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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단상]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았느니라_누가복음 20:27-40_손동휘목사(런던한인교회)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았느니라” 누가복음 20:27-40

손동휘, 런던한인교회

약 15년 전에 방송에서 보았던 짠한 장면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김부랑 할머니께서는 당시 연세가 97세셨습니다. 6.25 전쟁 때 홀로 남쪽에 남겨둔 채 북으로 간 남편을 잊지 못해 시부모님을 모시고 1남 2녀를 키웠지만, 얼마전 북의 남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가뭄에 콩 나듯이 일어나다가 이제는 그 소식도 뜸한 당시의 이산가족 상봉에서 김부랑 할머니는 북으로 간 남편이 재혼해서 낳은 당시 65세가 되는 권오령 씨와 38세인 외손주 장진수 씨와 만나 많이 우셨습니다. 할머니께서는 노구의 몸을 구부린 채 북측 가족에서 술 한 병을 건네었습니다. “북으로 돌아가걸랑 남편 산소에 내 대신 술 한 잔이라도 부어주게나.” 사두개인들에 따르면 부활의 때에 할머니는 누구의 아내가 되시는 걸까요?

인생은 관계입니다. 청첩장과 부고를 받고, 참석여부를 결정하고, 봉투에 얼마의 돈을 넣을지는 모두 그 사람 혹은 그 가족과의 관계로 말미암아 결정됩니다. 그 사람과의 “사이”에 따라서 말이지요. 그 사람이 “당신”이 되면 나와 그 사람의 사이에는 생명이 꿈틀거립니다. 하지만 그 사람이 “그것”이 되면 나와 그 사이에는 죽음의 멈춤만이 남습니다. 의사와 환자, 종업원과 고객, 정치인과 유권자, 목사와 성도가 그것이 됩니다. 

사두개인들에게 본문의 여인은 “그것”이었습니다. 너무나도 불쌍하고 가련하여 기구한 운명을 산 여인이었지만 말입니다. 이 남편과 살다 아들을 낳지 못하다가 그 남편이 죽고, 저 남편과 살다가 아들을 낳지 못하여 그 남편이 죽고, 이것이 일곱 번이나 반복된 삶입니다. 사두개인들이 만들어 낸 이 가상의 이야기엔 죽음이 가득 차 있습니다. 온 세상에서 가장 친밀한 존재임이 마땅한 남편이 죽고, 그 다음도 죽고, 또 그 다음도 또 그 다음도 죽고, 그렇게 무려 일곱 번의 죽음을 겪은 여인입니다. 죽음만 가득한 그녀 삶을 따뜻하게 돌아볼 자식 하나 없는 여인입니다. 그런데도 사두개인들의 마음에는 연민이 조금도 보이지 않습니다. 심지어 현세의 고통을 내세에서조차 덧씌웁니다. 그들의 마음에는 오직 죽음만 가득 차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가상의 이야기일지라도 예수께 이 여인은 “그것”이 아닌 “당신”이었습니다. 그녀는 예수께 살아 있는 존재였습니다. 그리고 죽음만 남은 겨울 같은 인생에 부활 생명의 봄 호흡을 불어 넣으십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았느니라 (38절)

성경은 굳은 마음을 “경화증”을 뜻하는 헬라어 “스클레로카르디아”라고 씁니다. “단단하다”인 스클레로스와 “마음/심장”인 카르디아의 합성어입니다. 동맥경화, 간경화 등 내면의 조직이 딱딱하게 변하는 심각한 질병입니다. 육체도 그렇지만 마음이 완악하게 딱딱해지면 죽습니다. 내 마음이 딱딱하게 굳으면 타인 역시 죽은 존재로 여기게 마련입니다. 

90년대 르완다에서는 지배층 후투족이 피지배층 투치족 100만명을 학살했습니다. 길목마다 설치된 검문소에서 신분증을 확인하여 투치족이면 중국에서 수입한 개당 50센트짜리 칼로 목을 쳐서 죽였습니다. 그러다 도망을 하면 “인옌지”가 도망간다며 쫓아가 잡아서 죽였습니다. “인옌지”는 르완다어로 “바퀴벌레”입니다. 나치 독일은 유대인과 장애인을 “언터멘쉬” 즉 “하등 인간”으로 부르거나, 유대인이 해충이니 해충을 박멸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식민지 시대에는 아프리카와 아메리카/캐나다 원주민을 “야만인” 혹은 “짐승”으로 불렀고, 일제강점기 때 일본제국주의는 조선인을 “미개한 종족” 혹은 “소작용 동물”로 비하했습니다. 미국 노예 시대 때는 흑인을 “상품” 혹은 “소유물” 혹은 “생산도구”로 불렀고, 유고 내전과 캄보디아 킬링필드에서는 사회의 오물을 “청소”한다고 했습니다. 

이런 극단적인 예가 저와 여러분의 일상과는 큰 상관이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한국인의 경우, 매우 싫어하는 사람을 지칭할 때에는 그 사람을 사람으로 부르지 않고 동물이나 오물 등으로 부르기도 합니다. 미움이 마음을 지배하면 다른 사람이 더이상 사람이 아닌 존재가 됩니다. 

하지만 딱딱하게 굳은 죽음의 마음에 생명의 생기를 불어넣는 것이 바로 부활입니다. 우리 영혼을 둘러싼 죽음의 껍데기를 뚫고 올라오는 생명의 힘 부활입니다. 마치 딱딱한 바위 덩어리를 뚫고 하늘을 향해 손을 뻗는 것처럼 솟아오르는, 연약해 보이지만 결코 연약하지 않은 풀 같은 힘이 부활의 능력입니다. 부활의 예수께서 오늘 본문에서 저와 여러분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았느니라 (38절)

여러분은 부활의 자녀입니다. 주님께 여러분은 언제나 살아있는 “당신”이요 “그대”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존귀한 딸이요 아들입니다. 여러분의 어떤 모습에도 불구하고 여러분은 하나님께 언제나 살아 있습니다. 

그리고 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진정으로 우리의 마음에 자리하고 있다면, 내가 주님께 그러하듯, 타인도 나에게 살아 있는 존귀한 자가 되어야 마땅합니다. 그 타인이 누구든지 그는 “그것”이 아니라 “당신”이요 “그대”여야 합니다. 부활의 새생명을 품은 이라면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아있듯이, 그 역시 타인을 향한 따뜻함과 온유함, 존중과 진실된 시선이 있어야 합니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는 안네 프랑크와 그녀의 가족이 나치 독일을 피하여 숨어 있었던 비밀 은신처가 박물관으로 남아 있습니다. 안네는 2년 동안 그곳에서 숨어 살면서 [안네의 일기]를 썼지만, 1944년에 가족과 함께 발각되어 강제수용소에 끌려가, 1945년 초 베르겐벨젠 수용소에서 15세의 나이로 사망합니다. 그런 그녀인데도, 그렇게 작은 소녀가 일기에 이런 말을 적어 놓았습니다. “1944년 7월 15일. 저는 모든 이 땅의 모든 고통에도 불구하고 사람의 마음은 여전히 선하다고 믿어요.” 고통과 증오와 폭력으로 얼룩진 세상의 중심에서조차 안네에게 세상의 사람들은 “그것”이 아닌 “당신”이요 “그대”로서 살아있었던 것입니다. 

부활의 동이 떠오르는 이 아침에,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찬양합니다. 그리고 저와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부활의 주님께 죽은 사람이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이 된 것을 감사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을 이 부활의 증인으로 세상에 보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에게 살아있듯이, 우리의 가족, 교인, 인종과 언어와 다양한 문화를 초월한 이웃들도 우리에게 살아있게 하라고 보내십니다. “나와 그것”만 남은 죽음의 무덤 이야기가 아니라 “나와 당신의 이야기” 그리고 “우리의 이야기”로 그렇게 부활 생명의 이야기를 삶에서 써 내려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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