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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단상] 충성된 자_눅16:10~12_캘거리 초대교회 이현구 목사

충성된 자_눅16:10~12

캘거리 초대교회 이현구 목사

(눅16:10~12)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 너희가 만일 불의한 재물에 충성치 아니하면 누가 참된 것으로 너희에게 맡기겠느냐/ 너희가 만일 남의 것에 충성치 아니하면 누가 너희의 것을 너희에게 주겠느냐

어느 듯 2025년 한 해의 2/3가 다 지나가고 있습니다. 정말 시간이 빨리 지나감을 느끼게 됩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벌써” “어느새” “금방” 이라는 수식어와 함께 정말 빨리도 지나간 시간임을 피부로 느끼고 마음에 부담을 갖게 되지 않나요? 월요일이다 싶으면 어느새 주일이고, 매월 Rent fee나 Mortgage를 내는 날도 왜 그렇게 빨리 돌아오는지 모릅니다. 반면에 우리 자녀들을 보면 부쩍 부쩍 커 가고, 먹는 것도 나날이 달라지게 많이 먹고, 목소리도 변성되어 가는 것을 보며 세월이 참 빠르게 지나가는 것을 피부로 느끼게 됩니다.

우리 부모님들은 머리에 흰 머리카락이 늘어나는 것을 보면서 점점 늙어가고 있구나 하는 생각도 들 것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인생이 10대에는 10km 속도로 가고, 20대에는 20km 속도로 가고, 30대에는 30km로, 40대에는 40km로, 50대에는 50km로 간다고 말 합니다. 이것은 마치 똑같은 거리를 달려가는데 10대에는 스카이 콩콩을 타고 가고, 20대에는 퀵보드를, 30대에는 롤러 브레이드를, 40대에는 자전거, 50대에는 오토바이, 60대는 일반자동차, 70대는 스포츠카, 80대는 일반비행기, 90대는 제트비행기, 100세는 우주선을 타고 가는 것과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럼, 100세 넘어서는 어떻게 될까요? (주님을 만나고 있을 겁니다.) 이것은 아마도 각 세대마다 세월이 지나가는 것을 다르게 느낀다는 말이겠지만 40대까지는 자기의 힘을 의지하고 또 그 힘으로 가고 50대부터는 자기의 힘이 아닌 다른 힘을 의지하여 가기 때문에 그만큼 더 빨리 갈 수밖에 없는 것을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고 보니 우리는 정말 시간이 너무 빨리 지나가는 것을 경험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즘은 고민을 많이 합니다. ‘이러다가 어느 날 덜컹 주님을 만나게 되면 어떻게 되지?’ 하는 고민입니다.

주님이 저에게 “너는 세상에서 뭐하다 왔니?” 하고 물으신다면 갑자기 말문이 막히고 정말 뭐했는지 아무 생각도 안 나면 어떻게 하나? 하는 고민입니다. 물론 행위가 우리를 의롭게 만들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지만 그렇다고 “그냥 살다가 왔습니다.” 라고 대답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주님 내가 세상에 있을 때 주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하여 이렇게 애쓰며 살았습니다.” 라고 고백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2025년의 지난 9개월간을 돌아보고 또 앞으로 가야 할 남겨진 3개월을 바라보면서 주님 앞에서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해 보았으면 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충성’에 대한 주제를 담고 있습니다. 충성이라는 말은 왠지 듣기만 하여도 부담이 됩니다.  그래서 조금은 ‘부담스러운 충성’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무엇보다도 무엇이 충성인지 또 어떻게 해야 충성을 하는 것인지 잘 모르기 때문에 그리고 그동안 ‘충성된 사람’의 모델을 별로 못 보고 살았기 때문에 우리는 충성에 대하여 애매모호한 부담을 갖고 있습니다. ‘무조건 열심히만 하면 충성된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그래서 충성이란 말은 왠지 부담스럽고, 정죄감도 생기고, 피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말이기도 합니다. 

忠誠을 한자로 쓰면 ‘마음의 중심에 맺는 말의 열매’ 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한글 사전에는 ‘참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정성’ 입니다. 영어로는 Faithfulness이라고 합니다. 믿음으로 꽉 찬 상태라는 것입니다. 어떤 믿음이겠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는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한자와 한글과 영어를 모두 합해서 생각해 보니 충성이라는 말은 ‘하나님 앞에서 말과 행동에 진실된 것’ 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잠언에서는 충성된 사람을 일컬어 얼음 냉수 같고,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케 하는 자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잠25:13) 충성된 사자는 그를 보낸 이에게 마치 추수하는 날에 얼음냉수 같아서 능히 그 주인의 마음을 시원케 하느니라 

그래서 우리는 이 부담스러운 충성의 문제를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같이 고민해 보고 싶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지식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왜냐하면 영적인 지식이 영적인 성장을 이룰 수 있도록 해 주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본문의 말씀에서 세 가지의 충성에 대하여 언급을 하고 계십니다. 첫 번째로 작은 것에 충성입니다.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 하니라)

작은 것이란 무엇을 의미합니까? 여러분에게는 무엇이 작은 것인가요? 정말 작은 것, 쉬운 것, 별것 아닌 것, 하찮게 보이는 것이 작은 것일까요? 작은 것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상대적인 것입니다. 어느 사람에게는 작은 것이 다른 사람에게는 큰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아주 크다고 여기는 것이 다른 사람에게는 아주 작은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제 막내 아들이 유치원생이었을 때는 돈 $100 보다는 초콜렛이 더 큰 것이었고 고급 레스토랑에서 스테이크를 먹는 것보다 맥도날드에서 프랜치 프라이를 먹는 것이 더 큰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작다고 하는 것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상대적인 것입니다. 결국 작은 것은 내가 작다고 여기는 그것입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작다고 여기십니까? 혹시 예배 시간을 약 5분~10분 정도 늦는 것을 괜찮은 것이라고 생각을 하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에게는 그것이 작은 일 인 것입니다. 프린트를 할 때 용지를 이면지로 해도 될 것을 온 용지로 한다면 그것 또한 작게 여기는 일일 것입니다. 화장실이 더러워져 있어도 무심코 지나친다면 그것이 바로 내가 작게 여기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교회에 불필요하게 켜져 있는 전등을 보면서도 별 감동(?)이 없고, 바닥에 널부러져 있는 주보가 눈에 들어와도 마음에 아무런 느낌이 없다면 그것이 바로 당신에게 작은 일입니다. 약속을 하고도 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지키지 않는다면 그것이 작은 것입니다. 남의 것을 빌리고도 돌려주지 않고 내 것으로 삼는다면 그것이 작은 것입니다. 묵상을 하지 않고도 아무런 부담 없이 하루를 살아간다면 그것이 작은 것입니다. 당신에게는 무엇이 작은 일입니까?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작은 일에 충성한 사람을 충성되다고 인정하십니다. 저의 큰 딸은 어릴 적부터 묵상을 꾸준하게 했습니다.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묵상을 가르쳤는데 대학생이 된 때에도 직장 생활을 하고 있는 지금도 묵상이 삶의 가장 우선되는 일과입니다. 묵상 노트가 매년 쌓입니다. 말씀에 충성된 것입니다. 고등학교 때는 학교 가는 시간이 늦어도 방에서 안 나옵니다. 묵상이 안 끝났기 때문입니다. 하루에 첫 시간을 말씀 앞에 머무는 것, 그것은 작은 일입니다. 그러나 그 작은 일에 충성하면 하나님이 인정을 해 주십니다.

세계지도를 방안에 붙여 놓습니다. 대학 기숙사에 가서도 그렇게 합니다. 그 이유는 전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위해 중보 기도하기 위해서입니다. 신문을 스크랩하여 지도에 붙여 놓고 기도합니다. 각도기의 각 1도는 아주 작습니다. 그래서 그 1도의 차이가 처음에는 별로 눈에 띄지 않습니다. 그러나 10m를 더 가고, 100m를 가고, 1km를 가고 100km를 더 가면 그 차이는 정말 놀랄 만큼 큰 격차로 벌어지게 됩니다. 작은 일이란 바로 이와 같은 것입니다. 

작은 일이지만 한번 시작한 일을 끝까지 지속하며 충성되게 행하는 사람은 결국 그 충성된 열매를 맛보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약속하신 것처럼 작은 일에 충성된 자에게 큰 것을 맡겨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작은 일에 충성되어 주님께서 큰 일을 맡겨 주신 것을 경험해 본 적이 있습니까? 그런 일들이 여러분에게 단 한번 또는 몇 번에 그치지 않고 인생의 전반에 걸쳐 일어나는 간증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는 재물에 충성입니다. (너희가 만일 불의한 재물에 충성치 아니하면 누가 참된 것으로 너희에게 주겠느냐) 주님은 재물을 ‘불의’하다고 말씀하십니다. 불의한 재물이란 ‘검은 돈’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재물에는 선악의 개념이 없습니다. 이것을 쓰는 사람이 악하거나 선하게 쓸 수가 있을 뿐입니다. 불의한 재물이란 재물 자체가 신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재물은 신뢰의 대상, 믿을 수 있는 대상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필요에 대한 공급의 원천은 재물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여러분이 재정을 어디서 공급을 받든지 그 근본적인 원천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직장에서 월급을 받아도 그것은 하나님께서 직장을 통해서 공급해 주시는 것이고, 비즈니스를 해서 돈을 벌어도 그 공급의 원천은 하나님이십니다. 만일 우리 자녀들이 부모님을 통해서 공급을 받는다 하더라도 그 공급의 원천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양한 통로를 통하여 우리에게 그 필요를 공급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믿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신뢰라는 것입니다. 재물은 우리에게 신뢰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할 때 우리는 재물로 인한 시험을 이길 수 있게 됩니다. 그런데 주님은 우리에게 그 재물에 충성하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재물에는 반드시 욕심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욕심 때문에 재물에 눈이 멀어 하나님께 죄를 짓기가 쉽습니다. 그러므로 불의한 재물일지라도 그것에 충성할 수 있는 사람이 하나님 나라의 재정을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재물을 하나님의 뜻에 맞게 관리하고 사용하라는 것입니다. 재정 사용에 있어서 하나님의 방법을 따라야 한다는 뜻입니다. 

여러분은 재정을 어떻게 공급을 받고 있습니까? 그리고 그 재정을 여러분은 어떻게 사용하고 있습니까?

이것이 충성에 대한 잣대가 된다고 말씀을 하십니다. 그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드리는 것’ 입니다. 재정의 가장 중요한 쓰임은 바로 하나님의 것을 구별하여 먼저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십일조를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것이므로 무조건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입이 생길 때마다 바로 그 순간에 십일조를 분명하게 떼어 놓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재정 중에서 가장 중요하게 하나님의 것을 구별하여 드리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이것이 선행되지 않는다면 다른 어떤 것(구제, 선행, 선교)을 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정말 잘 못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충성되지 않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것을 구별하여 드린 다음에는, 다른 재정을 규모에 맞게 예산을 짜고 절제하면서 사용을 하는 것입니다. 만일 지출을 제한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늘 재정이 부족함을 느끼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우리는 맘몬의 영에 사로 잡혀 잘못된 방향으로 인생이 끌려 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재정을 어떻게 쓰는가를 보면 그 사람의 영성이 어떠한지도 곧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특히 우리 자녀들이 결혼하기 전에 더욱 재정에 대한 바른 성경적인 가치관을 갖고 훈련되고 준비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여러분은 재정 사용을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어디에서 재정의 공급을 받고 있습니까? 먼저는 공급에서부터 투명하고 정직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재정을 적절하고 규모 있고 바르게 사용을 하고 있는지 점검을 해 보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지출에 대한 예산과 계획을 세우고 있습니까? 만일 그렇지 않다면 이제부터라도 재정에 대한 예산을 세우고 기록을 하면서 사용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한 달이 지난 후에 여러분이 쓴 재정 지출 목록을 보게 된다면 여러분의 영성이 어느 곳으로 흘러가고 있는지 한 눈에 바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은 재물에 충성된 자를 찾아 참된 것 곧 하늘나라의 좋은 것으로 맡기시고자 그런 사람을 부지런히 찾고 계십니다. 저와 여러분은 내게 주신 재정에 충성함으로 주님이 찾으시는 바로 그 한 사람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세 번째는 남의 것에 충성입니다. (너희가 만일 남의 것에 충성치 아니하면 누가 너희의 것을 너희에게 주겠느냐) 이 본문의 원래 의미는 결국 재물에 대한 얘기입니다. 즉 다른 사람의 재정을 사용할 때에 정직하고 진실하게 사용해야 다른 사람도 나의 재물에 대하여 정직하고 진실하게 대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남의 것을 사용하게 될 때 그 대부분은 재정과 관련이 있습니다. 남의 물건이든 나의 물건이든 다 소중할 뿐만 아니라 직접적으로는 돈으로 사야 하는 것이 됩니다. 

잘못 사용하면 고치든지 배상을 하든지 결국 돈이 드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것은 아주 소중하게 다루면서 남의 것은 대충대충 그리고 험하게 다룬다면 그것은 충성치 못한 태도입니다. 남의 것을 빌려 놓고 돌려주지 않고 있다면 그 역시 충성되지 못한 태도입니다. 남의 돈을 빌려가고 나서 갚지 않는 것도 마찬 가지입니다. 교회에 와서 물건을 함부로 사용을 하거나 아끼지 않는 것도 충성되지 않은 것입니다.

부끄러운 고백을 하나 하고자 합니다. 오래 전에 제가 토론토에 살 때 어느 날 시내의 한 주차장에서 자동차를 후진하다 뒤를 미처 못 보고 뒤차의 앞면을 살짝 받았습니다. 그런데 백미러로 보니 별 이상이 없어 보였다. 그래도 내려서 확인을 해 보았어야 하는데 뭐 별일이 없겠지 하고 그냥 가 버렸습니다. 마음에 불편한 느낌이 드는 것을 보니 하나님께서 무언가 사인을 주시는 것 같은데 이를 무시하고 모른 척하였습니다. 그리고 약 일 주일이 지난 후에 제가 누군가에게 나의 차를 빌려주었는데 그 사람이 집 앞에 세워 둔 차를 누군가 뒤에서 받고 그냥 가 버렸습니다. 

그래서 제 차의 왼쪽 범퍼가 안으로 들어가고 문도 약간 뒤틀리고 결국 범퍼가 내려앉았습니다. 이 일을 통해 저는 하나님이 나에게 말씀을 하시는 것을 알았습니다. 제가 남의 것에 충성치 못했던 것을 깨닫게 되었고 하나님께 회개를 하였습니다. 그 당시에는 제 차에 그 흔적이 남아 있었습니다. 저는 그 흔적을 볼 때마다 제가 남의 것에 충성치 못했음을 돌아보며 늘 교훈을 삼곤 했습니다. 여러분은 다른 사람의 것을 어떻게 대하고 있습니까? 다른 사람의 것에 충성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대충대충 함부로 하고 있습니까?

우리 집도 언젠가 이 말씀을 같이 나누고 빌려 와서 돌려주지 않고 여전히 가지고 있던 책들을 돌려주고, 남의 물건을 소유하고 있던 것들을 모두 원 상태로 갖다 놓는 시간을 가졌었습니다. 그 때에 느꼈던 그 자유함과 기쁨은 이루 말 할 수가 없었습니다. ‘남의 것’ 에는 그 외에도 여러 가지가 포괄적으로 함유되어 있습니다. 물건만이 아닙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의 인격을 존중히 여기는 것, 타인의 나와 다른 성격을 비난이나 비판 없이 받아들이는 것, 그 사람의 Boundary를 손상하거나 침범하지 않고 지켜 주는 것, 다른 사람의 권위(부모님, 형제, 친구, 선생님, 어른, 영적인 지도자들 등)를 인정해 주는 것 등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만일 여러분이 남의 것에 성실하지 않고 정직하지 않은 것이 있다면 돌아보고 원 상태로 돌려놓는 작업을 하시기를 바랍니다. 만일 그렇게 한다면 하나님께서는 마땅히 여러분에게 돌아가야 했지만 여러분이 충성치 않음으로 인해 그렇게 되지 못 했던 여러분의 몫을 되돌려주실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충성‘입니다. 충성은 어떤 거창하고 크고 무겁고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작은 것과 재물과 남의 것에 성실과 정직으로 해야 할 본분을 다하는 것이 바로 충성입니다. 그러므로 충성은 결국, 우리의 태도를 말하고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의 태도 즉 Attitude는 우리의 삶의 질인 Altitude(고도)를 결정하게 됩니다. 여러분이 차원이 높은 삶을 살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우리의 태도를 바꾸어야 합니다. Altitude 즉 고도를 높이기 위하여 우리의 Attitude, 바로 태도의 전환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태도에 방향을 수정해야만 충성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제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우리는 어느 듯 2025년의 2/3를 마감할 시점에 놓여 있습니다. 지난 9개월을 어떻게 마무리하느냐 하는 것은 앞으로 다가오는 2025년의 남은 3개월을 어떻게 맞이 하느냐와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금년 한 해를 잘 마무리하여 하나님 앞에 충성된 사람이 될 수 있기를 바라며 다음의 몇 가지를 제안해 드리고자 합니다.

첫째는 자기 자신을 관찰하고 돌아보시기를 바랍니다. 지난 9개월간 자신이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Debriefing해 보라는 것입니다. 내가 작은 일에 충성치 못 한 것은 무엇인지, 재물에 충성되었는지, 그리고 다른 사람의 것에 충성하였는지를 돌아보아야만 합니다.  이것은 곧 내 내면의 소리를 듣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께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백지를 앞에 두고 ‘하나님, 이 영역에 대하여 저에게 하실 말씀이 무엇입니까?’ 하고 물으며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영에 속한 사람입니다. 영으로만 알 수 있는 영역들을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통해 여러분 각자에게 말씀해 주실 것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시고 깨닫게 하시는 것을 백지에 적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가지고 먼저 하나님께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잘못된 나의 모든 행실이 나에게서 떠나갈 것을 명령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는, 다른 사람들의 얘기를 들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모두가 Blind spot이 있습니다. 내가 잘 볼 수 없는 영역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볼 수 없는 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묻고 들어야 합니다. 여러분의 배우자와 부모님, 형제들과 친구들, 영적인 지도자, 직장상사와 동료들 그리고 후배 등 여러분이 생각할 수 있는 여러 사람들로부터 여러분 자신에 관한 얘기를 듣게 된다면 나의 Blind spot이 무엇인지 알게 될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부담스럽게 여기고 있는 ‘충성’의 본질에 접근하기 위해서 해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은 ‘듣는 것’ 임을 발견하게 됩니다. 첫째는 나 자신에게서, 둘째는 하나님께로 부터, 셋째는 다른 사람들로부터 듣는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작은 것, 재물, 그리고 남의 것에 대한 나의 충성의 방향이 어떠해야 하는지 알게 될 것이고,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삶의 전환이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충성’은 무슨 뜬 구름을 잡는 것이 아닙니다. 내 삶에 아주 실제적으로 측정할 수 있고 또한 적용할 수 있는 ‘과제’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어려운 것을 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우리에게 쉽고, 또 능히 가능한 것을 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충성은 부담스러운 것이지만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인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오히려 우리를 믿음의 사람으로 세워가는 거룩한 부담입니다. 이 거룩한 부담에 여러분을 초대하고 싶습니다. 이 거룩한 부담을 믿음으로 취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그리고 자녀 여러분! 당신은 충성된 사람입니까? 이 질문에 여러분 자신이 스스로 대답을 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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