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복음을 전할 용기_사도행전 14:1-7
삶의자리교회 박완희 목사
우리 교회가 섬기는 리튼의 원주민 마을은 이곳에서 약 250km정도 떨어져 있습니다. 원주민 마을에서 주일예배를 드리러 갈 때면 꼬박 달려야 하는 거리가 그 정도인 거지요. 여름 사역을 할 때, 주로 숙소로 이용하는 모텔이 있는 보스톤바 까지는 어떤 길을 타고 달리느냐에 따라 다르지만, 180km에서 200km 정도가 됩니다.
자동차로는 리튼까지 세 시간, 보스톤 바까지 두시간 반 정도를 꼬박 달려야 하는 거리 입니다. 걸어가면 얼마나 걸릴까? 구글맵으로 살펴봤습니다. 여기서 보스톤바까지 걸으면 꼬박 54시간이 걸리더군요. 쉬지 않고 54시간이면 이틀을 조금 넘기는 시간입니다.
먹을 것 먹고, 쉴 것 쉬고, 잠도 자고, 그렇게 할 12시간씩 걷는다면 4~5일을 걸어야 도착할 수 있는 셈입니다. 가는 길은 평지도 있지만 산을 넘어야 합니다. 호프에서 예일이라는 지역으로 갈 때, 험준한 산을 굽이굽이 넘어야 하지요.예일을 지나서 보스톤바에 이르는 길은 계속 산입니다. 만약 누가 제게 “걸어가라”고 한다면, 저는 과연 해낼 수 있을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생각 할수록 아득하고 까마득한 마음만 가득해졌습니다.
오늘 본문을 묵상하면서 “만약 내가 바울이었다면?” 하고 생각해보며 아찔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도대체 어떻게 그 여행을 했던 걸까? 리튼으로 선교하러 갈 때마다 걸어가야 한다면.. 나는 잘 해 낼 수 있을까? 그 비용은 또 얼마나 많이 들까? 시간은? 가져갈 수 있는게 뭐가 있을까?자동차가 있고, 길이 닦여 있고, 안전하게 다닐 수 있는 시대를 살고 있어서 참 다행이다 싶었습니다.
본문을 보면, 바울과 바나바는 이제 이고니온이라는 곳에 도착했습니다. 앞서 그들은 ‘비시디아 안디옥’이라는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발의 먼지를 떨어버리고’ 그곳을 떠났지요.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동남쪽으로 약 180km를 가면 나오는 도시가 바로 이고니온입니다. 우리 교회에서 ‘보스톤 바’ 까지 걷는 거리와 비슷합니다. 6일을 꼬박 걸어야 합니다. 그들이 높은 산맥을 넘고 넘어 끝없는 평야를 계속 걸어 그 먼 길을 걸어 도착한 그곳은 오늘날에 ‘코냐’라고 불리는 곳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자동차가 아니라 걸어서 가야 하는 여정은 상상하기 힘들지만, 바울 당시의 시대의 여행은 걷는 것이 기본이었습니다. 짐승을 타기도 하고, 배를 타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여행은 그냥 걷는 겁니다. 과거 우리 나라도 그랬잖아요. 그래서 전국을 돌며 장사하는 사람들의 봇짐에는 반드시 짚신이 여러 벌 있었고, 한 지역에서 다른 지역으로 건너가려면 며칠씩 여정을 잡아야만 했습니다.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이고니온으로 가는 길에는 산지도 있지만, 광활한 평야지대가 있습니다. 지금의 튀르키예 땅인 그곳에서 지금은 엄청난 양의 밀이 재배된다고 합니다. 온 튀르키예 사람들을 다 먹이고도 남는 양의 밀이 그곳에 있다고 합니다. 강도의 위험을 피해가며, 그만큼 넓은 땅을 걷고 또 걸어서 바울과 바나바는 이고니온에 닿을 수 있었습니다.
휴가로 여행을 떠나려면 여러가지가 필요할까요? 여행을 감당할 건강도 있어야 하고, 돈도 있어야 하고, 시간도 있어야 하고, 무엇보다 ‘그 여행을 감당할 마음’을 먹어야 합니다.
복음 전하는 일, 선교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한 여행도 마찬가지입니다. 맡겨진 사역을 감당할 수 있는 건강도 있어야 하고, 재정도 있어야 하고, 시간도 내야 합니다. 무엇보다 ‘그 모든 일을 감당할 용기’를 내야 하지요. 차로 달릴 수 있고, 아침에 떠나 밤에 돌아올 수 있는 곳으로 향할 때도 최소한의 ‘마음의 준비’는 있어야 합니다. 사도행전에 펼쳐지는 사도들과 바울의 전도여행의 이야기를 읽을 때마다 ‘도대체 어떻게 그 일들을 감당했을까?’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말이 쉬워 전도여행이지, 실상은 목숨을 걸고 산 넘고 바다 건너 도적때를 피해 노숙을 해가며 굶어가며 다녔던 그 여행이 ‘보통 용기’로는 감당할 수 없는 것이었으니까요.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성경을 읽으면서 ‘교회의 존재 목적’이 ‘잃어버린 영혼을 구원하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성도에게 주어진 사명이 ‘보내심을 받은 곳에서 예수님의 복음을 증거하는 것’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교회가 되겠다, 성도로 살겠다 다짐하고 결단했다면 용기가 필요한 거지요. 그런데 그 용기는 도대체 어디서 나올까요? “나는 예수를 믿습니다!”라는 고백에 책임을 지며 삶으로 살아낼 그 용기는 어디서 나오는 걸까요?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께서 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 안에 이미 일하고 계신 성령께서 결단하게 하시고 살게 하시는 줄 믿습니다. 그리고 내가 깨달아 알게 된 그 예수님의 복음이 우리로 하여금 선교할 용기, 성도로 살아갈 용기를 주시는 줄 믿습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이 모든 전도의 여정을 감당했던 것도, 우리가 세상 한 복판에서 성도로 살아갈 수 있는 것도, 우리 안에 계신 성령께서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우리를 통해 흘러가는 그 성령과 복음이 주시는 용기가 ‘잃어버린 영혼들’을 주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줄로 믿으시길 축복합니다.
오늘 본문 1절을 보면, 이고니온의 회당을 찾은 바울은 그곳에서도 ‘말’을합니다.
1 바울과 바나바는 이고니온에서도 이전과 마찬가지로, 유대 사람의 회당에 들어가서 말하였다. 그래서 유대 사람과 그리스 사람이 많이 믿게 되었다.무슨 말을 했을까요?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복음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복음을 전했을 겁니다.그리고 그 ‘말’의 결과로 그곳에서 사람들은 “많이 믿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바울의 전도여행을 통해 우리는 “복음에는 능력이 있고, 그 능력은 사람을 변화시키며, 변화된 사람의 말이 다시 사람을 변화시킨다”는 것을 확인하게 됩니다. 복음이 바울 자신을 변화 시켰고, 바울이 전한 복음이 많은 사람들을 주께로 돌아오게 했습니다. 저와 여러분의 삶을 통해서도 이러한 일들이 어어져가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저와 여러분의 말을 통해서도 많은 사람들이 믿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저와 여러분이 가는 곳곳마다 그러한 일들이 있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그런데, 그 모든 여정을 지나 복음을 전했고, 많은 사람이 믿게 되었는데, 그 좋은 일 뒤에 나쁜 일이 따라 옵니다. 2절 말씀을 보면, 사탄의 공격으로 유대 사람들은 이방 사람들을 선동했고, 그 결과로 사람들은 믿음을 가진 사람들에 대하여 ‘나쁜 감정’을 품게 되었음을 보게 됩니다. 2 그러나 마음을 돌이키지 않은 유대 사람들이 이방 사람들을 선동해서, 믿는 형제들에게 나쁜 감정을 품게 하였다.
이 ‘나쁜 일’을 한 사람은 “마음을 돌이키지 않은 유대 사람들”이었지만, 그 너머에는 누가 있었을까요? 사탄입니다. 사탄은 절대로 복음이 전해지는 것을 그냥 두고 보지 않습니다. 공격하고 방해합니다. 지난 주에도 살펴 본 것처럼, 시기와 질투를 불어 넣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방해하도록 열심을 내게 하고, 주변 사람들의 마음까지도 선동하여 나쁜 마음이 옮겨가게 만듭니다.
좋은 일만 가득해도 이어가기 힘든 전도 여행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면 얼마나 힘이 빠질까요?
그런데, 저는 여기서 바울과 바나바의 놀라운 모습을 보게 됩니다. 3절 말씀은 그들이 담대했다고, 그리고 놀라운 일을 행하였다고 기록합니다. 3 두 사도는 오랫동안 거기에 머물면서, 주님을 의지하여 담대하게 말하였다. 주님께서는 그들의 손으로 표징과 놀라운 일을 행하게 하셔서, 그들이 전하는 은혜의 말씀을 확증하여 주셨다.
두 사람은 나쁜 마음을 품은 사람들을 겁내지 않았습니다. 험악한 분위기, 미움을 받는 상황에서도 언제나 담대했습니다.사람들이 그러건 말건, 사탄이 공격을 하던 말던, 그들은 그곳에서 오랫동안 머물며 자신들이 해야 할 일을 했습니다. 그들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이었나요? “주님을 의지하여 담대하게”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는 일을 했던 거지요. 그리고 주님께서는 이렇게 맡겨진 사명을 따라 충성하는 그들을 그냥 두지 않으셨습니다.사도들을 통해 놀라운 일들이 벌어졌고, 능력을 행하는 두 사람이 전하는 예수님의 복음이 ‘믿어지게’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열심을 내면, 주님께서 도우십니다. 우리가 전하고 우리가 증거하면, 하나님께서 확증하십니다. 우리가 살아내고, 우리를 통해 예수님의 사랑이 흘러가면, 성령께서 영혼들의 마음을 만지십니다. 전도의 현장에서 우리는 이따금 “저 사람이 교회다니면 기적이다!”라는 이야기를 듣게 될 때가 있습니다.
심지어 교회 안에서도 “저 사람은 언제 변화될까?”하는 생각을 하기도 하지요.그렇게 멀게만 느껴지고, 높게만 보이는 철통같은 방어막을 쌓고 있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확증하실 때 믿게 될 줄로 믿습니다. 힘들고 어려워도 오랫동안 전도의 자리, 선교의 자리에 머물면서 우리의 할 일을 할 때, 하나님께서 도와 주십니다. “하나님 도와주세요!” 기도하며 바울과 바나바처럼 그렇게 “주님을 의지하여” 전할 때, 우리를 통해 닫혔던 마음이 열리게 됩니다. 하나님의 때가 있음을 기억하고 주변에 휘둘리지 않으며 “담대하게” 전하는 우리를 통해 잃어버린 영혼들이 돌아오게 되는 줄로 믿고 주신 사명 감당하는 우리가 되길 축복합니다.
그렇게 이고니온에서 많은 이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고, 사탄의 방해가 거세지면서 그 도시는 혼란해졌고 어지러워졌습니다. 정말로 그랬습니다. 4절 말씀을 보면, 그 도시가 반으로 나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4 그 도시 사람들은 두 편으로 나뉘어서, 더러는 유대 사람의 편을 들고, 더러는 사도의 편을 들었다. 참 아쉬운 일이지요. 모두가 예수를 믿게 되었으면 얼마나 좋았으련만, 그 도시는 두 편으로 갈라져버렸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통해 우리는 이 모든 일들이 ‘일어날 일’ 이었음을 보게 됩니다.(누가복음 2:34-35)
34 시므온이 그들을 축복한 뒤에, 아기의 어머니 마리아에게 말하였다. “보십시오, 이 아기는 이스라엘 가운데 많은 사람을 넘어지게도 하고 일어서게도 하려고 세우심을 받았으며, 비방 받는 표징이 되게 하려고 세우심을 받았습니다.
35 -그리고 칼이 당신의 마음을 찌를 것입니다.- 그리하여 많은 사람의 마음 속 생각들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누가복음 12:49)
49 “나는 세상에다가 불을 지르러 왔다.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바랄 것이 무엇이 더 있겠느냐?
(마태복음 10:34-36)
34 “너희는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려고 온 줄로 생각하지 말아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려고 왔다.
35 나는, 사람이 자기 아버지와 맞서게 하고, 딸이 자기 어머니와 맞서게 하고, 며느리가 자기 시어머니와 맞서게 하려고 왔다.
36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일 것이다
복음 앞에 세상이 갈라지는 일은 이미 예견되었고 일어날 일이었습니다. 이 모든 상황 가운데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그 도시의 절반은 유대 사람들의 선동에 넘어갔지만, 적어도 ‘그 큰 도시의 절반은 예수님의 복음,사도들의 편에 서게 되었다는 거지요. 비록 사탄의 방해, 유대인들의 시기와 선동 음모로 인해 도시는 반으로 분열되었지만, 그 와중에 이고니온이라는 큰 도시의 절반에 이르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음은 놀라운 사실입니다.‘믿지 않는 절반’ 때문에 낙심하기 보다는 ‘믿는 절반’을 기대하며 바라보며 복음 전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사탄의 공격은 그때나 지금이나 계속 될 겁니다. 믿지 못하게 하는 일도 계속 될 겁니다. 그러나 우리가 버티고 서서 복음을 전할 때, 우리를 통해서 믿는 자들이 세워진다는 것을 기억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소망합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당하는 고난은 점점 거세집니다.
5 그런데 이방 사람들과 유대 사람들이 그들의 관원들과 합세해서, 바울과 바나바를 모욕하고 돌로 쳐죽이려고 했다.
“돌로 쳐죽이려”는 상황이 벌어집니다.
이제 바울과 바나바는 이고니온을 떠납니다.
6 사도들은 그것을 알고, 루가오니아 지방에 있는 두 도시 루스드라와 더베와 그 근방으로 피하였다.
버티며 견디며 끝까지 복음을 전하던 그들이지만, 생명의 위협을 피해 루스드라 로 떠납니다.
왜요? 목숨이 아까워서? 아닙니다. 그들이 떠나가서 무얼 했는지를 보면 답을 알 수 있지요. 7절 말씀을 함께 볼까요? 7 그들은 거기에서도 줄곧 복음을 전하였다. 아직 그들의 사명이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사도행전의 기록으로만 봐도 3차 여행, 그 외에 알려진 4차 5차 여행도 있어요.
바울은 여전히 다녀야 할 곳이 많고, 그 모든 사명을 위해 이고니온을 떠났던 거지요.
사랑하는 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은혜를 입은 사람들입니다. 십자가 복음 앞에 서 있고, 내가 만난 예수님을 전하며 사는 성도들입니다. 여전히 험악한 세상 가운데 ‘성도’로 사는 것은 용기가 필요한 일입니다. 그리고 ‘복음 전도자’로 살아가는 삶은 더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지요. 때론 미움을 받고, 때론 오해를 받습니다. 그래서 때론 억울하고, 때론 힘들지요. 그러나 우리가 용기를 내서, 우리가 서 있어야 할 곳에 오래머물기로 작정하면, 하나님께서 놀라운 일을 행하십니다.
내 힘으로 하려하지 않고, “주님을 의지하여” 서 있을 때, 주님께서 내 손을 붙드시고 함께 하십니다.
아빠의 손을 꼭 붙잡고 있을 때, 어린아이는 그 어느 때보다 담대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 하나님의 손을 붙잡을 때, 저와 여러분도 세상 가운데 담대하게 설 수 있습니다. 어머니 품에 안긴 아이는 세상에서 가장 평안하고 행복한 순간을 누립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의 품 안에서 성령으로 충만한 저와 여러분은 삶의 모든 자리에서 평안하고 행복할 수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기특한 아이에게 부모가 상을 주는 것처럼, 애쓰고 힘쓰는 우리들에게 주님께서 표징과 놀라운 일을 허락하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복음을 전할 용기를 내시길 축복합니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세상에 여전히 가득한 복음이 필요한 사람들을 향해 나아갑시다. 사도 바울이 그 긴 여정 가운데에서도 변함없이 담대하고 위대한 걸음을 이어갔던 것처럼, 저와 여러분도 주님과 함께, 성령의 충만함으로 하나님 나라를 위한 예수의 길을 함께 걷기를 소망합니다.
복음을 전할 용기를 가지고, 주어진 삶의 시간 속에서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작은 한 걸음을 내딛는 저와 여러분을 통해 하나님께서 오늘도 영광 받으시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 이 모든 것을 믿고 ‘복음을 전할 용기’로 오늘 하루를 살아 내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