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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단상] 치열한 삶이 필요한 시대_예레미야 20:7-9_박준호 목사(토론토 꿈의 교회)

치열한 삶이 필요한 시대_예레미야 20:7-9

박준호 목사(토론토 꿈의 교회)

잘되는 집안, 잘되는 교회, 잘되는 기업의 특징이 있습니다. 잘되는 곳에 가보면 잘되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반대로 안되는 곳에 가 보면 안되게 하는 사람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과거나 지금이나 <인사가 만사>라고 말합니다. 

좋은기업일수록 사원을 뽑는데 까다롭습니다. 좋은 인재가 이윤과 직결되기 때문입니다. 

일본에서 살아있는 경영의 신으로 불리우는 ‘이나모리 가즈오이’라는 분이 계십니다. 

씨없는 수박을 발명한 우장춘 박사의 넷째 사위입니다. 이분이 일본항공(JAL)이 파산위기였던 2010년에 일본정부의 요청으로 일본항공 회장직을 맡은적이 있습니다. 

그때는 이미 은퇴하셨을 때였는데, 정부의 요청을 받고 자기의 측근 단 3명을 데리고 들어가서 8개월만에 적자인 일본항공을 흑자로 바꿔 놓았습니다. 그 이후 일본항공(JAL)은 계속 흑자경영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분의 한 마디 말은 굉장한 명언으로 회자됩니다. 

이분이  사람을 3가지 유형으로 나누었습니다.   
자연성(自燃性), 가연성(可燃性), 불연성(不燃性)입니다.
첫째, 자연성을 가진 사람은 타고난 열정으로 스스로를 불태우는 사람입니다.  

둘째, 가연성을 가진 사람은 동기가 부여되면 언제든 열정을 일으킬 수 있는 사람입니다. 

반면 불연성을 가진 사람은 아무리 동기를 부여해도 열정이 타오르지 않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이나모리 가즈오이는 일본항공의 회장직을 맡은 후 직원선발에 정성을 기울였다고 합니다. 

항상 자연성 인재를 뽑을려고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다고 합니다. 

열정없이 성공한 사람은 단 1명도 없습니다. 불타는 열정만 가지고 있으면 안되는 일도 되게 합니다. 평범한 일도 특별한 일로 바꾸어 놓습니다. 열정이 있는 사람은 주위를 신나게 합니다. 신나는 에너지를 전염시킵니다. 

반면 열정이 없는 사람은 의욕이 없는 삶을 삽니다. 다른 사람들을 더 지치게 만듭니다. 

재미있는 일도 재미없는 일로 만들어버립니다. 

꺼져가는 인생, 꺼져가는 시대의 공통점은 언제나 열정의 상실에 있습니다. 

그는 이 열정의 가치를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말하기를 자연성 인재가 갖추어야 할 조건을 <자발과 자율, 치열과 치밀>로 무장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자발성spontaneity과 치열함Fierce을 가진 사람이 열정적으로 일을 한다는 것입니다. . 

돌아보면 과거 1세대들의 삶은 어쩔수 없이 치열했습니다. 한국도, 미국도, 일본도, 독일도 …전쟁을 경험한 나라들은 전쟁후에 치열하게 살지 않으면 먹을게 없었습니다. 생존을 위해 경쟁해야했습니다. 입에 풀칠이라도 할려면 무슨 일이라도 해야했습니다. 그 속에 눈물도 있고, 웃음도 있었습니다. 그것이 사람 사는 세상이었습니다. 치열함속에서 생명의 힘이 발동했던 것입니다. 아플여유도 없었고, 우울하다, 외롭다는 말을 할 여유도 없었습니다. 그 치열함이 오히려 사회를 건강하게 만들었는지도 모릅니다. 그 치열한 경쟁을 통해 사회가 발전하고, 경제대국까지 된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치열함을 싫어합니다. 특히 젊은이들의 사고는 돈을 좀 못 벌어도 치열하게 사는 것보다는 편안하게 사는 것을 선택합니다.  

문제는 이 치열함이 없어지니까 간절함도 없어지고, 열정도 사라지더라는 것입니다.  

열정이 사라진다는 말은 삶에 대한 문제의식이 없어진다는 말입니다. 분명한 목표가 없어지는 것이죠! 변화를 싫어하게 됩니다. 도전이라는 말이 점점 사라집니다. 

더 큰 문제는 치열함이 사라지면 더 여유를 갖게 되고,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더 성숙하고 풍성하고 즐거워져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더라더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치열하게 살 때보다 마음의 여유가 더 없습니다. 재미가 없습니다. 삶이 따분합니다. 

이런 삶은 결코 성경이 이야기하는 삶의 태도가 아닙니다. 오히려 삶은 더 여유로와졌는데, 불안을 호소하는 사람이 많고, 불면증에 시달리는 분들이 많고, 우울하고 외로움에 시달리는 사람이 더 많아지는 것을 어떻게 설명해야할까요?

  예수님은 생명을 살리는 일을 안식일에도 행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울도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라고 권면했습니다. 

오해해서는 안됩니다. 치열한 삶이 바쁜 삶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안식을 없애야 한다는 말도 아닙니다. 사실 안식일은 6일간 열심히 일한 사람에게 의미가 있습니다. 

안식일은 또 다시 6일을 일해야 하는 사람에게 쉼의 기쁨을 안겨줍니다. 

 일이 없는 사람에게 안식은 괴로움 그 자체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목표가 있는 치열함속에서 안식을 누려야합니다. 특히 크리스챤들은 영적전쟁의 한 복판에서 매일 살아갑니다. 정신차리지 않으면 사단의 멋잇감이 됩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들을 향해 <늘 깨어있으라>고 권면합니다. 치열하게 사는 사람들은 항상 깨어있을 수밖에 없는 삶을 살게 되어 있습니다. 

 혼자서 학비를 충당하면서 공부하는 학생의 인터뷰를 본 적이 있습니다. 그녀가 말했습니다. 

“저는 지금의 치열함을 즐기고 싶어요. 여기서 치열함은 경쟁에 등 떠밀려 급박하게 달려야하는 ‘조급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에요. 전 여행, 운동, 레저 활동도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꾸준히 하고 있어요. 이런 활동들은 사람을 넓게 만들어 주잖아요. 제가 말하는 치열함은 어떤 것을 대할 때의 ‘태도’에요. 무엇을 한다 하더라도 지금과 같이 젊은 시절에만 느낄 수 있는 절박함과 치열함을 즐기며 현재를 대할 때 더 크게 성장하게 되는 것 같아요.”

그렇습니다. 치열하게 살아가는 사람은 엉뚱한 곳에 한 눈 팔 시간이 없습니다. 치열하게 살아가다보면 자기도 모르게 변화되고 성장합니다.   

캐나다에는 박사과정을 하는 사람들이 제법 있습니다. 사실 박사과정을 하기가 결코 쉽지 않습니다. 박사과정을 하시는 분들은 대체로 막 결혼을 해서 자녀들이 어린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양육과 공부를 같이 하기는 결코 쉽지 않습니다. 박사를 다 마친 분들이 하는 공통적인 말이 이렇습니다. “어떻게 박사공부를 마쳤는지 모르겠어요’ 그때가 가장 힘든 시기였고, 동시에 가장 행복한 순간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다시 하라면 못할것 같아요” 

그렇습니다. 그들이 그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목표가 있는 치열한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치열함 자체에서 열정이 생산되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치열함 그 자체가 생존이고 에너지입니다.  

우리의 열정을 빼앗기는 순간이 있습니다. 그중 한 가지가 꿈이 벽에 부딪혔을 때입니다. 꿈이 현실에 부딪혀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입니다. 그런 순간을 반복적으로 경험하고, 오랫동안 경험하게 되면 누구라도 낙심을 경험합니다. 낙심은 열정을 빼앗아갑니다. 

예례미야라는 탁월한 선지자도 오늘 그런 순간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20장 전체를 읽다보면 예례미야가 낙심을 넘어 좌절하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20장 마지막에서 자기의 태어난 생일을 저주할 정도입니다. 엄마가 자기를 낳지만 않았어도 내가 이런 절망을 경험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한탄합니다. 예례미야는 자기가 힘이 없어 하나님을 이길수 없었기 때문에 조롱거리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겨우 20세쯤에 선지자로 부름받은 그는 하나님이 시키는대로 예언했지만 그에게 돌아오는 것은 조롱과 핍박이었습니다. 

 성전을 맡고 있던 제사장 바스훌에게 잡혀 채찍을 맞고 감옥에 갇힙니다. 묶인채로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길에 서서 사람들의 조롱을 받습니다. 참으로 견디기 어렵습니다. 자신의 친한 친구들까지 자기를 욕하기 시작합니다. 본인의 말을 지지하거나 격려하는 사람을 찾을수가 없습니다. 10년20년30년이 지나도 예언이 성취되지 않습니다. 예례미야도 사람인지라 지쳐가기 시작합니다. 스스로 결심합니다. “다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지 않겠다. 하나님 이름은 부르지도 않겠다” 그런데 어떻게 된 일입니까? 전하지 않겠다고 결심할수록, 하나님의 눈을 피해 고개를 돌릴수록 저 마음깊은 곳에서 불이 올라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면서 받는 조롱보다 전하지 않고 견디는게 더 힘듭니다. 예례미야는 다시 치열한 삶의 현장으로 달려나갑니다. 

예례미야선지자의 발뒷꿈치도 못따라가지만, 저도 이런 심정이 조금은 이해가 됩니다. 

이민목회를 하다보면 이런 상황들에 부딪힐때가 있습니다. 비전이 방해를 받고, 성취되지도 않으니 낙심이 찾아옵니다. 그냥 하는대로 하면되지, 애쓸 필요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치열한 목회의 현장을 벗어날려고 합니다. 그러면 마음이 편할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습니다. 치열함에서 벗어난 삶은 오히려 저를 더 게으르게 만들었습니다. 몸도 마음도 편하지 않고 영적으로도 충만하지 못했습니다. 이 어려운 시대에 교회를 바라보며 맘 깊은곳에서 불타는 마음을 어쩔수가 없었습니다. 부족하지만 하나님의 부르심에 다시 순종하여 여기까지 달려왔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열정은 어떤 이유로든 깨어질수 있습니다. 방해를 받을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때문에 우리의 경주가 끝나지는 않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열심이 이룰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힘들어하는 시대입니다. 치열하게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우리의 현실입니다. 

하지만 그 치열함이 우리를 더욱 거룩하게 만듭니다. 

그 치열함이 우리를 더욱 성장하게 합니다. 그 치열함속에서 우리는 더욱 하나님을 붙들게됩니다.  우리는 분명한 목적지가 있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살아갑니다. 

영원한 그 나라 백성들은 왕의 모습을 좇아 살아갑니다. 

3년간 예수님의 공생애는 치열한 삶 그 자체였습니다. 매우 치밀한 삶이기도 했습니다. 

시간을 헛되게 사용하지 않으셨습니다. 

에수님은 십자가에 매달려 말씀하셨습니다. <다 이루었다> 비록 짧은 삶을 사셨지만,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치열하고 치밀한 삶을 사셨기에 33년이면 충분하셨습니다. 

때로 치열한 삶의 한 복판에서 지칠지라도 낙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갈6:9)>

여러분의 치열한 삶을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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