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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단상] 뿌리가 바뀌면 열매가 달라진다(Healthy Roots produce healthy fruit)빌 4:1-9에드먼턴 온 교회 진성인 목사

뿌리가 바뀌면 열매가 달라진다(Healthy Roots produce healthy fruit)_빌 4:1-9

에드먼턴 온 교회 진성인 목사

냉면이 생각나는 여름입니다. 한 가지 질문을 드립니다. 냉면의 계란은 어떻게 놓아야 할까요? 보통 냉면을 맛있게 하고 냉면을 올릴 때 어떻게 올리시나요? 노란자를 위로? 아니면 흰자를 위로? 아마 개인과 가족 취향에 따라 다양할 것입니다. 냉면에 올리는 계란 하나에도 각자의 기호가 있습니다. 그러니 세상을 살면서 얼마나 다양하고 다른 점들을 경험하겠습니까?

한번은 소셜 미디어에 올라온 이미지 담긴 글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유명한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최후의 만찬이 알고 보면 대환장파티이며 말도 안 되는 조합의 열 두 제자들을 볼 수 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최후의 만찬에서의 장면은 예수님께서 그들 중 한 명이 자신을 팔 것이라 말씀하신 직후의 반응이라고 알려져 있지요. 이 그림을 잘 아시겠지만 그 이야기를 듣고 자세히 보시면 정말 리액션이 다양한 걸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실제로도 다 자기 성격과 상황대로 리액션 했을 거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이처럼 모두 다르고 개성이 뚜렷한 제자들과 함께 공생애를 보내셨다는 걸 생각하면 머리가 좀 어지럽습니다. 

그러면 이 이후에 예수님이 말씀하신대로 우리 죄를 대신 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 성령님이 임재하신 후에는 상황이 달라졌을까요? 놀랍게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후 제자들이 거듭나고 제자들의 제자들과 우리들까지도 나는 죽고 그리스도께서 주신 새 생명으로 살고 있지만 제자로부터 우리까지 성향이 바뀌지는 않았습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가 다 같은 성향으로 일하는 건 하나님의 디자인은 아닐 겁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공장 기계에서 찍어내듯 똑같은 제품처럼 만들지 않으셨죠. 그러니 죄와 죽음의 권세에서 자유케 되어 새 사람이 되었다고 해서 전혀 새로운 성향으로 살 필요는 없는 겁니다. 계란 노른자가 보이길 원하는 사람은 그 모습 그대로 흰자만 보이길 원하는 사람은 그 모습 그대로 머물면서 오직 그리스도를 본받아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로 서로 이해하고 채우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모두 다 똑같아질 필요도 없고 그럴 수도 없는 겁니다. 

오늘 말씀에서 바울은 유오디아와 순두게라는 여인들에게 권면합니다. 주님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고요. 성경에서 더 이상의 정보를 주지 않아서 유오디아와 순두게에 대해 더 자세히 알 수 있는 길은 없습니다. 여인이고 빌립보에 거주하던 바울의 동역자 중 한 사람으로 복음을 전하는 일에 바울과 함께 힘쓴 사람들입니다. 생명책에 그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는 바울의 표현을 볼 때 그리스도를 구주로 확실하게 영접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례적으로 교회 공동체가 공동으로 받는 편지인 빌립보서에 이 여인들의 이름을 언급했습니다. 

아마도 교회 공동체가 다 알 정도로 유력한 여성 지도자들인데 안타깝게도 모두가 알 정도로 뭔가 갈등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들을 통해 복음을 듣고 섬김을 받은 지체들은 얼마나 혼란스러웠을까요?

바울은 그들에게 “예수님 믿는다면서 뭐 하는 거냐”?고 책망하거나 추궁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정중하게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고 권면하면서 공동체 지체들에게도 이 여인들을 도와주라고 권면하고 있지요.

유오디아와 순두게가 누구인지 우리는 알 수 없지만 그 여인들은 결코 우리에게 낯설지 않습니다. 사실 우리가 교회 공동체에서 함께 힘써 섬기다 보면 우리 스스로가 유오디아와 순두게가 되기도 하고요. 우리 주변에서 어렵지 않게 유오디아와 순두게 같은 분들을 만나기도 합니다. 그들은 (혹은 우리는)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어 거듭났습니다.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었다고 자신있게 말할 만한 사람들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에 결코 게으르지 않고 애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왠일인지 마음이 맞지 않아서 잘 나가다가 불협화음이 생기는 지점이 있습니다. 열정과 열심이 많을수록 더합니다. 

‘냉면을 맛있게 해 놓고도 계란을 왜 저렇게 놓지?’ 라는 불만과 불신이 서로 간에 있을 수 있는 겁니다. 유오디아와 순두게의 이야기는 결코 오래된 성경 속 이야기나 역사 속의 옛날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오늘을 사는 우리의 이야기입니다. 

그럼 언제 어디서든 볼수도 있으니 그냥 어쩔 수 없지 하고 지나가면 될까요?

오늘 말씀을 보니 그러면 안 되는 거 같습니다. 믿는 지체들 간에도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 물론 그런 문제가 생겼다고 하나님의 구원이 취소되는 건 아닙니다. 그럴지라도, 이 문제는 그냥 유오디아와 순두게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공동체에 영향을 주는 것인만큼 바울은 확실하게 집고 넘어갑니다. 공동체에서 기쁨과 평안을 앗아가면 그리스도의 몸으로 건강하고 온전하게 복음을 전할 수 없고 세상에서 빛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공동으로 읽는 편지에 실명을 언급하며 같은 마음을 품으라고 말했죠. 공개적으로 망신주기도 아니고, 바울의 커뮤니케이션 스킬의 부족함 때문도 아닙니다. 믿는 우리 모두에게 언제나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이고, 이미 일어나서 기쁨과 평안에 타격을 주고 있기 때문에, 문제를 드러내 놓고 언급하며 주님의 방법으로 풀어가기 원했던 겁니다. 

어떤 면에서 바울 자신도 유오디아와 순두게 이슈를 피해갈 수는 없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특별한 동역자들이었습니다. 바나바는 예수님을 만난 후 아직 공식적으로 복음을 전하는 일을 감당하기에는 과거에 발목 잡혀 있던 바울을, 교회와 선교 필드로 끌어내 준 인물입니다. 그들은 행 13장에 나오는 대로 안디옥 교회에 임한 성령의 지시대로 세워져서 금식과 기도 가운데 안수하여 파송된 복음 전도자들이었습니다. 

1차 전도여행을 하며 복음을 거절하여 유대인들이 일삼은 반대와 핍박을 함께 감당하면서 협력하여 힘써 복음을 전했습니다. 돌에 맞아 죽을뻔한 위기들 가운데 가까스로 피하거나 겨우 건짐을 받았고 성령의 능력을 행하여 제우스와 헤르메쓰로 오해를 받기도 했죠. 전도한 곳에 세워진 교회에서 장로들을 임명하기도 했고, 여행을 다녀와 안디옥 교회에 선교 보고를 하며 하나님이 행하신 모든 일을 전하여 하나님께서 이방 선교의 문을 열어주신 것을 증언하였습니다. 나아가 예루살렘 공의회에 가서 하나님께서 이방 선교의 문을 여신 것을 용감하게 전하기도 했습니다. 

행 15:26에서 예루살렘 교회가 이방 지역 교회들에 보낸 편지에 바울과 바나바는 이렇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행 15:26 (새번역/NIV)바나바와 바울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해서 자기 목숨을 내놓은 사람들입니다. Men(Paul & Barnabas) who have risked their lives for the name of our Lord Jesus Christ.

이처럼 귀한 믿음의 리더들, 선교의 주역들도 2차 전도여행을 다시 가려고 할 때 1차에서 중도 이탈한 마가 요한을 데리고 가냐 마냐고 다투게 됩니다. 그것도 심하게요. 

결국 바울과 바나바는 갈라섭니다. 이후에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고향인 구브로(키프로스)로 간 다음 다시 성경에 등장하지 않았지만 전승에 따르면 그 곳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유대인들에게 돌에 맞아 죽은 걸로 전해집니다. 불화의 화근이 된 마가 요한은 이후 바울이 딤후 4:11에서 디모데에게 마가는 나의 일에 요긴한 사람(유익이 되는 사람)이라고 언급되었지만요.

예상컨대 요즘으로 치면 바울은 대문자 T였던 거 같아요. 눈에 보이는 과정과 결과대로 마가 요한을 전도여행에 데려갈 수 없다고 했고, 바나바는 F로서 마가요한의 어려움을 공감하면서 격려하여 지금은 보이지 않는 미래를 신뢰했던 거죠.   

때로 주의 일을 함께 하다가도 이런 일도 생깁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바울과 바나바는 둘 다 복음에는 한 마음이었다는 거예요. 그러다 보니 서로 다른 선택을 했지만 결국 복음에 힘쓰다 각자의 자리에서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고요. 다행이 복음 전도로 각자 지역으로 가서 한 공동체 안에서 분쟁이나 분열을 일으키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때로 어떤 관계에는 거리두기가 필요할 때가 있지만, 진정 그것이 “이도 저도 힘들다. 그냥 내가 떠나고 말지”라는 ‘나를 위한 선택’인지 아니면 어떻게든 복음과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차이를 인정하고 각각의 자리에서 힘쓰는 것인지 우리가 분명히 알고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바울은 복음을 위해 유오디아와 순두게에게 같은 마음이 되길 권면한 것은, 자신의 열정과 애씀이 아닌 하나님의 계획과 그 뜻에 집중하길 원했기 때문입니다. 내 중심의 열심이 아니라 빌 2:5에서 이미 강조했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섬기고 열심을 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공동체 안에서 같은 의견이 갈라지거나 일하는 방식, 시각의 차이가 있어 어려움을 겪기도 합니다. 내 경험과 판단이 더 나을 것이라는 확신이 강하면 교회를 위한다는 마음으로 더 고집하게 될 떄가 있습니다. 경험한 분들은 알겠지만 아무 기대도 없는 그 누군가가 아니라, 믿고 의지하는 교회 지체들 간에 어려움이 생기면 그만큼 마음이 무겁고 고민되는 게 없습니다. 밤에 잠이 안 오고, 숨도 안 쉬어지고, 슬프고 답답해서 마음에 기쁨과 평안이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예배를 드리러 오기도 힘들 때가 있죠.

그런데 특이한 점은 바울이 지금 이런 이야기를 하다가 난데없이 “항상 기뻐하라”고 말하는 겁니다. 그것도 두번 반복하여 강조하면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냥 듣기도 힘든 이야기를 하다보니 분위기가 쎄~할까봐 말을 돌리는 게 아닙니다. 

지금 기쁨과 평안을 잃고 마음이 갈라진 공동체 안에서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은 항상 기뻐하는 것이라고 알려 주는 것입니다 .지금 상황만 보면 기뻐하라는 것은 좀 억지스러운 일이죠. 주님을 위해서 최선을 다하다가 마음이 갈라지고 관계가 틀어져서 공동체가 힘겨운 데 기뻐하라니요?! 

편지를 쓰는 바울도 감옥에 갇혀 있고 공동체도 지금 빌3장에 나오듯이 유대주의자들로 인해서도 자꾸 복음의 본질이 흔들릴까 어렵고, 하나가 되어도 모자란 상황에서 여성 리더들 안에서도 관계적인 어려움이 불거져 힘든 데…기뻐하라니요?!!

그런데 바울은 그들에게만 기뻐하라고 하는 게 아니라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게 고난 중에 있는 스스로가 기쁨의 표현을 반복하면서 이 편지를 적는 중 편지를 읽는 빌립고보 교인들에게도 기뻐하라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기뻐할 수 있습니까? 바울이 말하는 기뻐할 수 있는 이유(기뻐해야 하는 이유) Reasons for Rejoicing는 이렇습니다. 

  1. 하나님이 기뻐하라고 명령하셨기 때문입니다. Because it is God’s command to rejoice.

빌 4:4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Rejoice in the Lord always. I will say it again: Rejoice!

우리는, 기쁨을 어쩔 수 없이 생기는 감정으로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기쁨은 우리가 어쩔수 없는 감정이 아니라 선택할 수 있는 믿음의 행동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기대되는 삶의 방식입니다. 

기쁨은 신앙의 결단이며, 복음에 뿌리를 둔 삶의 열매입니다. 갈 5:22-23에 나오는 성령의 열매에도 기쁨이 있지요.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모시고 성령이 임하여 그 인도와 다스림을 받는 사람들은 상황과 형편과 감정이 어떠하든지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떠하든지 모든 것을 주장하며 주관하시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할 만하거든 기뻐하면 어때? Would you please기뻐해줄래?‘가 아니라 “기뻐하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을 좀 더 보충하면 이렇습니다. “내가 너랑 함께 하잖아 기뻐해!”

우리가 잘 아는 찬양가사대로 하박국 선지자는 아무 것도 없어도 여호와로 인해 즐거워한다고 고백하였죠. 그것이 바로 하나님과 함께하는 기쁨을 통한 신앙 고백입니다. (합 3:17-18)

유명한 유튜버 중 ‘박 위’라는 분이 있습니다. 28세 나이에 추락사고로 하반신 마비가 된 분입니다. 그 충격으로 죽고 싶고 괴롭기도 했으나 지금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걷지 못하지만, 하나님은 나를 멈추게 하지 않으셨다.” “몸은 불편해졌지만, 내 마음은 더 자유로워졌다.” “감사는 상황이 아니라 믿음의 선택이다.” “나는 기뻐할 수 없었지만, 하나님 때문에 기뻐할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요즘 힘들고 어려우신가요? 먼저, 하나님의 위로와 도우심을 간구합니다. 그러나 이어 말합니다. 우리가 어떤 상황에 있든 기뻐하고 감사하세요! 이것은 우리를 향한 아버지의 뜻이며 명령입니다. 

사실 하나님의 명령이라는 것 만으로도 기쁨의 이유는 충분하지만 바울은 연약한 우리를 위해 좀 더 자세히 말해 주면서 쐐기를 박아줍니다. 

2.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이 지키고 채우시기 때문입니다. Because God, who surpasses all understanding, guards and fills us

기쁨을 위한 매직 워드 The Magic Word for Joy 가 있습니다. 바로 오늘 말씀1,2,4,7절에 반복해서 나오는 “주 안에 in the Lord”입니다.

1 …이와 같이 주 안에 서라 you should stand firm in the Lord.

2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 agree with each other in the Lord.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Rejoice in the Lord always

7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And the peace of God, which transcends all understanding, will guard your hearts and your minds in Christ Jesus.

우리를 중심으로 보고 느끼고 생각하고 말하며 행동하면 답이 없으니 기쁨도 없습니다. 그러나 어떤 상황이든 주님이 함께 하신다면, 나를 위해 목숨도 아끼지 않으며 전능하신 하나님, 모든 지각에 뛰어난 분이 하시는 데 기뻐하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주 안에 뿌리를 박으면 우리 삶의 열매는 달라집니다. 주안에 있으면 기뻐하지 않을 이유를 찾을 수가 없습니다. 온 세상의 주인인 하나님이 나를 위해 자기를 다 내어주셨고 그 무엇도 아끼지 않으시며 나를 동역자로 불러 주셨기 때문입니다.

  1. 믿음의 선생, 부모, 동역자를 허락하시기 때문입니다. Because God has given us mentors, parents, and partners in faith. 

주안에 있는 것만도 기쁘고 감사한 데 눈에 보이고 바로 옆에 있는 동역자들도 보내주시니 기뻐하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나랑 방법이나 관점이 다를 때 때로 당혹스럽지만 함께 협력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게 얼마나 감사합니까? 가족들도, 때로는 어쩌면 자주, 대하기 어렵고 힘겹습니다. 하지만 결정적인 위기의 순간이 오면 가족이 있어 다행이다 라고 느끼게 됩니다. 

바울은 옥중에 있는 것만도 힘들지만 빌립보 교회에서 문제적 소식이 들려와도 복음에 응답한 그들로 인해 기뻐했듯이, 우리도 어떤 상황이든 함께하는 한몸된 지체들이 있어 기쁘고 감사하면 좋겠습니다. 

퍼즐 조각이, “넌 왜 이렇게 튀어나왔니? 혹은 넌 왠 구멍이 났어? 모양이 왜 그래?”라고 서로 정죄하고 비방하면서 나만 잘 났다고 하면 답이 없지만, 서로 서로 내가 없는 것을 다른 조각을 통해 채우고 다른 사람에게 없는 부분을 내 조각으로 채우면서, 조각 조각을 맞추어 하나가 되면 아름다운 그림이 완성 되듯, 그리스도의 몸된 공동체가 “주 안에서!” 자기의 자리를 지키며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고 함께 하면 그 안에서 하나님 나라를 누리고 주신 사명을 넉넉히 감당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주님 안에 우리 뿌리를 박으면 우리 공동체의 관계와 삶의 질 그리고 열매가 달라집니다. 다른 점이 오히려 복이 되고 기쁨이 됩니다. 

이제 그리스도의 몸으로 부르심받은 우리 모두가 주님 안에서 뿌리를 박고 그 안에서 부르신 사명을 감당하며 하나가 될 때 우리가 가는 곳마다 귀한 주의 열매가 가득하고 풍성케 되길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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