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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단상]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삶”-조용완 목사(빅토리아은혜장로교회)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삶(골로새서 3:1~4)

조용완 목사(빅토리아은혜장로교회)

복음으로 산다는 것, 복음으로 체질화 된다는 것은 우리가 믿는 복음을 말로만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으로 연결되는 것이고 복음이 우리의 삶에서 일상화되는 것이고 복음안에서 사는 삶입니다. 

하나님 나라 안에서 살고 복음 안에서 사는 것은 이벤트가 아닙니다. 오늘날 교회는 이벤트를 많이 합니다. 교회가 이벤트화 된 부분이 많은데, 복음으로 살고 복음 안에 있다는 것은 우리의 삶으로 연결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골로새서에서 복음으로, 은혜로 시작한 것을 끝까지 복음으로, 은혜로 이어 가야 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은 다음엔, 우리가 열심히 살고 열심히 순종하고 열심히 기도하고 열심히 헌신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더 쟁취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은혜로 구원을 얻을 것이 우리의 삶에 계속 연결된다는 것입니다. 

이게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삶입니다. 이런 그리스도인의 삶이 어떻게 우리에게 가능하게 된 것입니까? 3절,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 너희가 죽었다. 

로마서 6장에도 비슷한 말씀을 합니다. 로마서 6:2,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이 문장은 직역하면 이렇게 읽혀져야 합니다. 우리가 과거에 죄에 대해서 죽었는데, 어떻게 미래에 죄에 대해서 살수 있습니까? 

문자적으로 성도가 죄를 지을 수 없다는 불가능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도덕적으로 일관성이 없다라는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에 대해서 죽었는데, 어떻게 죄 안에서 살 수 있습니까? 논리적으로 말이 안된다는 것입니다. 

죄에 대해서 죽은 사람이 어떻게 죄를 짓고 삽니까?라는 말인데, 여러분 가운데 죄를 안 짓는 분이 계신가요? 저는 그리스도안에서 완전히 성화되었기에 죄와는 상관없는 삶을 삽니다. 이런 분 계신가요? 그렇다면 죄에 대해서 죽었다는 말은 과연 무엇일까요? 죄에 대해서 죽었다고 하는데, 죄를 조금은 짓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무엇을 의미할까? 

죄에 대해서 죽었다는 것이, 더 이상 죄를 짓지않는 것이라고 오해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간증할 때, 저는 예수님 믿기 전엔 그렇게 세상 음악을 듣고 유행가만 불렀는데, 이제는 죄를 짓고 싶지 않아져서 찬송가만 듣고, 예전에는 욕을 했는데, 이제는 다 싫어졌어요. 이제는 죄를 짓고 싶은 마음이 싹 없어졌어요. 

정말 그러십니까? 이건 오해라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은 자꾸 죄로 끌리게 되어 있습니다. 두번째 오해는 더 이상 죄를 짓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정말 그렇게 됩니까? 이것 죄를 너무 과소평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군가가 죄를 지었다고 말하면, 죄를 지었다고? 어떻게 하나님 믿는 사람들이 그럴 수 있어! 놀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분은 아직 복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복음 안에 있는 사람들은 무슨 죄도 놀라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저도 여러분도 똑같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죄에서 서서히 멀어지는 것이라는 오해를 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과소평가하는 것입니다. 내 안에 계신 성령님을 과소평가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죄와 점점 멀어졌다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성경은 죄에 대해서 죽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죄책감이 없어졌다고 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이건 더 큰 문제죠. 저는 죄에 대해서 죽었어요. 그렇기 때문에 죄책감이 없어요. 잘못 이해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분명 죄의 정죄함은 없습니다. 그리스도 안에는 죄의 정죄함이 없죠. 이젠 누가 나를 정죄하리요. 그렇지만 죄책감은 아직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죄에 대해서 죽었다는 것은 어떤 의미입니까? 그리스도인이 되는 순간 더 이상 죄에게 종노릇하지 않는다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더 이상 죄가 우리를 주장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죄가 우리로 하여금 죄를 짓도록 강요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내가 어쩔 수 없이 죄를 지을 수 밖에 없었어. 이 말은 성립이 안된다는 것입니다. 죄의 종 노릇하지 않습니다. 전에는 죄의 종 노릇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죄를 지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은 죄를 지을 수도 있고 죄를 짓지 않을 수도 있는 그러한 능력이 우리 안에 있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의 경험과 습관에서 죄와 계속 씨름하고 힘없이 죄에게 패배를 당하는 모습이 있지만, 그래도 이제 우리는 죄의 종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노예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무능력하게 죄가 가라는대로 따라가는 모습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겉모습은 캐네디언, 식성은 한국사람, 생각은 한국사람, 습관,경험]

그래서 기독교인을 의인이면서도 동시에 죄인이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신분으로는 의인인데, 경험적으로는 아직 죄인인 것입니다. 신분으로는 죄가 없는 사람인데, 경험적으로는 자꾸 죄가 움직인단 말이에요. 이 말은 우리가 죄책감을 갖지 말라는 말도 아니고 죄를 짓는 마음이 없어졌다는 것도 아닙니다. 죄가 이제 더 이상 우리를 종노릇 시키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1절,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이 되었다는 것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의미합니다. 즉 우리의 행위가 아닌 예수님과 함께 구원을 얻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모든 것이 우리의 모든 것이 되었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칼빈은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교리를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와 연합되었기 때문에 그의 죽음이 우리의 죽음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연합되었기 때문에 그의 부활이 우리의 부활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떠나서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는 것이고, 우리의 죄가 그리스도께 전가되는 연합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분이 죄없이 사신 완전한 삶이 우리에게 전가되는 놀라운 진리가 적용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완전한 아들로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시면서, 세례를 받고 물 위로 올라오실 때, 성령이 비둘기처럼 임하면서 하늘에서 음성이 들렸습니다. 마태복음 3:16~17,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17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내가 너무나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사랑하는 나의 아들이다 선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전까지 기적을 한번도 행하지 않았습니다. 죽은 사람을 살린 것도 아니고 물로 포도주를 만든 것도 아니었고, 물 위를 걷지도 않았습니다.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예수님을 보시면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나의 아들이다. 내가 그로 인하여 기뻐한다. 무엇을 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냥 아들이기 때문에 기뻐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그 눈빛과 사랑으로 그리스도와 연합된 여러분을 보시면 어떻게 될까요? 하나님이 여러분을 기뻐하신다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보시면서 나는 니가 너무 좋아. 너무 기뻐! 너무 사랑해. 그렇게 큰 미소로 여러분을 향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계시나요? 믿고 계시나요?

하나님이 여러분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얼마나 사랑하는지, 아시나요? 그게 어떻게 가능할까요? 성경은 그것을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받으시는 이유는 딱 한가지입니다. 죄없이 사신 그리스도와 연합되었기 때문에 그분 안에 있는 것이 나에게 다 전가되는 것이다. 그게 연합입니다. 너 죄없이 살았어. 너는 죄없이 완전한 삶을 산거야!라고 완전한 삶을 살았다고 인정해주시는 것입니다.

결혼식때 서약하고 반지를 주고 받아서 그 증표로 우리가 결혼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처럼, 그리스도인은 세례를 통해서 그리스도와 연합된 증표를 보여줍니다. 세례를 통해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세례는 죄에 대해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 그리스도의 죽음이 나의 죽음이라는 것을 증표하는 것입니다. 결혼 반지는 그냥 상징이 아닙니다. 이건 증표입니다. 물론 세례를 받았다고 무조건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니지만, 세례는 보이는 증표입니다.[반지 안낀 나]

3절,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 감춰졌다는 말이 무슨 말일까요? 저는 그리스도안에 감춰졌다는 말을 정체성으로 생각해 봤습니다. 정체성은 우리의 행동과 의식을 컨트롤하는 삶의 방향을 제시합니다. 어떤 것으로 우리의 정체성을 찾는가 하는 것이 핵심입니다. 다 정체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신을 소개할 때 어떤 것을 먼저 소개하느냐? 여러분은 어떻게 소개하십니까? 여러분들의 직업을 소개하십니까? 교회에서는 뭐라고 소개하십니까? 저는 사람들을 만날 때 조용완목사입니다. 하고 목사 이야기를 안하는 편입니다. 그냥 조용완입니다.라고 이야기합니다. 목사가 저의 첫번째 정체성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교회 아이들에게 소개할때는 나단이 형의 아빠야.라고 소개하기도 합니다. 

어떻게 정체성을 찾을 수 있을까? 정체성은 많은 겹으로 형성되어 있습니다. 마치 양파같은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직장을 가장 기본적인 정체성으로 두고 다른 겹을 쌓기도 합니다. 직장이 나의 인생의 목표이고 그것이 나의 정체성이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이러한 직장에서 이런 일을 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직장에 무슨 일이 생기면, 인생이 끝난 것처럼 느껴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게 정체성이기 때문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부모라는 기초에 정체성을 쌓았습니다. 그래서 다른 건 다 없어도 자녀가 어떻게 되는 것에 따라서 정체성이 흔들리기도 합니다. 잘되면 자기도 잘 한 것 같고 안되면 내가 못한 것 같고, 자녀에게 모든 정체성을 쌓아둘 때가 있습니다.

직장에 가정에 어떤 사람은 교회에 교회 직분에, 목사들도 그럴수 있습니다. 목사들은 교회가 정체성입니다. 저는 조용완목사입니다.라고 소개한다면, 저는 남편보다 아빠보다 목사라는 게 제 정체성인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잘못되면, 인생이 끝난 것처럼 느끼는지도 모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은 어떤 것일까요? 저는 복음이 우리의 인생의 한 부분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복음적인 정체성이 가장 중심이 되고 우리의 존재 가치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나의 나 됨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가치관과 세계관이 이러한 정체성에서 나오는 것일 겁니다. 그래서 서로 더 용납하고 긍휼을 보여주고 용서를 하는 것입니다. 복음으로 정체성을 가진 사람에게 항상 사도바울은 일관성있게 적용하는 삶의 적용은 사람들과의 관계입니다. 업적이나 성과가 아니라 관계입니다.

그 관계는 서로 용납하라, 서로 용서하라, 서로 사랑하고 감싸줘라. 다른 사람들에게 더 열려있고, 고집하지 않는 것입니다. 복음으로 사는 사람, 복음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자신감과 장담은 점점 줄어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완전한 권위를 가지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밖에 없습니다.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은 성경뿐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본질을 잃지 않고 비본질을 본질로 착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정체성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입니다. 절대로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정체성이 다른 사람의 평가로 정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이 뭐라고 할지라도 더 담대하고 더 겸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보시고 너무 즐거워하시고 너무 기뻐하시고 너무 사랑하는 나의 자녀들. 

아이들이 어릴 때 얼마나 사랑이 많았습니까? 지금도 그렇죠? 저희 아이들도 지금은 22, 20, 18, 15입니다. 그런데 할아버지 할머니가 손주를 보면 얼마나 자랑하는지 모릅니다. 사진을 보여주고 난리입니다. 하나님의 손주로 생각해도 될지 모릅니다. 무조건 이쁘고, 무조건 다해주고 싶고. 그게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린 그걸 못 믿어요. 우리가 뭔가를 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사람들을 그렇게 대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이 실수하고 죄를 짓는 일이 있다 할지라도,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아이들한테 집 나가! 짐 싸서 나가는 아이들..더 혼난다.] 나가란다고 진짜 나가야? 나가랬잖아! 우리의 근본적인 정체성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정체성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5절,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정욕과 탐심, 이것을 우상숭배라고 이야기 했습니다. 하나님외에 다른 것을 사랑한 것. 하나님외에 내 정체성을 두는 것, 하나님외에 내 소망을 두는 것, 하나님외에 나의 인생이 되는 것, 나는 이것을 위해서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 외에 이게 내 인생입니다.라고 하는 것을 사도바울은 우상숭배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나의 만족과 기쁨, 안정을 위해서 내가 그리스도보다 더 의지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그게 내 우상이 되는 것입니다. 저의 정체성과 저의 만족과 기쁨, 그리스도보다 더 의지하고 있는 것. 저는 존경, 인정, 평안함 이 정도면 됐다. 이정도입니다.

우상의 표시는 항상 지나친 불안감이나 지나친 분노나 지나친 좌절감입니다. 우상숭배는 중요한 것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승격시키는 것입니다. 좋은 것을 가장 좋은 것으로 승격시키는 것이 우상숭배입니다. 저는 목회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우상은 우리를 망하게 합니다. 우상은 우리가 반드시 가져야 할 것이기 때문에 우상을 잃으면 우리는 황폐하게 됩니다. 

4절,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4절은 미래에 관한 말씀입니다. 나의 생명이된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승진, 나의 인생이 되는 자녀가 성공하면, 자녀와 함께 영광중에 나타나리라. 돈과 함께 영광을, 출세와 함께 영광을? 

우리의 우상은 우리를 무너뜨립니다. 우리의 모든 죄는 우상숭배적 태도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우상은 가짜 구원, 가짜 기쁨, 가짜 만족을 줍니다. 이 집을 사면, 이 사람과 결혼하면, 이 직장에 들어가면,.. 모른다.

복음은 우리의 의로움과 행위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안에서 의롭다함을 받은 것이라면, 이제 그런 사람으로 살아라. 무엇을 얻기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니 그리스도인이 되었으니 그리스도인답게 살아라. 분명 힘들고 어렵지만 내 체면이 내 인생의 모든 것이 아니라 내 인생은 그리스도임을 믿는다면 힘들지만 견딜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복음을 자신에게 계속 설교해야 합니다. 자신에게 계속 설교하십시오. 여러분이 어떤 존재인지 설교하십시오. 정말 힘들고 어렵지만 그리스도안에 있는 사람들은 완전한 좌절감은 없습니다. 예수님이 나의 인생이 된다는 것을 안다면, 예수님의 모든 것이 나의 모든 것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영광중에 나타날 일을 상상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날 다 우리는 학벌, 돈, 직장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함께 연합되어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안에서 영광을 받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여러분의 주인이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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