의 역사는 성령강림사건을 전후로 나누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변화는 성령세례를 받고 거듭나는 Before Spirit 과 After Spirit으로 나누어집니다. 성경에는 그리스도인의 정의를 그리스도의 영이 내주하는 사람으로 정의합니다. 그리스도의 영, 성령님이 내주하지(Indwelling) 않으면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을 일컬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이라고 우리 주님은 말씀합니다

오순절의 성령강림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 사도행전 2장에 누가는 요엘 예언의 성취로 오순절 사건을 설명합니다. 사도행전 2장 17절에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며 너희의 늙은 이들은 꿈을 꾸리라.  

성령 하나님은 구약에는 소수의 왕, 예언자, 선지자에게 임했습니다. 그러나, 오순절에 임하신 성령님은 모든 사람에게, 인종과 나이, 신분에 상관없이 누구에게나 성령님이 폭포수같이 임하신다는 것입니다. 구약에는 성령님(루아흐)의 역사가 방문(visitation)이었다면 사도행전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에는 영원히 내주하심(Indwelling)입니다. 오순절에 마가의 다락방에 임하신 성령님,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같이, 불같이 임하신 성령님은 오늘에도 임하심을 믿습니다. 성령님은 존재의 변화 뿐 아니라 임재와 능력을 가시적으로 보여줍니다. 성령님이 바람처럼 불같이 임하시니 믿지 않는 불신자들도 그 변화의 증거를 볼 수 있었습니다. 성령님이 임하시면 현상적, 경험적, 내적, 외적인 변화가 일어납니다. 성령께 사로잡히면 달라집니다. 그러므로 성령세례와 성령충만은 변화를 원한다면 너무나 중요합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누구보다 본인 스스로 잘 압니다. 자신이 변화된 것을 본인이 알고 주변에서도 압니다. 성령에 충만하면 말과 얼굴표정, 행동이 바뀌는 것을 봅니다. 사도행전 2장에 오순절 성령이 임하시니 세상 사람들이 신기해 하며 놀라는 것을 봅니다. 세상은 영적 현상에 소동하며 당황합니다. 성령님이 임하시니 세상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들을 보면 놀라며 궁금해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스스로 세상을 변화시키려 애쓸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께서 변화를 주도하시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알 수 없는 매력과 신비에 불신자들이 매료됩니다. 흩어진 사람들이 모여들고, 흩어진 방언이 성령 안에서 하나의 언어, 하늘의 언어, 성령의 언어로 소통하게 됩니다. 인간이 변화를 주도했던 바벨탑 사건이 역전됩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안에 소통하게 하시며 다시금 연합되게 하십니다.  성령 하나님이 일으키시는 변화는 하나가 되고 연합되게 합니다. 인간이 강제적으로 일으키는 변화는 갈등과 다툼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성령님은 우리를 하나님께 연결하며 영적 언어(heavenly language)로 소통하게 합니다. 분열에서 일치와 연합이 일어납니다. 성령님은 내가 아닌 하나님께 온전히 집중하게 합니다. 성령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나라, 새 언약 백성, 진정한 교회 공동체로 만듭니다. 오늘 우리에게 이러한 은혜가 있기를 예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령님은 언어의 변화를 !

사도행전 2장 기록은 마가의 다락방에 제자들이 모여 기도하고 있을 때 경건한 유대인들이 천하 각국에서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 모여들었습니다. 홀연히 하늘에서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고, 불의 혀(Fire Tongue)가 사람들의 머리위에 임했습니다. 2잘 4절에 성령의 세례(Baptism with Holy Spirit)와 충만을 받으니 제자들이 방언을 말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여기서의 방언은 언어(language)방언입니다. 당시에 경건한 유대인들이 천하 각국에서 모여들었는데… 자신들이 살던 곳, 살던 지역의 방언이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방언의 내용입니다. 성령님이 임하셔서 제자들이 난 곳 방언(native), 언어(language)방언을 말하기 시작하는데 하나님의 큰 일(행2:11)을 말한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방언의 내용이 하나님의 구속사, 하나님 나라, 예수 그리스도, 구약 예언의 성취에 관한 내용이었다는 것입니다. 성령세례를 받으면 언어가 바뀝니다. 기도의 내용이 바뀝니다. 하나님의 큰 일,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 하나님 나라를 이야기하게 됩니다. 저는 성령충만한 사람이 비트코인, 부동산, 세상 돌아가는 일에 침을 튀며 말하는 법을 본 적이 없습니다. 성령의 사람은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 하늘에 속한 이야기를 말합니다. 아무리 먹고 사는 문제가 중요해도 생존의 문제에 매몰되어 세상 이야기에 감정을 소진하지 않습니다. 성령의 사람은 “하나님의 큰 일”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 예수 이야기를 말하기를 기뻐하며 즐거워합니다. 세상의 영을 받은 사람은 땅의 이야기, 부정적 세상 이야기를 즐거워합니다. 그러나, 성령님은 우리 마음에 하늘에 속한 이야기, 생명과 구원, 믿음과 소망에 대한 이야기로 우릴 기대하며 설레게 합니다.  

성령님은 변화의 능력을!

17절에는 성령님이 임하시면 우리가 예언하며, 환상을 보며, 꿈을 꾼다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예언, 꿈, 환상은 한마디로 하늘이 열려 하늘에 속한 것,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사들입니다. 성령에 충만하면 성경의 예언적 말씀이 믿어지고 담대히 선포하게 됩니다. 예수를 믿으면 구원받지만 불신이면 지옥임을 믿습니다. 성경말씀 자체가 예언적입니다. 주님의 재림에 대한 것도 마지막 때의 예언적 말씀으로 남아 있습니다. 우린 코비드를 지나면서 꿈과 환상을 잃어버린 시대 속에 살고 있지만 성령님은 환상과 꿈을 줍니다. 60의 나이에 10년 선교를 하신 분이 있습니다. 얼마전 3개월간 안식년차 들어 오셨습니다. 지금 70이 넘으신 선교사님이 10년을 더 조지아에 선교사로 섬기겠다고 꿈을 가지고 있습니다.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이런 꿈과 비전이 생깁니다. 기도할 때 성령님은 환상이나 영적인 장면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한 꿈과 환상입니다. 제한없이, 차별없이 부어 주시는 성령님, 오순절에 임하신 성령님께서 이런 은혜를 여러분 모두에게 다시금 부어주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오늘 우리가 다시금 성령님께 사로잡히길 기도합니다. 

성령님은 공동체의 변화를 !

오순절 성령 강림사건으로 교회가 처음으로 시작됩니다. 오순절에 성령이 강림하심으로 주님이 말씀하신 세상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교회, 예수님이 마태복음에 말씀하신 바로 그 교회 (에클레시아)가 시작됩니다. 제자들의 삶도 증인으로(witness)로 비로서 변화됩니다. 사도행전의 오순절 사건이후로 제자들은 비로서 그리스도인으로 세상속에 나가가 담대히 복음을 증거하기 시작합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이후 시작된 초대교회는 서로 모이기에 힘쓰며 기도하며 떡을 떼며 유무상통하는 공동체가 시작됩니다. 누군가의 강압적인 압력이 아니라 성령님의 임재로 자발적으로 자원하며 헌신합니다. 생명력 있는 교회공동체가 세워지기 시작합니다. 누군가의 강제로 시작하면 만드시 탈이 나고 문제가 생깁니다. 그러나, 성령님이 주시는 자발성은 생명력이 있고 공동체의 DNA가 완전히 바뀌는 것을 보게 됩니다.  

사도행전을 일컬어 성령행전, 선교행전 이라고 말합니다. 성령님이 교회의 주체가 되셔서 교회를 이끌어 가고 선교적 변화를 이끌어 가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성령의 강력한 임재와 역사가 사도들을 통해 확산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사도행전의 역사, 성령의 역사가 2000년을 건너 저와 여러분에게 전달되어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것입니다. 우린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의 결과물입니다. 예수를 믿고 고백한 것이 초대교회 복음이 예루살렘, 유대와 사마리아, 땅끝까지 성령운동, 선교운동의 결과로 우리가 예수를 믿고 고백하게 된 것입니다 오순절의 성령님은 이미 오셨고… 하나님께 여전히 믿고, 찾고, 구하는 자에게 임하십니다. 나의 변화, 내 가정의 변화를 원한다면  성령님을 초청하며, 믿고, 구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큰일을 말하며, 하나님의 구속사에 동참하는 여러분 되길 예수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변화의 능력은 어디에서 오는가? 제자들의 담대함, 그리스도인으로 능력, 증인 됨, 급진적인 변화는 어디에서 왔습니까? 진정한 변화를 원한다면 성령세례를 받아야 합니다. 성령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날마다 성령님을 의지해 성령으로 충만한 삶을 사시는 여러분 되길 예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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