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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단상] 하나님이 일 하시는 방법_출 2:1-10_코막스벨리한인교회 김범 목사

하나님이 일 하시는 방법_출 2:1-10

코막스벨리한인교회 김범 목사

레위 가족 사람이 가서 레위 여자에게 장가 들어  여자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니 그가 생긴 것을 보고 동안 그를 숨겼으나 숨길 없게 되매 그를 위하여 갈대 상자를 가져다가 역청 나무 진을 칠하고 아기를 거기 담아 나일 갈대 사이에 두고 그의 누이가 어떻게 되는지를 알려고 멀리 섰더니 바로 딸이 목욕하러 나일 강으로 내려오고 시녀들은 나일 가를 거닐 때에 그가 갈대 사이의 상자를 보고 시녀를 보내어 가져다가 열고 아기를 보니 아기가 우는지라 그가 그를 불쌍히 여겨 이르되 이는 히브리 사람의 아기로다 그의 누이가 바로 딸에게 이르되 내가 가서 당신을 위하여 히브리 여인 중에서 유모를 불러다가 아기에게 젖을 먹이게 하리이까 바로 딸이 그에게 이르되 가라 하매 소녀가 가서 아기의 어머니를 불러오니 바로 딸이 그에게 이르되 아기를 데려다가 나를 위하여 젖을 먹이라 내가 삯을 주리라 여인이 아기를 데려다가 젖을 먹이더니 아기가 자라매 바로 딸에게로 데려가니 그가 그의 아들이 되니라 그가 그의 이름을 모세 하여 이르되 이는 내가 그를 에서 건져내었음이라 하였더라

하나님께서 창 12장에서 아브라함을 부르시면서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십니다. 창세기 12장 2절에 하나님은내가 너로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라 고 아브람에게 약속해 주십니다. 그리고 창세기 15장에서 한번 더 그 언약을 확증하십니다.  창세기 15장의 언약, 우리는 아브라함의 언약이라고 하고 또 횃불 언약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불로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습니다. 그 하나는 아브라함의 씨로 민족을 이루겠다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창세기 15장 13-14절에서 주님이 말씀하십니다.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반드시 알라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동안 자손을 괴롭히리니 그들이 섬기는 나라 내가 징벌할지며 후에 자손이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애굽에서 종살이를 할 것이나 결국 나오게 될 것을 약속해 주십니다. 그리고 출애굽기는 아니 성경 전체를 통해 하나님께서 언약을 이루어 가는 과정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시대에 많은 사람들이 이런 질문을 합니다. ‘과연 하나님이 있다면 어떻게 이런 일들이 있을 수 있는가?’ 자연재해나 여러 사건 사고들, 그리고 사회적인 혼란 속에 우리는 과연 하나님이 있다면 어떻게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가 질문합니다. 특별히 국제정세가 불안하고 한국의 정치 상황이 극한의 대립으로 치닫는 요즘은 더욱 말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의 고통에 귀를 기울이시는 하나님이심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보면 하나님은 하나님의 방식으로 일하시는 하나님임을 알수있습니다. 인간의 머리로 따라가거나 판단할수 없는 일을 계획하시고 실행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나의 경험과 판단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안되지만 하나님은 하나님의 방법으로 일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방식과 완전히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은 언제나 완전하고 확실하십니다.  아무리 그래도 우리 편에서 보면 하나님께서 일 하실 때, 좀 자세하게 설명해 주시면 좋은데 우리 주님은 잘 설명을 안해주십니다. 그게 우리의 어려운 점 아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의 하나님이 좋으신 하나님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마태복음 7장 11절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알거든 하물며 하늘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고 말씀하십니다. 

좋은 것을 주시는 하나님이시라는 말입니다. 우리의 방식과 하나님의 방식이 참 거리가 있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우리가 이해하기 참 힘듭니다. 그런 상황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히브리서 11장 6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하나님은 좋으신 아버지이시고 우리는 그 좋으신 아버지 되신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 삶에 일 하시는 하나님은 어떤 방법으로 일 하실까요? 

첫째로, 우리의 고통을 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요셉이 죽고 새로운 왕조가 다스리게 된 이후 이스라엘 민족의 고통은 극심했습니다. 점점 불어가는 이스라엘 민족의 인구에 애굽은 점점더 가혹해져 갔습니다. 출애굽기 1장은 이렇게 마칩니다.그러므로 바로 그의 모든 백성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아들이 태어나거든 너희는 그를 나일 강에 던지고 딸이거든 살려두라 하였더라 

산파들이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행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전에 없던 고통의 시간을 보내야 했습니다. 오늘 본문의 주인공인 레위 지파의 아므람과 요게벳 부부도 심각한 문제에 봉착했습니다. 이들 부부만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온 이스라엘이 이 고통에 사로 잡혀 있었습니다.

하루하루가 지옥같은 삶이었습니다. 가족의 안녕을 위해 아들을 나일강에 수장 시켜야 했습니다. 오늘 본문의 아므람과 요게벳 부부를 포함해서 온 이스라엘에 드리운 고통이었습니다. 모세는 태어나면 죽어야 하는 존재였습니다. 모세 뿐 만이 아니었습니다.  온 이스라엘의 아들들은 태어나면 죽어야 했습니다. 그야말로 소망을 볼수 없는 암흑의 시기를 지나고 있었지습니다. 청년들이 취업만 어려워져도, 교육과정이 바뀌고 힘들어져도 우리는 소망이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아들을 나면 죽여야 하는 땅이었습니다. 희망을 말하고 소망을 말하는 것이 이미 사치 아니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되는 그들의 고통을 아시고 이미 일하고 계셨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요게벳이 아들을 나았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2절을 보니까 잘 생겼다고 했습니다. 그 아들을 얼마나 키우고 싶었겠습니까?? 그러니까 온 가족의 목숨을 담보로 3개월을 숨겨 키운 것 아니겠습니까? 아들을 키우고 싶은 마음과 사랑하는 가족들의 안전을 지키고 싶은 마음이 계속 충돌하지 않았겠습니까? 고통의 나날들이 이들의 삶을 완전히 뒤덮어서 이제 더이상 계속할 힘이 없어져 버렸지 않았겠습니까? 남편과 아내는 말하지 않아도 이 아이를 키울 수 없다는 것을 서로 알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절망의 끝에 소망을 발견합니다. 본문 4절에 보면 모세의 누이 미리암이 어떻게 되는지를 알려고멀리 섰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어떻게 되는지 알려고라는 히브리어 원어는아주 기대하고 바라보았다는 뜻을 품고 있습니다. 갑작스레 소망이 생긴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삶에도 삶의 마지막 소망의 끈조차 버려진 것 같은 고통의 순간이 올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이 선택한 하나님의 백성의 고통은 하나님이 알고 듣고 계십니다. 그리고 이미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일하시는 하나님이심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때로 우리의 인생이 절벽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도저히 뚫을 수도 넘을 수도 없는 벽을 만날때, 우리는 절망합니다. 그러나 기억합시다. 하나님은 우리를 향한 계획을 가지고 계시며, 우리의 고통을 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은 아무도 도와주는 이 없는 것같은 암흑을 지나는 것 같았지만 하나님은 일하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이 아신다는 것은 우리가 안다는 것과 다릅니다. 저는 허리가 아픕니다. 제 아내는 피로감이 있습니다. 서로 아픈줄은 알지만 실제 고통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아신다는 것은 내가 얼마나 아픈지, 답답한지 우울한지, 왜 절망하고 있는지, 그 절망이 얼마나 아픈지 생생히 아신다는 것입니다. 

팀켈러 목사는 이렇게 말합니다. 기독교는 하나님께서 고난을 받기 위해 땅에 오셨다고 주장하는 유일한 종교이다. 예수님은 우리의 고통을 너무 아신다. 배고픔, 슬픔, 고문, 추위, 미움, 배반, 죽음의 고통을 너무 아시는 분이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 모든 값을 치루신 것이다. 만약 당신이 고통을 받고 있다면, 저는 이유를 온전히 알지 못하지만,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 이유는 절대 아니라고 말씀드릴 있다. 왜냐하면 당신을 위해 그분이 고난을 당하셨기 때문이다.”

* 히브리서 4:15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하나님은 우리의 고통을 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둘째로 건져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모세는 갈대 상자에 넣어서 나일강에 띄워 졌습니다. 죽음의 자리에 버려 진 것이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거기에 딱 바로의 딸을 세워 두셨습니다. 그리고 그 바로의 딸의 손에 모세가 건짐을 받게 하셨습니다. 다른 히브리인이나 혹은 다른 애굽인에게 발견되었다면 바로 죽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세가 생명을 유지 할 뿐 아니라 가장 최상의 교육을 받으면서도 히브리인으로 자라기에 완벽한 조건을 만드시고 모세를 건지셨습니다. 

하나님은 건지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시편 37절로 19절에 우리 주님 말씀하시기를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그의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도다고 하셨습니다. 사실 모세는 강에 띄워지기 전에 이미 죽음의 강에 띄워진 사람이었습니다. 어떤 기업도 없는 레위 지파의 자녀였습니다. 레위는 야곱의 아들이죠? 그런데 야곱이 마지막 축복의 언급에서 저주를 받은 형제입니다. 여동생 디나를 겁탈한 세겜 족을 속이고 잔혹하게 죽이고 약탈을 합니다.(창 34)  창세기 49장 5-7절을 보면 이들 족속에게 야곱이 이렇게 기도합니다. 시므온 레위 형제 그들의 칼은 폭력의 도구로다 혼아 그들의 모의에 상관하지 말지어다 영광아 그들의 집회에 참여하지 말지어다 그들이 그들의 분노대로 사람을 죽이고 그들의 혈기대로 소의 발목 힘줄을 끊었음이로다 노여움이 혹독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요 분기가 맹렬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라 내가 그들을 야곱 중에서 나누며 이스라엘 중에서 흩으리로다

이런 레위지파가 하나님의 일을 하게 된 것은 나중에 출애굽을 하고 나서입니다. 금송아지를 만들어 섬기는 이스라엘 백성을 본 모세는 그들을 심판하기 위해서 자원자를 모집했습니다. 그때에 모세 앞에 자원자로 나선 사람들은 바로 레위 지파였습니다(출 32:26). 이때에 레위 지파 사람들은 우상 숭배의 악을 제거하기 위해서 허리에 칼을 차고 형제와 친구들을 죽이는 일을 해야 했습니다. 레위 지파가 어려운 결단을 내려 헌신함으로 우상 숭배를 주동한 주동자와 이에 함류한 사람들이 제거될 수 있었습니다. 이때에 레위 지파들은 형제와 친구를 죽여야만 하는 일에 헌신함으로 백성들 중에서 악을 제거했습니다. 그러므로 모세는 그들의 헌신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축복하실 것이라고 선언했습니다. 

신분이 좋은 신분이 아니다. 그리고 애굽 땅에서 법으로 죽어야 하는 신분이었습니다. 그에게 소망이 있겠습니까? 요게벳은요? 딸이길 바라고 기도하지 않았겠습니까?? 아들이 나왔습니다. 더이상 키울 수 없는 절망, 버려야 하는 죄책감이 그녀를 가득 덮었을 것입니다. 여러분 흑암과 같은 어둠에 어쩔수 없는 선택으로 갈대상자에 아들을 담아 강물에 띄웠지만, 하나님은 모세를 건지시고, 아므람과 요게벳을 건지시고, 그리고 이스라엘을 건지셨습니다. 

우리의 인생의 걸음도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고 하는데, 나는 여전히 죄인인 것 같고 삶의 변화는 커녕 점점 더 힘만 들어서 진짜 다 포기 하고 싶을 때가 우리에게도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의 고통을 아시고 가장 완벽하고 아름답게 건지시는 은혜의 하나님이십니다. 

이사야서 43장 1절로 3절은 말합니다.야곱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것이라 네가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대저 나는 여호와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요  구원자임이라 내가 애굽 너의 속량물로구스 스바 너를 대신하여 주었노라
 

우리는 모세처럼 죽음을 향하는 죄악의 길에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포기 하지 않으시고 그 아들을 보내어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모세가 종에서 왕자로 신분이 변한 것 처럼 저와 여러분을 바꾸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절대적 선택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지닌 새로운 신분이 된 것입니다. 모세는 처음부처 지도자로 멋진 금수저 물고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하나님의 선택이 있었고 하나님은 죽음에서 건져내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통해 이스라엘을 건지게 하는 놀라운 은혜를 배풀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을 건지셨습니다.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을 선택하셨다는 말입니다. 모세의 이름의 뜻이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 10절에 보니까 “건져냄을 받은 자” 입니다. 건짐을 받았을 뿐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에서 건지고 광야를 걷게 하는 주님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스스로 보기에 어떻다는 것은 이제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건지시고 사용하시면 놀라운 일이 일어 납니다.  이시대에 교회가 비록 약해 보이고 오그라 든 것 같아도 하나님은 이 교회들을 건지셔서 놀랍게 사용하실 것입니다. 

셋째로 소망으로 바꾸시는 하나님

오늘 본문인 출애굽기 2장은 하나님께서 절망을 소망으로 바꾸고 있습니다. 그것도 원수의 손으로 모세를 키우십니다. 자녀를 눈물로 버려야 했던 어미가 다시 아이에게 젖을 물리고 키우게 하셨습니다. 그야말로 놀라운 역사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역전의 명수이십니다. 이 장면을 시작으로 하나님의 구원사역이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됩니다. 엄마인 요게벳의 마음은 이미 죽었을 것입니다. 모세는요? 이미 태어나면서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었습니다.  모든 히브리인들 그누구도 피할수 없는 고통의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죽음의 자리를 소망의 자리가 되게 하셨고 건짐받은 모세를 통해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이어가십니다.

정망적인 상황이 요게벳과 모세를 나일강으로 가게 했습니다. 아들을 나일강에 띄워야 했습니다. 죽음의 자리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자리를 소망의 자리로 바꾸셨습니다.

십자가의 은혜가 그렇습니다. 저와 여러분 누구도 죄로 부터 자유한 사람은 없습니다. 로마서 3장 10절에 말하기를 기록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기록했습니다. 히브리서 9장 27절은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고 말합니다. 우리 모두는 죄의 결과로 죽음과 영원한 심판의 자리가 예약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 죽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영원 생명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갈라디아서 3정 13-14절은 말씀하시기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 받은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

여러분 십자가는 절망의 자리입니다. 또한 소망의 자리입니다. 죄인된 우리의 생명이 끝나고 하나님의 손길이 시작되는 자리입니다. 오늘도 주님은 주님의 백성들을 십자가의 자리로 부르십니다. 보혈의 강가에 우리의 삶의 고통, 죄의 고통, 우리 삶의 저주를 믿음으로 내려 놓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십자가 앞에 믿음으로 우리의 삶을 드리면 주님이 우리의 소망이 되어 주십니다. 

때로는 숨막히는 상황이 나를 죽음 같은 공포로 몰아 갑니다. 삶의 파도가 우리를 죽음과 같은 고통 속으로 우리를 몰아 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의 고통을 아시고 건지실 뿐만 아니라 그 고통의 자리를 소망의 자리로 바꾸시는 놀라우신 하나님이십니다. 예레미아 애가 3장 19절로 21절은 말하기를 마음이 그것을 기억하고 내가 낙심이 되오나 이것을 내가 마음에 담아 두었더니 그것이 오히려 나의 소망 되었사옴은고 말하고 있습니다. 십자가가 우리의 소망이고 하나님이 우리의 소망입니다. 시편 42편 11절은 절망의 상황에 외칩니다.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 두라 나는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우리는 하나님께 내려 놓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내가 붙들고 있어서는 하나님이 일하실 일이 생기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내려 놔야 합니다. 내가 하겠다고 붙들고 있었다면, 요게벳이 끝까지 아들 데리고 있었다면 과연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요? 때로는 상황에 순응하는 것이 내려놓음입니다. 모든 상황을 아시고 그 모든 상황에 일하시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시편 37편 5절로 6절에 말씀하시기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 의를  같이 나타내시며  공의 정오의  같이 하시리로다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시편 55편 22절도 말하기를 짐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가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원히 허락하지 아니하시리로다” 

신뢰함으로 하나님꼐 내어 맡기는 것입니다. 모세의 부모가 애라 모르겠다고 강에 집어 던진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바구니를 고르고 역청을 바르며 신중하고 신중하게 한발 한발 준비했습니다. 결국은 하나님을 신뢰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들의 손길위에 역사하셔서 결국 소망이 되게 하셨습니다. 

이들에게 닥친 시련은 너무나도 분명한 목적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바로 절망, 그리고 죽음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고통을 아시는 하나님은 우리를 건져내시고 고통을 소망으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십자가의 은혜입니다. 요게벳은 절망중에 하나님을 향한 소망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갈대상자에 역청을 바르고 또 나무 진을 발랐습니다. 살리실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포기의 손이 아니라 하나님께 맡기는 손이었습니다. 우리도 믿음으로 우리의 삶의 갈대상자를 십자가 보혈의 강에 띄웁시다. 그래서 날마다 우리를 하나님의 일하심을 경험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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