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를 지켜주는 것(삼상 17:31~37)
다음세대 브릿지교회 김영웅 목사
일본에서 오노 지로라는 스시 장인은 ‘스키야바시 지로’라는 스시집을 운영하며 평생을 스시 하나로 세계적으로 유명해져서, 오바마가 일본을 방문했을 때 아베 총리가 이곳에서 대접을 했을 정도였답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스시를 배우고 연습해서 75년 동안 스시 하나의 외길을 걸어 정상의 위치에 서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도 또 다른 영역에서의 장인이 한 명 나옵니다. 바로 다윗입니다. 오노 지로와의 차이점은 그는 평생을 연습했으나 다윗은 굳이 평생을 연습하지 않아도 될 만큼 전투에 있어서 충분한 재능과 능력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 부분은 여러 가지 해석이 분분하여, 다윗이 어려서부터 양 떼를 지키려는 충성심으로 돌팔매를 열심히 연습해 맹수들과 맞서 싸웠다고 해석하기도 하고, 맹수를 잡는 순간에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능력이 임했다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두 가지 은혜
그러나 본문에 나온 내용만으로 보면 따로 무기를 들었다거나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사냥을 한 것이 아니라 맨손으로 맹수를 때려잡은 내용이 나옵니다. 인간이 아무리 많은 반복 훈련으로 힘을 기른다고 해도 근접전에서 맨손으로 맹수를 물리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다윗은 특정한 무기를 들고 있었다는 언급이 없고, 맹수(사자, 곰)를 쳐 죽였던 반복된 경험을 말하고 있습니다.
삼상 17:34~35 다윗이 사울에게 말하되 주의 종이 그의 아버지의 양을 지킬 때에 사자나 곰이 와서 양 떼에서 새끼를 움키면, 내가 따라가서 그것을 치고 그 입에서 새끼를 건져내었고, 그것이 일어나 나를 해하고자 하면 내가 그 수염을 잡고 그것을 쳐죽였나이다.
본문에서 ‘치고’라는 말은 히브리어 ‘나카’(נָכָה)로, 단순히 툭 치는 것이 아니라 강하게 타격하여 상하게 하고 제압하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다윗은 단지 방어적으로 맞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빠르게 달려가 공격했고, 사자의 수염을 붙잡고 근접전으로 싸워 이긴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생명을 지키기 위해 생존 본능으로 싸운 것이 아니라, 다윗이 자신 안에 있는 전투력과 근력을 믿고 의지적으로 맹수에게 다가가 싸움을 벌여 달려드는 맹수를 맨손으로 제압한 경험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물론 무기를 들었다고 하여도 결과는 비슷했을 것입니다.
이 말은 다윗이 전쟁터에서 골리앗과 맞섰을 때 우연히 용기를 내어 싸운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는 이미 반복해서 곰과 사자 같은 맹수들과의 싸움에서 이긴 경험을 바탕으로, 물멧돌이 빗나가도 맨손으로 골리앗을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확신은 단지 믿음의 감정이 아니라 자신 안에 있었던 초자연적인 힘과 전투력을 바탕으로 한, 평범한 일상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다윗은 들판에서 자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그런 힘을 가지고서 왜 조용히 들판에 머물렀을까요? 그는 이미 자신 안에 얼마나 강한 힘이 있는지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수도 없이 전쟁이 벌어지는 혼란 속에서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군대의 지휘관이 될 수도 있었고, 왕의 눈에 띄어 더 높은 자리에 올라갈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사람들 앞에 나가 단 한 번만 그의 힘을 보여주었다면 그는 더 이상 들판에서 외롭게 양을 치지 않아도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아무런 영광이 없는 단조롭고 외로운 양 떼를 지키는 일을 자원해서 택했습니다. 즉, 힘이 없어서 억지로 등을 떠밀려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힘이 있었기 때문에 자발적으로 들판을 지킬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진짜 강함의 표지는 가장 평범하고 단조로운 일상을 최고의 에너지와 정성으로 하루하루 살아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엘리야도 수년간 사르밧 과부의 집에서 그 가정을 돌보는 일을 묵묵히 수행했습니다. 또한 성경은 다윗의 삶에서 수많은 전쟁터에서 승리하는 영웅적인 모습보다는 목동 시절, 사울에게 쫓기던 시절 광야와 토굴 속에서 자신을 따르는 비천한 사람들을 돌보며, 사울에게 복수하지 않고 묵묵히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며 살아가는 모습을 더 주목하고 있습니다.
전에 섬기던 교회에 서울의 유명 대학병원 외과 의사 분이 계셨는데, 자녀가 네 명이나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의사로 살아가는 삶이 너무 바빠서 자녀들이 크는 모습을 볼 수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주변의 모든 반대를 무릅쓰고 자원하여 수술직에서 연구직 쪽으로 커리어를 전환하셨습니다. 이로 인해 월급도 줄고, 명예도 줄어들었지만 자녀들과 보낼 수 있는 시간은 더 늘어났습니다. 걱정스러운 눈초리로 바라보는 주변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다 대형병원 외과 의사라고 우러러본들, 정작 너무 바빠서 자녀들 커가는 모습도 볼 수 없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주일학교 교사로 지원하셔서 1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꾸준히 섬기고 계시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저는 그분이 진짜 강함이 어떤 것인지를 몸소 보여주셨다고 생각합니다.
오스왈드 챔버스의 말처럼 우리는 위기를 견디기 위해서는 때로는 자존심과 오기만으로도 충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매일 24시간을 단조롭고 평범한 일상에서 무시받는 상황 속에서 예수님의 제자로 꾸준히 살아가려면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은혜가 필요합니다. 이것이 다윗에게 있었던 두 번째 초자연적인 은혜였습니다. 첫 번째 초자연적 은혜는 맹수를 맨손으로 제압할 수 있을 만큼의 어마어마한 능력이었고, 두 번째 초자연적 은혜는 그 힘과 능력으로 전쟁터를 택하지 않고 들판에서 양 떼를 지키는 삶을 택한 것이 바로 초자연적인 은혜라고 생각합니다.
들판이 지켜준 사람들
이렇게 겸손하고 모든 삶의 기쁨과 의미를 자신의 가족, 민족, 나라를 돌보는 데 기울였던 다윗도, 거인 골리앗을 이기고 전쟁 영웅이 되어 국민적 인기가 최고에 이르고 “사울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삼상 18:7) 하는 칭찬을 받자, 들판에서 홀로 주님과 누리던 영적인 기쁨과 진정한 강함을 잃어버립니다. 어떻게 알 수 있느냐 하면, 다윗은 인생에 가장 중요한 순간마다 시를 썼습니다. 그러나 그가 쓴 모든 시편 중에 골리앗을 이긴 후 사람들의 관심과 사랑을 집중적으로 받던 시기에는 어떤 시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가 장인인 사울 왕에게 쫓기며 강제적으로 들판에 머물게 되었을 때, 다시 하나님을 향한 시들이 쏟아져 나옵니다(시 7, 34, 52, 54편 등). 그래서 다윗이 많은 실패와 고난을 경험하고 나서 쓴 시가 바로 시편 23편이며, 그 첫 구절에 “나는 힘이 있으니, 돈이 있으니, 왕의 사위가 되었으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하지 않고,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라고 고백합니다.
본문을 보면서 다윗이 믿음으로 그 외로운 들판을 홀로 지켰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사실은 그 들판에서 하나님께서 다윗을 만나 주시면서 보호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때로 예배에 참석하며 “예배를 드린다.” “예배를 보러 간다.”는 표현을 씁니다. 자칫 잘못하면 우리가 마치 하나님께 무엇인가를 드리러 가는 것 같은 착각을 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 정반대입니다. 우리가 예배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예배가 우리를 지켜주는 것입니다.
개척 교회를 섬기다 보면 여러 가지 힘든 일을 많이 경험하게 됩니다. 때로는 재정적인 어려움이나 예배 장소 문제로 인한 갈등, 사람들의 모욕이나 비웃음을 감수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이렇게까지 하면서 교회를 계속, 이 공동체를 지켜야 하나?” 하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많이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개척 교회 상태로 오랜 시간 광야 같은 들판을 지나 오면서 하나님께서 저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김 목사야! 너는 지금 네가 교회를 지키고 있다고 생각하니? 정신 차려라. 교회가 너를 지켜주고 있는 거야!”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도 예수님 때문에 굳이 가지 않아도 되는 외로운 들판에 홀로 서 계십니까? 다윗이 다윗 될 수 있었던 것은 사자나 곰을 때려 죽일 수 있는 초자연적 힘이 아니라, 양들의 배설물 냄새와 추위, 외로움, 미래가 보이지 않는 막막함 속에서도 잠잠히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며 걸어간 그의 초자연적인 선택 때문이었습니다. 타국 땅에서 이방인으로 살다 보면 힘들고 지칠 때가 많이 있습니다. 또한 지름길의 유혹도 많습니다. 그러나 그때에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좀 더 손해 보고,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고, 자원해서 가족과 이웃, 공동체를 섬길 수 있는 진정한 강인함이 여러분과 제 안에 임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