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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단상] 찔러보면 압니다(로마서 6:5-8)-박래성 목사(올리브교회)

찔러보면 압니다. 로마서 6:5-8

박래성 목사(올리브교회)
5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 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6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7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
8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 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무슨 말씀인가요? 만일 우리가 예수님의 죽음심과 연합하여 십 자가에서 죽었으면 예수님의 부활하심과 같이 부활생명을 얻는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이 8절에 다시 한번 강조합니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줄을 믿노니” 

본문에서 두번이나 반복된 십자가의 죽음과 생명에 관한 진리의 말씀 앞에 각각 “만일” 이라는 조건이 붙습니다. 의미가 뭘까요? 주님과 함께 영원히 사는 영원한 생명의 전제 조건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조건이 바로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것입니다. 이 시점에서 우리 스스로에게 질문해 봅니다. 나는 예수님과 함께 죽었는가? 나는 그것을 어떻게 확인할 수 있을까? 

저는 군고구마를 좋아합니다. 고구마를 찌는 것보다 구으면 단맛이 더하고 고소한 감칠 맛이 납니다. 그래서 가끔 고구마를 작은 오븐에 넣고 굽는데 문제는 적절한 온도에 적당하게 구 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게 어렵다는 것이죠. 그래서 그때 고구마가 맛있게 잘 구워 졌는지 확인 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찔러 보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죽음도 마찬가지 입니다. 우리가 십자가에 죽었는지 죽지 않았는지를 어떻게 알수 있을까요? 같은 원리로 찔러보면 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십자가에 죽어야만 영원히 살수 있는 이 진리가 너무 너무 중요하기 때문에 주님께서 우리의 살아있는 믿음을 다시 한번 확인하 시기 위해 찔러 보신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찔러 보실까요? 뭘로 찔러 보실까요? 말씀 한곳을 보 겠습니다. 

마태복음 15:21-28, 21 예수께서 거기서 나가사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시니 22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 질러 이르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 이 흉악하게 귀신 들렸나이다 하되 23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제자들이 와서 청 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그를 보내소서 2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 

시되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시니 25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이르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26 대답하여 이르시되 자녀의 떡을 취하 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27 여자가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28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여자여 네 믿 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딸이 귀신들려 아프게 고통당하는 한 가나안 여인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도움을 청합니다 . “주님 저롤 불쌍히 여기사 제 딸을 고쳐 주십시오.” 보통 이런 상황에서 주님은 그를 긍휼히 여 기시고 고쳐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좀 다른 상황이 연출 됩니다. 주님은 그 여인에게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으십니다. 철저히 무시하십니다. 때로는 거절보다 무시가 더 사람을 자존심상하게 

합니다. 그런 상황에서 더 간절하게 도움을 청하는 여인의 마음을 날카로운 비수같은 말로 찌르 십니다. “나는 자녀의 떡을 개들에게 줄수 없다….” 당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인들을 정말 무시하 고 사람 취급 하지 않았습니다. 혈통적으로 더럽다고 생각하여 근처에도 가져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도 다른 유대인들과 똑같이 반응 하셨다는 것입니다. 철저히 여인을 외면 하시더니 

심지어 개라는 말로 혈통적인 약점을 아프게 찌르십니다. 딸이 귀신들려 아픈것도 서러운데, 고 쳐달라 애원하는 불쌍한 엄마에게 개라는 말로 심한 인종차별로 아프게 하십니다. 정말 예수님 답지 않으신 말과 행동입니다. 너무 심하신 것 아닌가요? 아무리 예수님의 도움이 필요해도 이정 도의 상황이라면 참기 어려울 것입니다. 저 같으면 이렇게 말했을 것 같습니다. “딸이 아픈것도 서러운데 당신이 뭔데 나를 개라고해, 내가 더러워서 안고친다..” 이성을 잃고 그렇게 반응하지 않았을까요? 그런데 여인은 침착하게 다시 말합니다. “맞습니다. 주님… 그러나 개들도 주인의 상 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습니다.” 

이게 무슨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나는 주님의 말씀대로 개만도 못한 사람입니다. 그러 나 개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습니다.” 예상치 못한 반응입니다. 그런데 여인의 이 말 한 마디로 예수님의 태도가 갑자기 완전히 달라지십니다.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 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그렇게 상황이 종료됩니다. 불쌍한 여인 의 소원을 무시하시고 더 심하게 개라는 말로 여인의 마음을 후벼파신 예수님의 의도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여인의 어떤 믿음의 상태를 확인하시기 위함 이었다는 것입니다. 그 믿음의 상태가 바로 십자가의 죽음입니다. 

성경에서 …여자여 라는 말은 그 여인을 매우 높여 부르는 말입니다. 요한 계시록 21:9 에서 구원받은 사람을 어린양의 아내라고 표현하는데 이때 아내라는 말과 여자라는 말이 헬라어 원문으로 같은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여자여 라는 호칭은 그 여인의 성숙한 믿음을 인정하신다는 

의미죠. 사실 원문과 영어 다수의 영어 성경본문을 보면 “오! 여자여”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인의 믿음에 대한 감탄사가 들어간 것이죠. 주님께서 감탄하셨습니다. 뭐에 대하여 감탄 하셨을 까요? 이 여인의 끈질김이나, 자녀를 향한 지극하고 진실한 사랑에 감탄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입 니다. 이 여인의 믿음에 감탄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여인의 믿음을 인정하셨다는 것입니다 .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즉 십자가의 죽음이 확인되는 성숙한 믿음을 이 여인에게서 보셨다 는 것이죠. 

결론적으로 주님은 성숙한 믿음, 영생의 믿음을 여인의 죽어진 자아의 모습에서 확인하 셨습니다. 그 믿음을 보시기 위해 이 여인의 아픈 십자가, 딸의 병의 문제와 혈통적인 약점으로 이 여인을 찌르셨다는 것입니다. 이 여인에게 늘 삶의 자괴감을 주었던 혈통적인 약점, 그리고 귀신들린 딸의 문제는 여인의 삶에 아픔과 고통을 주는 십자가였습니다. 그런 아픈 십자가로 주 님은 다시 이여인을 찌르셨습니다. 더 아프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때 이 여인의 반응이 판단이 나 분노, 미움, 증오가 아니었습니다. 겸손히 상황을 인정하고 자신의 부족함을 받아 들입니다. 자 존심을 다 접고 주님 앞에 겸손히 엎드릴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자아가 죽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께서 여인의 십자가로 아프게 찌르실 때, 그 여인의 반응은 자신의 감정이 아니라 성 령의 열매였다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을 “오래참고”, 감정을 “절제”하며, 끝까지 “온유”한 모습입 니다. 그 성령의 열매가 이 말 한마디로 나타난 것입니다. “주님 개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 스러기를 먹습니다” 

사실 우리의 삶에 심각한 문제들이 많습니다. 그 문제들이 우리를 아프게 합니다. 그때 

그런 문제들이 우리에게 상처로 남습니다. 그러나 믿음 그 문제가 자기 십자가로 역사한다는 것 입니다. 아픈 문제 때문에 스스로 하나님 앞에 겸손해 집니다. 때로 삶을 짖 누르는 엄청난 무게 의 인생 문제로 인해 나의 한계를 인정하고 하나님께 완전히 엎드립니다. 이것이 십자가에 죽는 과정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의 인종차별과 귀신들려 아픈 딸의 문제는 이전부터 이 여인을 아프게 

찌르고 상처로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문제가 상처를 넘어서 자아의 죽음이 되고 어떤 상 황에서도 주님 앞에 철저히 엎드려 완전히 복종하며 하늘의 은혜를 구하는 믿음으로 거듭났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정적인 순간에 주님께서 여인의 믿음을 보시려고 여인의 십자가로 아픈곳을 찌르심으로 그 여인의 믿음을 확인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죽음입니다. 그리고 이런 말도 안되는 상황과 대화를 주님께서는 이 한마디로 정리 하신 것입니다. “여자여 네 믿음이 크 도다.” 그리고 “그때로 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고쳐 주셨습니다. 여인의 모든 아픔과 눈물을 닦아 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자기 십자가로 찔러 보시는 주님의 역사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은 사람은 자아가 아니라 그 안에 살아계시는 성령으로 반응하게 됩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죽음과 생명이 확증되는 순간입니다. 하나님은 구원받는 우리가 주님을 따르기 위해 지고 가야하는 자기 십자가로 목적이 분명한 아픔을 주십니다. 그리고 결정적인 순간에 그 십자가로 찔러 그 구원을 확인하십니다. 왜 그렇게 하십니까? 그 믿음이 옳다 인정받은 사람들에 게 영생의 복을 누리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완전한 것을 주시기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성 경의 모든 믿음의 사람들은 그 믿음이 확인되는 순간에 영생의 놀라운 복을 약속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아들 문제는 아브 라함의 평생의 십자가 였습니다. 그 문제로 많은 어려움을 겪었고 하나님의 기적같은 은혜도 경 험했습니다. 그런데 결정적인 순간에 하나님은 그 독자 이삭으로 아브라함의 심령을 너무 아프게 찌르십니다. “독자 이삭을 모리아 산으로 가서 번제로 바쳐라.” 그때 그 사건을 통해 아브라함의 완전한 순종, 십자가의 죽음이 확인됩니다. 그리고 그 죽음이 확인 된 후 하나님의 완전한 축복, 부활 생명이 역사합니다. 그렇게 십자가의 죽음은 모든 믿음에 너무 중요한 사건입니다. 

안타깝지만 모든 사람들이 믿는 그 순간부터 성숙한 믿음을 갖는 것은 아닙니다. 즉 믿 는 그 순간부터 십자가의 죽음이 실제가 되지는 못합니다. 우리 각 사람이 믿음을 가진 후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과정이 있고, 그 십자가에서 나의 죽음이 실제가됩니다. 그런데 그 후 믿음의 중요한 순간에 주님은 더 크고 풍성한 영생의 복을 주시려고 그 십자가로 우리를 찔러 

내 자아의 죽음을 확인하시는 과정이 있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기름부으셔서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으셨지만 처음부터 하나 

님의 마음에 합한자는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택하시고 기름 부으셔서 왕이 된 후에도 그 속사람 안에 꼭꼭 감춰진 살인과 간음이 드러났고 그 결과로 하나님은 다윗에게 온전하고 성 숙한 믿음을 위해 고난을 허락하십니다. 그중 가장 아픈 것이 아들 압살롭의 반역입니다. 그때 다 윗은 압살롬의 칼을 피해 도망하는 길에서 한 사람을 만납니다. 

그는 사울 가문의 시므이 라는 보 잘 것 없는 인물입니다. 그런데 그가 아프게 도망하는 다윗 일행을 향해 돌을 던지며 참기 힘든 저주를 퍼붓습니다. 그때 그곳에 함께 있던 다윗의 장 군 아비새가 그를 당장 죽이겠다고 펄펄 뛰며 다윗의 명령을 기다립니다. 그때 다윗이 이렇게 말 

합니다. “스루야의 아들들이여, 저 사람이 나를 저주하도록 여호와께서 시키셨다면, 누가 뭐라고 할 수 있겠소?” (삼상 16:10) 다윗이 이렇게 말하며 화가 치미는 그 상황을 쉽게 넘어갑니다. 

다윗이 아들 압살롬의 반역으로 너무 화가 나고 마음이 아프고 깊은 상처로 고통스러웠 

을 그런 상황에서 다윗은 겸손히 모든 일을 하나님의 섭리로 받아들입니다. 이것이 바로 다윗의 죽음이 확인되는 대목입니다. 다윗은 모든 상황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권위아래서 하나님께서 그 심령을 찌르고 아프게 하시는 그 상황을 믿음으로 잘 견디어내고 받아들입니다. 이것이 주님 께서 십자가로 다윗을 찌르시고 그 죽음을 확인하시는 상황이라 믿습니다. 성경의 믿음의 사람들 을 보면 이렇게 십자가의 죽음과 그 십자가로 찌르셔서 그 죽음을 확인하시는 하나님의 역사가 반드시 있다는 것입니다. 

요셉은 형들은 요셉을 죽이려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죽이지 않고 요셉을 이집트의 노예 로 팔아 버립니다. 요셉은 형들이 얼마나 미웠을까요? 사랑받던 아들이 하루 아침에 낮 선 타국 에서 노예의 신세가 된 것 입니다. 형들에 의해서 요셉의 험란한 십자가가 시작됩니다. 그런 요셉 이 이런 모든 인생의 광야를 통과하고 하나님의 계획하신데로 애굽의 총리가 됩니다. 그리고 원 수 형들을 다시 만납니다. 요셉의 형들은 요셉을 다시 만났을때 너무 놀라서 아무말도 못했습니 다. 하나님께서는 요셉의 깊은 상처를 다시 그 형들을 보내셔서 찔러 보셨다는 것입니다. 요셉이 그 순간을 한순간 이라도 잊을 수 있었을까요? 피붙이 형들이 작당해서 아우를 죽이려는 상황 들, 살려 달라고 애원하며 발버둥치던 동생을 돈을 받고 노예로 팔아 넘기며 미소 짓던 형들의 얼굴을 요셉은 한순간도 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 형들을 요셉이 다시 만난 것입니다. 당연 히 요셉의 형들은 “이제 우리는 다 죽었다” 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원수같은 형들에 대한 요셉의 반응은 분노와 원한이 아니었습니다. 

창45:5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그때 요셉의 반응은 분노와 미움과 아픔으로 되갚아 주는 일반적인 자아의 반응이 아니 었습니다. 요셉의 자아는 십자가 고난을 통해 죽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형들이라는 십자가로 요셉 을 다시 찌르실 때 요셉의 반응은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용서였습니다. 이것이 십자가를 통과 한 사람의 반응, 십자가에서 죽은 증거란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십자가 영생의 진리를 이렇게 요 약하셨습니다. 

마가복음 8:34-35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 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 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로마서 6:5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십자가에서 다시 사는 영생은 믿음의 핵심입니다. 이 영생이 너무 소중하기에 성경은 그 토록 십자가의 죽음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중요한 순간, 넘치는 하늘의 축복을 부으시려는 순간, 하늘의 사명을 감당해야 하는 중요한 순간에 주님을 따르기 위해 지고 가야할 

각자의 십자가, 자기 십자가로 우리를 다시한번 찔러 우리의 죽음을 확인하시는 믿음의 과정이 우리에게도 있을 것입니다. 그때 죽음이 확인되어야 생명이 확인되는 것입니다. 

딸이 귀신들린 여인이 십자가에 찔려 그 죽음이 확인될때 그 믿음이 인정받았습니다. 십 자가 죽음이 확인된 요셉이 총리가 되어 하나님의 역사속에 쓰임받았습니다. 십자가에 찔려 다윗 

의 죽음이 확인될 때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왕이 되며 왕국을 다스렸습니다. 그렇게 십자 가의 죽음이 확인되는 은혜가 있으시길 축원합니다. 주님께서 십자가로 나를 찌르실때 나는 십자 가에서 죽었고 내안에 예수님께서 사시는 성숙한 믿음으로 반응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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