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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단상] 우시는 예수님(누가복음 19:41-44절)밴쿠버 영광교회 윤성은 목사

우시는 예수님_누가복음 19:41-44절

밴쿠버 영광교회 윤성은 목사

오늘 함께 읽은 말씀 41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셨다는 말씀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성은 예루살렘 성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우셨다는 기록은 복음서에서 두 번 등장하고 있습니다. 본문을 비롯하여서, 요한복음 11장에 35절에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라는 말씀과 함께 또 한번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한복음 11장은 마르다와 마리아의 오빠인 나사로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나사로는 예수님께서 친구라고 칭해주실 정도로 참으로 아끼고 사랑했던 사람이었던 거 같습니다. 그런데 그 나사로가 아프고 또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예수님께서 베다니 나사로의 집으로 가십니다. 11장 33절을 보니까, 예수님은 그곳에서 울고 있는 마르다와 마리아를 비롯해서 여러 사람들이 울고 있는 것을 보시며, 그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셨고, 그리고 35절에, 눈물을 흘리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그 눈물은 연약하여 질병앞에 고통당할 수밖에 없고, 죽음앞에 속수무책 당할 수 밖에 없는, 우리 인간의 그 아픔에 공감하시는 눈물이셨다고 생각됩니다. 

사실 예수님은 나사로가 다시 살아날 것을 알고 계시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지금 눈앞에 펼쳐진 고통과 아픔속에서 울고 있는 이들을 보면서, 예수님도 함께 울고 계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당하는 고통도 아픔도 불통도, 언젠가는 주님의 능력으로 다 해결이 되고, 나사로가 다시 살아나듯, 우리도 예수안에서 회복의 기쁨을 누리게 될줄로 믿습니다. 

그러나 지금 현재는 고통이 주어질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너무나도 감사한 것은, 주님은 우리의 지금 당하는 이 고통과 눈물을 전혀 외면하지 아니하시고, 그 고통에 함께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4장 15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우리의 연약함, 우리의 나약함을 보시고 마냥 타박하시는 분이 아니라, 공감해주시고 함께 울어주시는 분이라는 것이지요. 그러면서 4장 16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우리가 아무리 연약하고, 그래서 실수하고 넘어진다 하여도, 끝까지 포기하지 아니하시고, 우리를 긍휼히 여겨 주시고, 때를 따라 도와 주시는 주님 앞에, 담대히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될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복음서에는 바로 요한복음의 이 말씀과 함께 두 번 예수님께서 우셨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서신서의 말씀까지 확대해서 보면, 예수님은 한 번 더 통곡하시며 눈물을 흘리셨음을 확인해 볼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5장 7절에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하시기 전날,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는 장면을 묘사해주는 말씀입니다.  

누가복음 22장 42절로 44절을 보면, ‘이르시되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천사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더하더라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앞에 나사로의 죽음의 상황에서 흘리는 눈물은 다른 사람들의 고통과 아픔에 함께 하는 눈물이라면, 오늘 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흘리는 통곡과 눈물은, 내가 나의 상황을 두고 하나님과 대면하여 흘리는 눈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주님의 뜻이며, 주님께서 원하시는 길임을 알기에, 이 길을 걸어가는 것이 당연하다 하겠지만, 또한 이길을 걸어간 후에는 부활의 기쁨이 주어질 것을 알고는 있지만, 그러나 그리함에도 불구하고, 지금 당장 내 앞에 주어진 십자가의 고통, 아픔이 달가울 리가 없을 것입니다. 할수만 있으면 이길을 피해갈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셨을 것입니다. 

어쩌면 이것이 우리 모두의 마음일 거라 생각이 됩니다. 크고 좋은 것이 예비되어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얻기까지 통과해야할 고난이 너무나도 엄청나다고 하면, 고난 없이 지금 이대로 평안하게 그대로 갔으면 하는 바램이 누구에게나 있을 것입니다. 

저희는 요즘 새벽기도회 시간에 욥기서를 읽어가고 있는데, 욥기 마지막장에는 욥이 이전보다 갑절의 복을 받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또 이렇게 기도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 갑절의 복, 괜찮아요. 지금 이 상태로 너무 큰 어려움 없이 그냥 쭉 가고 싶어요.’ 여러분도 그런 생각해본 적 있지 않으신가요?

예수님은 바로 그 고뇌속에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내 뜻을 내려놓고, 아버지의 뜻대로 이루어지기를 원하는 바로 그 간구. 그렇게 간구하고, 또한 그 길을 가기 위해서는 더 큰 고통과 아픔과 십자가를 통과해야 하는데, 왜 눈물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통곡과 눈물을 흘리면서라도, 그 길을 함께 가자고 말씀하십니다. 내 뜻을 잠재우고, 아버지의 뜻을 따라가는 그 길을 같이 가자 하십니다. 곧 주님의 두 번째 눈물은, 내 뜻을 내려놓고 주님의 뜻을 따라가기를 결단하는 눈물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다시 오늘 본문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이미 보신 것처럼, 나사로의 죽음앞에서, 그리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눈물을 흘리신 예수님은, 오늘 말씀에 보니까, 예루살렘 성을 보시며 우셨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신약의 기록을 보면, 총 세 번 눈물을 흘리셨다고 말할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세 번의 눈물은 모두 감람산 근처에서, 그리고 예수님께서 이땅에서 공생애 사역을 마치실 즈음에 집중되어 있음을 보게 됩니다. 

굳이 차이를 이야기해본다면, 나사로의 죽음앞에서는 그냥 눈물만 흘리셨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겟세마네 동산에서는 통곡하시며 눈물을 흘리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예루살렘 성을 바라보시면서는 얼마만큼의 아픔으로 우셨을까요?

오늘 41절 말씀에서는 우셨다고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원어의 말씀으로 보니, ‘에클라우센’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데, 이 단어는 감정을 삭이며 소리죽여 우는 조용한 내적 슬픔이 아니라 자신의 그 슬픈 감정을 격렬한 비통으로 표출하여 애곡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가슴이 터질 것 같은 격렬한 괴로움을 영혼의 부르짖음 같은 통곡으로 표현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왜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을 보시면서, 그토록 격렬한 슬픔을 표현하시면서 눈물을 흘리셨을까요?

가장 먼저는 얼마 지나지 않아서 겪게 될 민족의 비극을 보셨기 때문이라 생각됩니다. 43절과 44절을 보면, 장차 이스라엘이 당하게 될 비극적 장면을 이처럼 예견하고 계십니다.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둔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예수님께서 이렇게 예견하신 때를 AD 30년경으로 본다고 하면, 정확하게 40년 후에 AD 70년에 예루살렘은 로마의 디도 장군이 이끄는 최정예 군대에 의해 완전 파괴가 되고 맙니다. 

예루살렘은 예수님께서 예언하신대로, 완전 포위가 되었고, 로마군대는 성 주위에 토성을 쌓고 예루살렘을 공격하였고, 결국 정말 성을 쌓은 돌위에 돌 하나도 남겨지지 않고 다 무너지고 말았고, 백만명이 넘는 이들이 죽임을 당하고, 수만명의 사람들이 포로로 잡혀가게 되었습니다. 요세푸스의 기록을 찾아보니까, ‘로마군에겐 더 이상 죽이거나 약탈할 사람들이 없었는데, 이들의 분노의 대상이 될만한 것들이 남는 게 없었기 때문이었다.’라고 기록하고 있고, 또한 예루살렘의 땅도 파헤치면서 누구도 어디가 어디였는지 알아볼수가 없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완전, 정말 완전히 파괴되고 말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렇게 유대인들은 나라를 잃고 전 세계로 흩어져 방황하는 삶을 살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사실을 바라보고 계시는 예수님은 통곡하지 않으실 수 없으셨을 것입니다. 택한 민족, 택한 백성이라고 자부하며 살았던 내 민족이 사라지게 될 거라는 것을 내다보신 예수님은 그 슬픔, 그 아픔을 주체할 수 없으셨던 것입니다. 

그런데요. 사실은 어쩌면 이것보다 주님의 마음을 더욱더 아프게 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평화를 살아갈 수 있는 기회를 외면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살길이 있는데, 기회가 있는데, 기회를 놓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42절에 이렇게 기록한다. ‘이르시되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뻔하였는데, 네가 지금 그것을 보지 못하고 있구나’ 하는 탄식의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여기에서 평화에 관한 일이라는 게 뭘까요? 주님은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면서, 예수님 자신이야말로 평화의 왕으로 이땅에 오셨다는 것을 보여주시었습니다. 그 답이 예수님께 있다는 것을 직접 보여주셨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고 따른다고 말하는 제자들을 비롯해서 거의 대부분의 무리들은 예수님을 왕이라고 말하기는 했지만, 내가 종처럼 부릴 수 있는 왕을 원하고 있었습니다. 내 꿈을 이루어줄, 마치 알라딘 램프에 나오는 지니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의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감람산 중턱에서 예루살렘성을 바라보시는 주님을 그려보는데, 그 장면과 오버랩이 되면서, 예수님께서 오늘 우리의 교회를 가만히 바라보시는 모습이 그려졌습니다. 과연 예수님의 얼굴에서는 흡족한 미소를 보여주실까? 아니면 2천년전 예루살렘 성을 바라보시면서 통곡하며 눈물을 흘리시듯, 울고 계시는 건 아닐까? 여러분, 예수님은 오늘 우리 교회를 바라보시면서 웃어주실거 같은가요? 아니면 눈물을 흘리실까요?

2천년전 예루살렘 성에는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말하는 사람들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나 같이만 신앙생활 해보라고 말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어디서고 만날 수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조상 대대로 믿어왔다고 말하는 사람들이었고, 열심을 다해 말씀을 보고 기도했고, 충성했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 예루살렘 성이 무너지게 될 것을 아시고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문제가 뭐였나요? 예루살렘 성안의 사람들이 믿는다고 하였지만, 정작 왕이신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했고, 평화의 왕으로 오신 주인을 알아보지 못했고, 그래서 왕으로 모시지를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주님은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들에게 이렇게 묻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오늘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섬긴다고 말하는 사람들로 가득찬 우리의 교회에 과연 예수님이 계신가? 예수님이 왕이신가? 예수님이 주인이신가?’를 묻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내가 평생 예수를 믿었습니다. 내가 평생 교회를 지켜왔습니다.’ 라고 말하는 우리들을 향해 묻고 계십니다. ‘지금 너의 주인은 누구인가?’

혹시 예수님이 아니고, 우리가 만들어 놓은 시스템이 주인되어 있는 것은 아닌지, 오랜 전통이 주인되어 있지는 않는지. 내 생각, 내 경험, 내 지식이 주인되어 있지는 않는지. 주님이 묻고 계십니다.

계속해서 주님께서는 44절 하반절에 이렇게 말씀하신다. 이러한 심판을 피할 수 없게 된 것은, ‘… 네가 보살핌 받는 날을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보살핌 받는 날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라 하십니다. 

보살핌 받는 날이라는 게 무엇일까요? 

자비로우신 하나님께서 돌보시고 보호하여 주시는 시간이라고 말할 수 있고, 혹은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기 위해서 찾아오시는 때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구원을 위해 예루살렘을 찾아오신 예수님의 방문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저는 이 말씀을 보면서, 이러한 보살핌을 받는 날은 곧 우리에게 주신 기회의 날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전히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은혜속에 있는 오늘이라는 날은, 하나님께서 우리 자신을 점검하고, 더욱 더 예수님 잘 믿으라고 주신 기회의 날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막연하게 내가 잘 믿고 있겠거니 생각하면서, 착각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 오실 때, 주님은 나를 구원의 자리에 세워주실까를 점검하면서, 나를 돌아보고 회개하며 정결하게 겸손하게 살아가라고 주신 날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정말 내 중심에 계신가? 나는 정말로 예수님을 주인삼고 살아가고 있는가를 점검하면서, 예수님께 더 가까이 더 가까이 나아가는 시간으로 삼으라고 주신 날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스스로 성령충만하다고 이야기하고, 예수를 잘 믿는다고 자신하는 고린도 교회를 향해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고린도후서 13장 5절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 받은 자니라’

제발 너희 자신을 좀 시험해보고, 너희가 믿음이 있는지, 예수님이 지금 너희 안에 계신지 점검해 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에 오늘 우리에게 주신 날을 보살핌 받는 날로 알지 못한다고 하면, 믿음도 없으면서, 제대로 예수님을 왕으로 섬기지도 못하면서, 내가 왕노릇하면서도, 오늘을 믿음있는척 착각하고 있다고 하면, 그 결과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을 보면서 심히 두려움이 느껴집니다. 오늘 주님 오실 때, 주님 흡족해 하실지, 눈물을 흘리실지. 

오늘 여러분 중심에 예수님이 계신가요? 예수님이 주인되어 계시나요? 우리의 교회는 예수님이 이끌어가고 계시나요? 

오늘 내가 늘 믿음안에 있는가 점검하고 회개하며 살고 계시나요? 옛날에, 왕년에 만났던 예수님 말고, 오늘 지금 현재 나에게 말씀하시는 예수님을 만나고 계시나요? 

오늘은 기회의 날입니다. 회개하는 날입니다. 은혜받는 날입니다. 고린도후서 6장 2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르시되 내가 은혜 베풀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에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오늘은 회개하기 좋은 날입니다. 오늘은 내가 믿음으로 살아가고 있는가를 점검할 수 있는 좋은 날입니다. 

오늘 우리가 믿음에 있는가 스스로를 점검하시되, 내가 주인되어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주인 삼은 것들 다 내려놓고 오직 예수님을 주인삼고 가고 있는가를 점검하고 회개하고, 그래서 주님 우리를 바라보실 때, 우리 교회를 바라보실 때, 흡족해 하시는, 바로 그 웃음을 안겨드리는 복된 성도, 복된 교회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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