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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단상] “나봇의 포도원을 탐하다” 김현철 목사(사스카툰비전한인교회)

본문: 열왕기상 21:1~10

제목: 나봇의 포도원을 탐하다

사스카툰비전한인교회 김현철 목사

요즘 빈부격차가 날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습니다. 부자는 더 부자가 될 가능성이 높고, 가난한 사람은 더 가난해질 가능성이 높답니다. 캐나다는 복지가 잘되어 있는 나라인데도 이 부익부 빈익빈 현상은 동일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빈부의 격차는 언제부터 시작된 걸까요? 원래 인류는 다 똑같은 환경에서 시작했잖아요. 빈부에 격차가 생기려면 개인이 가지고 있는 재산의 차이가 있어야 합니다. 재산의 차이가 생기려면 개인이 재산을 소유할 수 있는 권리, 즉 사유재산권이 인정되야 합니다. 물론 열심히 일한 사람과 게으름을 피운 사람의 소유가 같을 수는 없습니다. 그건 정당한 차이입니다. 거기엔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뭐가 문제입니까? 일하지 않는데도 부자인 사람들이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봤을 때 이 사람들에게 공통점이 있습니다. 모두 땅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우리 나라만 해도 예전에 양반들은 땅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땅 없는 사람들은 부자들의 땅을 빌려서 농사를 짓습니다. 열심히 수고해서 가을에 수확을 합니다. 근데 그 모든 곡식이 어디로 갑니까? 양반 주인의 곳간에 들어갑니다. 농부들은 월급을 받을 뿐이에요. 간신히 가족을 부양할 정도만 받았어요. 양반들은 일하지 않아도 부자였습니다. 왜요? 땅을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이죠. 좀 불공평하죠? 억울한 이야기 하나 더 할까요? 일본이 한때 한국을 점령했습니다. 친일파들은 일본 군대에 빌붙어서 일본 군인들보다 더 잔인하게 동족을 괴롭혔습니다. 그 댓가로 뭘 받았습니까? 땅! 부자들의 땅을 다 자기 명의로 바꿔놓았습니다. 그 후손들은 지금도 떵떵거리며 삽니다. 일하지 않아도 되요. 다 부자들입니다. 반면에 일본 군대에 대항해 싸우던 독립군의 후손들은 어떻습니까? 가난에 허덕입니다. 억울하죠. 이 빈부격차의 원인을 시간을 거슬러 살펴보면 결국 조상들이 땅을 소유했냐 아니냐로 나뉘게 됩니다. 근데 여러분! 여기서 궁금한게 생깁니다. 땅, 이거 개인이 소유할 수 있는 종류입니까? 땅은 내가 열심히 노력해서 얻어 내는게 아니잖아요. 땅은 원래부터 있었던 거잖아요. 땅은 누구겁니까?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이 만드셨잖아요. 레위기에 이 땅에 대해서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공동번역으로 읽겠습니다. “땅은 아주 팔아 넘기는 것이 아니다. 땅은 내 것이요, 너희는 나에게 몸 붙여 사는 식객에 불과하다.” (25:23) 땅은 원래 사고 팔수 있는게 아닙니다. 이건 개인적으로 소유할수 있는 재산이 아니라 공적인 유익을 위해 공동체가 관리해야 하는 재산입니다. 쉽게 얘기하면 국가가 국민을 위해 사용할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에요. 그걸 요즘 말로 토지공개념이라고 합니다. 그린벨트라든지 공공택지라든지 공공임대주택… 이런 제도들이 토지 공개념에 해당하는 정책들입니다. 땅 때문에 빈부격차가 심해지고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으니 지금부터 모든 토지에 대한 소유권은 나라가 갖는다!? 이렇게 할수 있습니까? 그렇게 하지는 못해요. 그러면 난리가 날겁니다. 정책적으로 수용 가능한 범위 내에서 해야죠. 토지세를 올린다든지, 땅으로 투기하지 못하게 하는 정책을 낸다든지… 

제가 왜 땅 얘기를 하고 있을까요? 눈치 채셨겠지만 오늘 본문의 내용이 땅과 연관이 있어서입니다. 한 사람이 땅에 대해 욕심이 생겼습니다. 그 욕심이 어떻게 진행되고 어떤 결과를 내는지 보여줍니다. 자!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봅시다. 1절, “그 후에 이 일이 있으니라 이스르엘 사람 나봇에게 이스르엘에 포도원이 있어 사마리아의 왕 아합의 왕궁에서 가깝더니” 두 사람이 나옵니다. 한 사람은 나봇이고 다른 한 사람은 아합 왕입니다. 나봇을 이스르엘 사람이라고 했는데, 이스르엘을 종종 이스라엘로 잘못 알고 계신 분들이 계시는데요 여기 이스르엘은 이스라엘 나라의 한 도시 이름입니다. 헷갈리시면 안되요. 이 나봇에게 아합 왕이 말합니다. 2절, “아합이 나봇에게 말하여 이르되 네 포도원이 내 왕궁 곁에 가까이 있으니 내게 주어 채소 밭을 삼게 하라 내가 그 대신에 그보다 더 아름다운 포도원을 네게 줄 것이요 만일 네가 좋게 여기면 그 값을 돈으로 네게 주리라” 뭘 요구합니까? 나봇의 포도원을 달라고 합니다. 나봇이 원하면 더 좋은 포도원이나 돈으로 주겠다고 합니다. 아합이 나봇의 포도원을 원하는 이유가 뭐에요? 자신의 채소 밭을 삼으려고. 여기서 우리는 아합의 욕심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아니 이게 왜 욕심이냐? 왕이 필요하면 자기 나라의 땅을 마음대로 취할수도 있지!” 우리는 그런 개념에 익숙합니다. 왕이 곧 국가이다! 모든 땅은 왕의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렇지 않습니다. 땅에 대해서 모든 유대인들이 알고 있는 하나의 관습이 있습니다. 땅의 영속적인 주인은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조금 전 레위기 25:23 말씀에 그랬잖아요? 땅은 영원히 팔수 있는게 아닙니다. 주인이 완전히 바뀔수 없어요. 왜요? 그 땅은 하나님의 것이고, 하나님이 각 지파별로 나눠 주셨기 때문입니다. 언제 나눠주셨어요? 출애굽해서 가나안 땅에 들어올 때 각 지파별로 나눠줬습니다. 그걸 뭐라고 불렀어요. 기업! 지파별로 기업을 주셨고, 지파는 각 가정별로 땅을 나눠줬습니다. 그래서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기 땅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땅은 사고 팔수 없었어요. 왜요? 하나님의 것이니까! 설령 살림이 어려워서 팔게 되더라도 희년제도가 있어서 희년이 되면 다시 원래 주인에게 돌려줘야 했습니다. 그게 레위기에 나와 있고, 모든 사람들은 그걸 압니다. 3절 보세요. “나봇이 아합에게 말하되 내 조상의 유산을 왕에게 주기를 여호와께서 금하실지로다 하니” 같은 이유로 나봇이 거절하고 있습니다. 아합 왕은요? 이걸 몰랐을까요? 알죠. 당연히 압니다. 이건 율법일 뿐만 아니라 전통이고 문화입니다. 그런데 지금 뭘 시도하고 있습니까? 그 하나님의 명령을 위반하고 남의 땅을 자기 소유로 만들려고 하고 있습니다. 욕심이죠. 이 땅에 대한 욕심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습니다. 요즘 한국에는 LH 사태로 떠들썩합니다. LH는 한국토지주택공사인데요, 국가에 속한 기관입니다. 근데 여기서 일하는 사람들이 어느 지역이 개발될거라는 정보를 가장 빨리 압니다. 국가가 정책을 시행하려면 공무원들이 먼저 알아야 되잖아요. 그런데 이 공무원들이 그 정보를 이용해서 땅을 미리 삽니다. 돈을 다 끌어 모아서 25억어치의 땅을 사요. 그게 조금 있다가 얼마가 되요? 100억이 됩니다. 공무원들은 원래 국민을 위해 봉사하는 사람들이잖아요. 자기들 배만 불리게 하고 있습니다. 원래 땅은 하나님의 것인데, 땅 가지고 장사를 엄청해 먹은겁니다. 또 시장 선거에 나가는 어떤 분은 그린벨트 땅을 미리 사 놨다가 그곳을 개발지역으로 지정하고 보상금으로 수십억을 챙기기도 했습니다. 원래 그린벨트는 개발을 금지시켜놓기 때문에 땅 값이 굉장히 싸요. 아무도 안 사려고 합니다. 근데 가족 명의로 사놓게 하고, 자기가 시장으로 있을 때 그 그린벨트를 개발지역으로 선정합니다. 시장도 공무원인데, 국민들을 위해 일한 게 아니라 자기 가족들을 위해 사기를 친 셈입니다. 

자! 아합도 나봇의 땅을 욕심냈습니다. 근데 여러분, 애초에 아합은 왜 이 땅을 욕심냈다고 했죠? 자기 개인의 채소 밭을 삼기 위해서입니다. 왕이 먹는게 부족했을까요? 북이스라엘 각 도시에서 가장 좋은 곡식들을 보내주고, 왕궁 주변에도 왕을 위한 땅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게 부족하다고 느꼈습니다. 부족하다고 느끼니 더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고, 그 “조금 더”라는 욕구가 욕심으로 발전하는 겁니다. 여러분! 욕구 자체는 죄가 아닙니다. 인간이란 원래 뭔가 필요하면 원하게 되어있습니다. 그게 본성입니다. 잠이 필요하면 자고 싶고, 배 고프면 먹고 싶고, 심심하면 놀고 싶습니다. 그건 욕심이 아니에요. 그건 창조의 섭리입니다. 뭐가 욕심일까요? 이미 충분한데 거기서 “조금 더”하면 욕심이 됩니다. 이미 충분한데 더 욕심을 부려 나봇의 땅을 원하고 있는 겁니다. 여러분! 이건 우리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민감한 문제일수 있는데요, 주일날 일하는 문제입니다. 주일날 일이 잡히거나 비즈니스하시는 분들은 이게 참 어려운 문제입니다. 비즈니스는 특히 주일날 장사가 잘 되거든요. 주일날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에 집중하고, 주 안에서 한 형제 자매된 교회 식구들과 교제하고, 가정 안에서 안식하는 것. 주일을 그렇게 보냈으면 좋겠습니다. 물론 우리 계산으로는 주일날 일하는게 더 이익입니다. 그러나 하루의 재정적 보상보다 하나님이 주시는 영적인 보상이 훨씬 더 크다는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나봇이 아합의 제안을 거절한 이유가 뭡니까? 하나님께서 금하셨기 때문이에요. 왕이 어떤 제안을 했습니까? “더 좋은 포도원 줄게. 원하면 돈으로 보상해줄게” 왕이 제안했으니 쩨쩨하게 시세 값으로 주겠습니까? 어마어마한 돈을 줄 겁니다. 근데 그 제안을 거절해요. 나봇은 재정적 이익보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택합니다. 세상에는 “어쩔수 없는게” 많지 않습니다. 다 우리의 선택에 달려있어요. 

자! 아합의 욕심이 나봇의 하나님 경외함에 부딪혔습니다. 마음 먹은대로 안됐습니다. 아합은 여기서 선택할 수 있습니다. “욕심이구나!”를 깨닫고 포기하든지, 아니면 다른 방법으로라도 욕심을 이루려 하든지. 아합이 어떤 선택을 합니까? 욕심을 밀어 부칩니다. 나봇이 거절하니까 아합이 어떻게 반응하는지 봅시다. 4절, “이스르엘 사람 나봇이 아합에게 대답하여 이르기를 내 조상의 유산을 왕께 줄 수 없다 하므로 아합이 근심하고 답답하여 왕궁으로 돌아와 침상에 누워 얼굴을 돌리고 식사를 아니하니” 아합이 근심하고 답답해했다고 했는데, 이건 영어로 보면 sullen and angry, 즉 기분이 상하고 화가 났다는 뜻입니다. 속으론 그랬겠죠. “아니 니가 왕인 나의 말을 거역해!” 그리고 침대에 누워서 단식투쟁을 합니다. 이상합니다. “그 당시 왕이면 절대적인 권력을 갖고 있을 때인데 왜 이런 반응을 하지? 그냥 군사들을 시켜서 빼앗으면 되는거 아닌가? 아합왕이 착해 빠진건가?” 이렇게 생각될 수도 있어요. 그러나 아합 왕은 착한 왕이 아닙니다. 교묘한 왕입니다. 5절 보세요. 이렇게 삐져서 밥 안 먹고 있으니까 “그의 아내 이세벨이 그에게 나아와 이르되 왕의 마음에 무엇을 근심하여 식사를 아니하나이까” 이세벨을 끌어들입니다. 자기의 손으로 직접 처리하지 않고 이세벨을 이용하고 있는 겁니다. 명분을 만드는 거에요. “내가 한거 아니다. 왕비가 한거다!” 아합이 이런 적이 이번이 처음이 아닙니다. 지난번에 엘리야와 바알 선지자의 대결에서 엘리야가 이겼습니다. 모든 백성들 앞에서 바알 선지자를 다 죽입니다. 아합은 엘리야를 죽이고 싶었을 겁니다. 근데 자신이 직접 나서지 않습니다. 모든 일을 이세벨에게 말합니다. 그랬더니 이세벨이 엘리야를 죽이려고 합니다. 이번에도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6절 보세요. 왜 자기가 화가 났는지 말합니다. “왕이 그에게 이르되 내가 이스르엘 사람 나봇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네 포도원을 내게 주되 돈으로 바꾸거나 만일 네가 좋아하면 내가 그 대신에 포도원을 네게 주리라 한즉 그가 대답하기를 내가 내 포도원을 네게 주지 아니하겠노라 하기 때문이로다” 그러니까 이세벨이 나섭니다. 7절, “그의 아내 이세벨이 그에게 이르되 왕이 지금 이스라엘 나라를 다스리시나이까 일어나 식사를 하시고 마음을 즐겁게 하소서 내가 이스르엘 사람 나봇의 포도원을 왕께 드리리이다” “아 왕이 체통이 있지! 일어나서 식사하시고 맘 편하게 있으세요. 내가 다 알아서 할게!” 요즘 말로 하면 이런겁니다. 자! 여기서 우리는 아합의 욕심이 어떤 식으로 발전하는지를 보게 됩니다. 욕심이 거짓말을 불러 옵니다. 6절 아합의 대답은 사실과 다릅니다. 진실을 왜곡하고 있어요. 두 가지를 발견하게 되는데요, 첫째는 아합이 나봇의 포도원을 왜 달라고 했는지 이유를 말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없는 말을 지어내는 것도 거짓말이지만, 진실의 일부분만 말하는 것도 거짓말이 됩니다. “내 개인용 채소 밭으로 삼으려고 그랬다” 이걸 말하지 않아요. 왜요? 그걸 말하면 듣는 사람이 “아니 채소 밭이 또 필요해요? 욕심 아니에요?” 이렇게 생각할수도 있기 때문이에요. 자신의 욕심을 감춥니다. 두 번째 거짓말은 나봇이 어떤 이유로 거절했는지도 말하지 않습니다. “그거 하나님께서 원하지 않는 겁니다” 이걸 말했다면 듣는 사람이 “아… 그거 하나님이 원하지 않는 거에요? 그럼 하면 안되지…” 이렇게 나올 수 있기 때문이죠. 아합은 지금 거짓말로 자신의 욕심을 최대한 감춥니다. 최대한으로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상대방 나봇의 잘못을 부추기고 있어요. 포기하지 않은 욕심은 거짓말이라는 죄를 낳게 됩니다. 그 거짓말로 죄인된 자신을 의인으로 만들고, 의인인 상대방을 죄인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그리고 그 거짓말로 사람들을 선동해서 자기 편으로 만들어버립니다. 자신의 거짓말을 믿어주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이제는 더 담대해져서 상대방을 집단으로 공격합니다. 여러분! 이거 참 조심해야 합니다. 거짓말로 사람들을 선동하고 어떤 사람을 아주 나쁜 사람으로 만들어 버리는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뭔가 욕심이 있어서 그래요. 그 거짓말로 뭔가 이득을 보고 싶어서 그런겁니다. 내가 그 사람보다 더 낫다든가… 나는 그렇게까지 못된 사람이 아니라든가… 자기 변호든, 자기 유익이든 뭔가를 얻기 위해서 거짓말을 하는 겁니다. 바울은 에베소서 4:15 “오직 사랑안에서 참된 것을 말하라”고 권면합니다.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해 거짓말을 하는 우리가 아니라, 욕심을 버리고 사랑안에서 참 진리만을 말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아합의 이야기를 듣고 이세벨도 화가 잔뜩 났습니다. 이제 아합이 시작한 욕심이 이세벨을 통해 어떤 결과를 내는지 봅시다. 8절에 아합의 이름으로 편지를 쓰고 왕의 인장을 찍습니다. 편지는 나봇이 사는 도시의 장로와 귀족들에게 보내집니다. 편지 내용이 이렇습니다. “너희는 금식을 선포하고 나봇을 백성 가운데에 높이 앉힌 후에 불량자 두 사람을 그의 앞에 마주 앉히고 그에게 대하여 증거하기를 네가 하나님과 왕을 저주하였다 하게 하고 곧 그를 끌고 나가서 돌로 쳐죽이라” 금식을 선포하는 것은 뭔가 큰 일이 난 것처럼 분위기를 조장하기 위해서입니다. 원래 금식은 국가적 위험이 닥쳤을 때나 민족의 죄를 회개할 때 하는 겁니다. 분위기 잡을려는 겁니다. 나봇을 높은 자리에 앉히는 것은 공개재판을 의미하구요. 불량배 두명을 매수합니다. “나봇이 하나님과 왕을 저주했다!” 더 큰 거짓말이 선포됩니다. 이 거짓말 때문에 나봇은 돌에 맞아 죽습니다. 아합의 욕심은 결국 한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넣습니다. 여기서 떠오르는 말씀은 야고보서 1:15입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비록 여기서는 아합의 욕심 때문에 나봇이 죽습니다. 오늘 나봇의 죽음은 한 사건을 떠올리게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입니다. 나봇은 돈 욕심을 뿌리치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세상 모든 것을 주겠다는 사탄의 유혹을 물리치고 예수님도 하나님께 순종했습니다. 나봇의 죄목이 “하나님과 왕을 저주했다”입니다. 예수님도 신성모독이라는 죄목으로 사형당했습니다. 둘다 억울한 죽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의롭습니다. 오늘 본문은 아합 왕의 욕심과 나봇의 순종함을 극명하게 대조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 말씀의 교훈을 어떻게 우리 삶에 적용해야 할까 고민해야 합니다. 먼저, 내가 하려는 것이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욕구” 수준인지, 아니면 너무 지나친 “욕심”인지 분별하셔야 합니다. 어떻게 분별합니까? 나봇이 본을 보였습니다. “하나님의 법에 의하면 그렇게 하면 안됩니다.” 말씀을 묵상하시면서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깨달아집니다. 성령님이 그게 욕심인지 아닌지 알려주세요. 만일 그게 욕심이라면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멈출수 있는 용기”입니다. 아합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거짓말이 더 큰 거짓말이 되고 급기야는 살인을 하게 됩니다. 죄가 점점 더 커져갔습니다. 멈출수 있어야 합니다. 그게 믿음입니다. 뭔가를 하는 믿음도 있지만 뭔가를 하지 않는 믿음이 더 근원적입니다. 죄를 안짓는 믿음이 있어야 거룩한 행동을 하는 믿음도 생기는 겁니다. 내가 가진 생각이 욕심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면 행동에 옮겨야 합니다. 그저 말로만 “~~하지 말아야 하는데… ~~해야 하는데…”하지 마세요. 아무리 거룩하고 믿음있어 보이는 계획을 말한다 해도 실행하지 않으면 말짱 꽝입니다. 

이제 새로운 한주가 시작됩니다. 이번 한주간 나는 아합으로 살것인지 아니면 나봇처럼, 예수님처럼 살것인지 선택해야 합니다. 아합처럼 욕심을 쫓아가지 맙시다. 나봇처럼 있는 것에 만족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사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지금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과 성령님의 위로와 역사하심이 오늘 욕심의 유혹이 올때마다 아합처럼 욕심이 이끄는 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이 이끄시기를 원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를 다짐하는 여기 모인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과 그 가정위에 이제로부터 영원토록 함께 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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