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뻐하라 (빌 4:4~7)
밴쿠버새문안교회 김민우 목사
주님의 평안을 전합니다. 얼마 전에 아이들과 함께 ‘인사이드 아웃’이라는 영화를 관람했습니다. Riley라는 소녀의 이야기인데요, 그 소녀의 마음속에는 기쁨, 슬픔, 버럭, 까칠, 소심 이렇게 다섯 가지 감정이 서로 어우러져 자아를 형성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Riley가 사춘기가 되면서 불안, 당황, 따분함 같은 새로운 감정들이 들어오게 되었고, 기존의 감정들과 충돌하게 되면서 흥미로운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Riley가 어릴 적에는 주로 기쁨이가 감정 조종간을 쥐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마냥 행복하고 즐거운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불안이에게 조종간을 빼앗기고, 그때부터 질풍노도의 모습을 보이게 됩니다. 재미있는 장면은 Riley 부모의 감정도 살짝 비치는데, 아빠의 감정 조종간은 분노가 잡고 있고, 엄마의 감정 조종간은 슬픔이 잡고 있었습니다. 어느 심리학자의 말에 따르면, 9살 때 기쁨의 감정이 정점에 올랐다가 서서히 내리막으로 향한다고 합니다. 이 주장에 따르면, 기쁨이라는 감정은 언제까지나 유지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나이가 들수록 기쁨의 이유는 점점 사라지고, 대신 그 자리에 분노와 슬픔이 매워지는 것 같습니다. 또한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상황도 기뻐할 만한 조건이 그리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본문은 우리에게 기뻐하라고 말씀합니다. 그것도 항상 기뻐하라고 합니다. 과연 어떻게 하면 항상 기뻐할 수 있을까요? 본문에서 그 비결을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할 수 있습니다. 4절 말씀입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바울은 ‘주 안에’, ‘그리스도 안에’라는 표현을 정말 많이 사용합니다. 바울 서신에서 160회 정도 이 표현이 등장합니다. 바울은 자신을 소개할 때도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 어떤 직책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실이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말은 어떤 의미일까요? 그리스도와 생명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요한복음 15장의 포도나무 비유가 이 사실을 잘 설명해 줍니다. 거기에 보면, 가지가 열매를 맺는 비결은 나무에 붙어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합니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어서 열매를 맺는 것처럼, 우리가 구원을 얻으려면 주님과 연합을 이루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리스도와 연합을 이룰 수 있을까요? 요한복음 14장 20절입니다. ‘그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그날은 오순절 성령께서 강림하시는 날입니다. 성령이 오시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사실이 믿어집니다. 성령이 오시면, 나는 죄에 대하여 죽은 자요, 하나님에 대하여 산 자임이 믿어집니다. 그리고 성령이 오시면, 말씀에 순종하고 싶은 열망이 인생의 유일한 목표가 됩니다. 이러한 일들이 여러분 안에 일어났습니까? 다시 묻습니다. 여러분은 성령을 통해 그리스도와 연합했습니까? 여러분이 구원받은 자녀라면 여기에 분명히 답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주 안에 있을 때, 일어나는 일 하나 더 말씀드립니다. 찬송가 438장 ‘내 영혼이 은총 입어’라는 곡이 있습니다. ‘내 영혼이 은총 입어 중한 죄 짐 벗고 보니, 슬픔 많은 이 세상도 천국으로 화하도다. 주의 얼굴 뵙기 전에 멀리 뵈던 하늘나라, 내 맘속에 이뤄지니 날로 날로 새롭도다. 높은 산이 거친 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 할렐루야 찬양하세. 내 모든 죄 사함 받고 주 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디나 하늘나라.’ 우리가 예수를 믿을 때 일어나는 많은 일 중에 이것은 분명히 경험되어져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주님과 함께하는 모든 공간이 하늘나라로 바뀌는 것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까닭은 우리가 ‘주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온 우주보다 크신 분입니다.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그 어떤 공간도 주님을 다 담아내지 못합니다. 그만큼 크신 분입니다. 그 크신 분 안에 우리가 속해 있는 까닭에 ‘그 어디나 하늘나라’를 고백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 바울의 사정을 보십시오. 바울은 감옥 속에 있습니다. 그런데도 감옥 안에 있다 하지 않고, 주 안에 있다고 고백합니다. 감옥보다 크신 주님, 감옥 안에도 충만히 임재해 계신 주님을 경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도 다양한 감옥에 갇힌 채 살아갑니다. 가난의 감옥, 질병의 감옥, 관계의 감옥이 우리를 옥죄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주 안에 있다면, 그 어떤 것도 우리를 가둘 수 없음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주 안에 거하십시오. 이것이 항상 기뻐할 수 있는 비결입니다.
둘째, 주님의 때를 기다리며, 항상 기뻐할 수 있습니다. 5절입니다.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이 말에 주목하시길 바랍니다. 이 말에 따르면, 그리스도인은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사람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인이 기뻐하는 근거는 주님께서 다시 오신다는 믿음에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정말 그렇습니까? 주님이 정말 빨리 오시면 좋겠습니까? 아마 내일 당장 주님이 오신다고 한다면, 두 팔을 걷어붙이고 말리실 분이 꽤 많을 겁니다. 나는 결혼도 해야 하고요, 주식도 올라야 하고요, 휴가도 가야 하고요. 그래서 오시더라도 좀 천천히 오시라고 말할 겁니다. 하지만 바울 당시에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정말로 주님의 재림을 사모했습니다. 주님이 빨리 오셔야 시련을 끝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당시의 인사는 이러했습니다. ‘마라나타,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이 인사를 주고받으면서 서로 위로하고, 믿음을 다졌던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도 ‘주님이 다시 오십니다.’ 이 인사말에서 기쁨을 찾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이 말을 꼭 마지막 날의 재림으로 한정 지을 필요는 없습니다. 주님은 지금도 우리에게 오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시편 126편 4~6절입니다. ‘여호와여 우리의 포로를 남방 시내들 같이 돌려 보내소서.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농부는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립니다. 올해 농사가 어떻게 될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가나안 땅은 10월이 되면, 이른 비가 내리기 시작하고 그때 씨를 뿌립니다. 그리고 이듬해 4월에 늦은 비가 내릴 때 수확합니다. 이른 비와 늦은 비가 충분히 내려 주지 않으면 일 년 농사를 망치게 됩니다. 그래서 농부는 하늘의 은총에 기댈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기도합니다. ‘여호와여 우리의 포로를 남방 시내들같이 돌려보내소서.’ 지금 농부는 바벨론 포로들이 돌아온 일을 떠올리며 기도합니다. 여기에 남방 시내라는 장소가 소개됩니다. 이곳은 Wadi라고 부르는 독특한 지형을 말합니다. 이 지형은 평소에는 바짝 말라 있다가 비가 내리면 갑자기 범람하는 특징을 갖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포로들이 바벨론에서 풀려난 사건도 이와 같았습니다. 포로 생활 70년 동안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징조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모두가 체념하고 포기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하나님의 시간이 역사를 뚫고 내려오셔서 이스라엘의 운명을 바꾸어 놓으셨습니다. 참으로 불가항력의 사건이었습니다. 지금 농부는 이런 역사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이 땅이 바짝 말라 있지만, 하나님이 역사하시면 기쁨으로 단을 거둘 수 있으리라 믿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 교우들에게서 농부의 심정을 엿봅니다. 정말 눈물로 기도의 씨를 뿌리고 계십니다. 열심히 씨를 뿌리지만, 싹을 틔우지 못하고, 여전히 씨앗으로 남아 있는 기도도 많습니다. 그러면 또다시 눈물을 머금고 뿌립니다. 그것이 제 마음을 늘 안타깝게 만듭니다. 그러나 그분들에게 이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기쁨으로 단을 거둘 때가 분명 옵니다. 남방 시내가 갑자기 차오르는 것처럼, 오순절 날 성령이 홀연히 하늘로부터 임하신 것처럼, 하나님의 시간은 반드시 찾아옵니다. 그때까지 여러분의 눈물이 마르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때까지 씨 뿌리는 수고를 포기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여러분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이 사실에서 기쁨의 이유를 찾으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여러분의 운명을 바꾸시고, 역사의 물줄기를 돌려놓으실 것입니다.
셋째, 항상 기뻐하는 비결은 관용을 베푸는 데에 있습니다. 5절입니다.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주님의 재림을 소망하는 사람에게 한 가지 특징이 있는데, 그것은 관용을 베풀 줄 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당연한 까닭은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자는 이 땅의 사사로운 것에 매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내 안의 기쁨을 방해하는 요소가 관계에서 많이 발생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빌립보서 4장 도입부를 보면, 바울은 유오디아와 순두게 두 사람을 권면합니다. 이 사람들은 빌립보 교회의 지도자였을 겁니다. 그런데 어떤 이유로 서로 갈등을 빚게 되었고, 이 때문에 교회는 기쁨을 상실하게 되었을 겁니다. 그래서 바울은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고 권면했습니다. 이처럼 관계가 불편하면, 모두의 기쁨이 방해받게 됩니다.
야고보서 5장 9절입니다.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 이 구절도 재림을 기다리는 사람은 서로 원망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원망은 관계를 파괴합니다. 인간의 가장 뿌리 깊은 죄 가운데 하나가 원망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따 먹은 뒤에 하나님이 추궁하시자 서로 원망하기에 바빴습니다. 아담은 하와를 원망했고, 하와는 뱀을 원망했습니다. 결국 이 원망은 하나님을 향했습니다. 하나님이 선악과를 만들었고, 뱀을 만들었기 때문에, 유혹에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는 변명을 하고 싶었던 겁니다. 그렇게 원망하는 순간 하나님과 사람 간의 관계, 사람과 사람 간의 관계, 사람과 자연과의 관계 모두 파괴되고 말았습니다. 원망을 품고 있다는 것은 관용의 마음이 부족하다는 뜻입니다.
얼마 전 한국의 어느 프로그램을 보다가 범죄 심리학자의 말을 들었습니다. 한국은 층간소음 문제가 꽤 심각합니다. 그래서 층간소음에 관련된 범죄가 많이 발생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의 말에 따르면, 층간소음 범죄의 진짜 원인은 층간소음이 아니라고 합니다. 관계성이 문제라고 합니다. 이웃과 좋은 관계로 맺어져 있다면, 소음이 그렇게 거슬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마치 시끄러운 장소에서도 내가 좋아하는 사람과는 어렵지 않게 대화가 가능한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층간소음을 해결하는 것이 급선무가 아니라 관계를 회복하는 일이 우선이라고 말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저의 경험이 떠올랐습니다. 저는 결혼하고 반지하에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밤에 자려고 누우면, 위층에서 뛰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매일 밤 소리가 들리니까 너무 괴로워서 하루는 그 집을 찾아갔습니다. 젊은 부부가 나와서 연신 죄송하다며 고개를 숙였습니다. 그런데 엄마의 다리를 붙들고 서 있는 한 아이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 순간 도리어 제가 미안해졌습니다. 그 아이는 자폐아였습니다. 저는 충분히 이해한다고 말씀드리고 내려왔습니다. 물론 그 뒤에도 아이가 뛰는 소리는 계속 들렸습니다. 하지만 그날 후로는 원망보다 이해하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나는 고작 소음 때문에 괴롭지만, 저 부모는 하루 종일 얼마나 고단할까. 이렇게 생각하니까 소음이 거슬리지 않았고, 내 마음의 기쁨을 빼앗기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항상 기쁨을 유지하려면 관용해야 합니다. 관용의 마음이 없다면, 불평과 원망은 끊이지 않을 것이고, 기쁨도 덩달아 사라져 버릴 것입니다. 상대방을 용납하십시오. 용납은 내 어깨에 짐을 지운다는 뜻입니다. 용납은 타인의 고충을 단순히 이해하는 차원을 넘어서 그의 어려움을 함께 나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용납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어깨에 우리의 십자가를 대신 짊어지셨습니다. 히브리서 12장 2절입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주님은 자기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셨습니다. 십자가를 참으신 결과, 영원한 기쁨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예수님의 모습은 십자가를 참는 것입니다. 특히 타인의 십자가를 대신 짊어지는 것입니다. 그때 말할 수 없는 기쁨이 내 안에서 솟아날 것입니다. 여러분의 기쁨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라도 십자가를 참으십시오. 서로를 원망하지 말고 용납하십시오. 특히 내 곁에 있는 교우들끼리, 그리고 가족 구성원끼리 그렇게 하십시오.
이제 6절과 7절을 읽습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우리 안에 있는 기쁨을 빼앗길까 봐 염려하지 말라고 합니다. 대신 기도하라고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신다고 합니다. 구체적으로 무엇을 지켜주실까요? 주 안에서 기뻐하는 믿음, 주님의 때를 기다리며 기뻐하는 믿음, 그리고 관용을 베풀며 기뻐하는 믿음입니다. 이 믿음이 내 안에 늘 자리할 수 있도록 마음과 생각을 지켜주십니다. 이 은혜가 여러분과 함께 하길 간절히 바랍니다.
끝으로 설교를 마무리하면서 한 가지 더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항상 기뻐하려면 앞서 언급한 세 가지도 중요하지만, 어쩌면 이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스바냐 3장 17절입니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누군가로부터 칭찬을 받거나, 나의 가치를 인정받는다면, 당연히 기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나를 인정해 주신다면, 어떠실 것 같습니까? 그 기쁨이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일 것입니다. 이 구절은 하나님의 사랑 고백입니다. 그런데 그 대상은 패역한 유다 백성입니다. 그래서 스바냐서 앞부분을 보면, 하나님의 심판이 무섭게 그려집니다. 그리고 그 이후에 이 사랑 고백이 나왔습니다. 무슨 뜻일까요? 너를 향한 사랑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말입니다. 이 말에 유다 백성은 힘과 위로와 소망을 얻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이토록 척박한 세상을 버틸 수 있는 힘은 우리가 하나님께 기쁨의 대상이라는 사실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사랑하고, 기뻐하고 계심을 믿으십시오. 그리고 이 사실을 근거로 날마다 기뻐하며 살아가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