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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단상] “코로나19 사태와 큰 구원”-이지현 목사(몬트리올제자교회)

코로나19 사태와 큰 구원(창세기 45:1-15 )

몬트리올제자교회 이지현 목사

지독한 흉년이 시작되었습니다. 요셉의 말대로였습니다. 이집트를 비롯하여 고대근동에 닥친 심각한 기근이었습니다. 식량이 고갈되었고 사람들은 굶주려 죽게 되었습니다. 요셉의 명령에 따라 이집트 정부는 비축해두었던 곡물을 꺼내어 팔기 시작합니다. 자국 백성은 물론이고 이웃 나라 백성들도 양식을 사려고 이집트로 몰려듭니다. 그들 틈에 낯익은 얼굴들이 보입니다. 야곱의 열 아들들입니다. 곧이어 영화의 한 장면 같은 일이 일어납니다. 곡물 판매의 총책임자는 이집트 총리인데 그가 바로 요셉이지요. 이런 사실을 꿈에도 모르는 형들은 그 앞에서 엎드려 절합니다. 공손하게 굴어야 ‘금싸라기 같이 귀한 곡식’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7년 풍년에 이은 7년 흉년’ 사건은 창세기에 무려 일곱 장 (창 41-47) 에 걸쳐 자세하게 서술되어 있습니다. 이 사건이 얼마나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일곱 해 흉년은 무섭고도 긴 재난이었습니다. 추수는 커녕 밭갈이도 할 수 없었습니다. 땅이 극도로 황폐해지고 굳어져서 쟁기가 흙에 들어가지도 못할 정도였습니다 (창 45:6). 이렇게 땅이 죽으면 거기에 사는 사람들도 함께 소멸하거나 뿔뿔이 흩어지게 됩니다. 역사에는 이런 일들이 간혹 일어났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마야문명입니다. 중남미에서 큰 번영을 이루었던 마야인들은 AD 900 년 무렵 인구가 급격히 줄어들어 자취를 감추고 맙니다. 그 원인이 무엇인지 정확히 밝혀지지는 않았으나 학자들은 ‘오래 지속된 가뭄’이 그들을 멸망으로 몰고갔을 것으로 추측합니다.

창세기는 ‘요셉과 이집트 백성이 7년 흉년을 극복하는 긴 사건’을 서술하면서, 또 한 가지 긴 사건을 동시에 서술합니다. 요셉의 형들에 관한 얘기입니다. 비옥했던 농토가 가뭄으로 바싹 마르고 황폐해진 것처럼, 형들의 마음도 바싹 마르고 황폐해져 있었습니다. 몇 가지 사건만 보아도 그들의 마음이 얼마나 거칠고 황량한지 알 수 있습니다. 오래 전에 그들이 세겜 근처에 머물렀을 때, 디나가 세겜 추장의 아들에게 성폭행을 당했습니다. 이에 분노한 디나의 친오빠 레위와 시므온은 계략을 꾸며 세겜 사람들을 속였고, 칼로 성읍의 남자들을 모두 죽였습니다. 당한 피해에 비해 터무니없이 큰 보복을 가한 것이지요 (창 34). 유다는 자기 아내가 죽은 후에 한 매춘부를 만나 관계를 가집니다. 나중에 알고보니 그녀는 자기의 며느리였습니다. 가족 사이에 갈등이 깊어진 끝에 이런 부끄러운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창 38). 야곱의 장남 르우벤은 자기 아버지의 첩 빌하와 동침합니다 (창 35:22).

야곱의 가정은 ‘역기능 가정’이었습니다. 가족 구성원들이 서로 돌보아주며 격려하기보다 서로 시기하고 미워하며 다툴 때가 더 많았습니다. 이런 가정에서 자란 열 명의 형들은 ‘역기능 가정의 피해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저지른 악한 일에 대해 책임이 없는 것은 아니지요. 그들은 특히 ‘요셉을 노예 상인에게 팔고 아버지를 속인 사건’ 때문에 오랫동안 죄책감에 시달렸습니다. 이처럼 형들의 영혼은 ‘가뭄에 말라버린 농토’와 마르고 병들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요셉을 통하여 7년 흉년 동안 사람들에게 살 길을 마련해 주시고, 황폐해진 땅을 회복하여 다시 농사를 지을 수 있게 해 주십니다. 이와 동시에 역시 요셉을 통하여 황폐해진 형들의 영혼을 기경하여 회복시키십니다. 요셉은 그들에게 충분한 식량을 주어 굶주림을 피하도록 합니다. 이에 더하여 치밀한 계략을 세워 그들의 양심을 흔들어 회개로 이끌어 갑니다.

사실 요셉은 그리운 아버지를 하루라도 빨리 뵙고 싶고 친동생 베냐민을 당장 자기 곁으로 데려오고 싶으나 꾹 참았습니다. ‘형들이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 새사람들이 되는 것’이 먼저였기 때문입니다. 마침내 그날이 왔습니다. 총리에게 환대를 받고 곡식을 사서 돌아가던 형들을 청지기가 뒤쫓고, 도난당한 총리의 은잔이 베냐민의 자루에서 발견됩니다. 청지기는 “도둑질한 자만 체포하여 노예로 삼을 테니 나머지 형제들은 집으로 돌아가라”고 했습니다 (창 44:10). 과거의 형들이라면 막내를 버려두고 각자 자기 살길을 찾아 도망치듯 가나안으로 돌아갔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달랐습니다. 모두 비통한 마음으로 막내와 함께 남았습니다. 유다는 자기가 막내 대신 노예가 되겠다고 총리에게 호소합니다. 형들이 하나님 앞에서 회개한 것을 확인하자 요셉은 마침내 자신의 신분을 밝힙니다. 쌓였던 감정의 둑이 무너지면서 뜨거운 눈물과 함께 커다란 울음이 터져나옵니다 (창 45:2-3). 그것은 큰 감격과 기쁨의 울음이었습니다.

통역을 사이에 두고 말하던 총리가 갑자기 히브리어로 직접 자기들에게 말하는 것도 까무러칠 일인데 “나는 요셉이라” 하니 형들은 너무 충격을 받아 아무 말도 하지 못합니다. 반가움이 아니라 한탄과 근심이 그들을 사로잡습니다. 그들이 어찌 요셉 앞에서 고개를 들 수 있겠습니까. 형들이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 같자 총리는 “나는 당신들의 아우 요셉이니 당신들이 애굽에 판 자라”고 말합니다 (창 45:4b). 이 말에 그들은 죄책감으로 떨었을 것입니다. 요셉의 보복도 두려웠지만 하나님의 심판이 더 두려웠겠지요. 이때 요셉의 입에서는 놀라운 말이 나옵니다.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창 45:5) 요셉은 그들을 안심시키고 있습니다. 그의 태도와 말을 보면 ‘형들에게 보복하고자 하는 생각’이 조금도 없습니다. 이미 다 용서했고 잊었습니다 (창 41:51). 현재 요셉의 가장 큰 관심은 ‘하나님이 하신 일을 형들에게 알리는 것’입니다. 자신과 형들에게 일어난 모든 사건들 뒤에 전능자의 선한 계획이 있음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흉년은 앞으로 5 년이나 더 남았습니다. 주님이 미리 알려주지 않으셨다면 애굽인들은 물론 가나안에 사는 야곱의 가족도 모두 아사하였을 것입니다. 요셉은 자신을 미리 애굽으로 보내셔서 그의 부모와 형제자매의 생명을 구원하시는 하나님께 깊이 감사합니다.

그는 형들에게 여호와가 하고 계신 일을 보다 자세히 설명합니다.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창 45:7) 요셉은 ‘큰 구원’ (a great deliverance)이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이 말에 담긴 의미가 무엇일까요? 우선 이 말은 “큰 숫자의 사람들이 흉년에서 살아남는다”는 뜻입니다. 재난의 규모로 보면 그것은 고대 이집트와 주변 국가들을 통째로 멸망시킬 수 있을 만큼 강력한 것이었습니다. 다행히도 여호와가 요셉을 통해 대흉년을 미리 알려주시고 대책도 가르쳐주셨기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그 재해에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물론 거기에는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가 될 야곱의 가족도 포함됩니다.

‘큰 구원’이라는 표현에는 이차적인 뜻도 들어있습니다. 형들이 얻은 것은 ‘기근에서 구원’만이 아닙니다. 그들은 곡식을 사러왔다가 요셉이 꾸민 일에 빠져들어갔습니다. 그 시련을 겪으면서 진실한 회개를 하고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게 됩니다. 이것을 ‘큰 구원’이라 부를 수 있습니다. 흉년에서 살아남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하고 높은 차원의 구원이지요.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불완전하고 병들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누구나 시련을 만납니다. 학교에서 낙제하기도 하고, 원하는 직장에 들어가지 못하기도 하며, 병에 걸리기도 하며, 사고를 당하기도 합니다. 이런 역경 앞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해야 하고, 거기서 건져주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가 응답되면 얼마나 기쁩니까. 하지만 거기서 멈추어서는 안됩니다.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야 합니다. 그분 안에서 죄를 용서받고 내 영혼에 있는 모든 근심과 두려움이 떠나가는 체험을 해야 합니다. 그분 안에서 나의 성품이 변하고, 주위 사람들과의 관계가 회복되고, 나의 소망이 점점 더 하늘을 향해야 합니다. 이것이 큰 구원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큰 구원’에는 별로 관심이 없고 ‘작은 구원’에 더 흥미를 느낍니다. 교회에 다니면서도 여전히 세속적인 바람과 소망에 머무는 분들이 많습니다. 왜 그럴까요? 왜 진정한 구원에는 관심이 적거나 아예 없을까요? 분별력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눈이 가려져 하나님이 주고자 하시는 참된 구원의 가치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흉년과 같은 재난을 우리에게 주기를 기뻐하는 분’은 아니십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흉년이나 코로나19와 같은 환난을 통해서도 당신의 선한 뜻을 이루신다는 사실입니다. 주님은 이런 환난을 통해 사람들을 흔들어 깨우시고 큰 구원으로 초청하십니다.

2019년 가을에 발생한 호주 산불은 일년 넘게 엄청난 면적의 숲을 태웠습니다. 미국 서부에서 발생하는 산불도 갈수록 그 규모가 더 커지고 있습니다. 허리케인과 태풍은 더 자주 발생하고 강도는 더 세지고 있습니다. 이런 기후 변화의 원인은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지구 온난화 (Global warming)’입니다. 지구 온난화의 주범은 이산화탄소(CO2)이지요. 자동차와 공장에서 엄청난 양의 CO2 가 뿜어져 나옵니다. 과학자들은 CO2를 줄이기 위해 많은 연구를 하고 있습니다. 전기 자동차 늘리기, 플라스틱 사용 줄이기 등 여러 가지 방법을 제시합니다. 

사실 CO2를 획기적으로 줄여서 지구 온난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는 ‘탄소를 흙 속에 가두는 방법’입니다. 건강한 땅은 그 표면이 각종 풀로 덮여있지요. 이 식물들은 토양에 뿌리를 내리고 있고 토양 속에는 수많은 미생물들이 살고 있습니다. 식물은 광합성을 합니다. 이를 위해 공기 중에서 CO2를 흡수하지요. 이렇게 흡수된 탄소 가운데 40 %가 뿌리로 갑니다. 뿌리는 거기에 붙어 살고 있는 수많은 미생물과 합작하여 단백질을 만드는 데 그 주원료가 탄소입니다. 간략히 말해, 식물은 대기 중의 CO2를 흡수하여 흙 속에 가두어 놓습니다. 현재 세상에 있는 농토를 잘 관리하기만 하면 CO2 문제는 해결될 수 있습니다. ‘인류가 공장과 자동차와 축산업에서 배출하는 모든 탄소’를 넉넉히 저장하고도 남을 공간이 토양 속에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농토가 건강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많은 농약과 화학 비료를 사용하는 까닭에 흙 속의 미생물은 거의 다 죽었습니다. 밀 농사를 지으면 밀은 수확할 수 있지만 그뿐입니다. 밀밭이 대기 중에 있는 CO2를 빨아들여 흙 속에 저장하는 기능은 하지 못합니다. 토양 속에 미생물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밭이라도 농약과 화학 비료 사용을 줄이면 미생물이 다시 번식하고 땅이 살아나기 시작합니다. 건강해진 밭은 공기 중의 CO2 를 흡수하여 흙 속에 저장하는 일을 거뜬히 수행합니다. 전세계가 협력하여 이런 방법으로 농사를 지으면, CO2 로 인한 지구 온난화 문제는 해결될 수 있습니다.

2015년 Paris 에서 UN이 주최한 “탄소 배출을 줄이기 위한 대책 회의”가 열렸습니다. “토양을 되살려 거기에 탄소를 저장하자”는 운동에 많은 나라들이 공감하였습니다. 농약과 화학 비료를 사용하는 농법을 하루 아침에 자연 농법으로 전부 바꾸기는 어렵습니다. 그래서 매년 조금씩 바꾸어 나가자는 협약을 만들었습니다. 그대로만 실천하면 30년 후에는 대기 중의 CO2 양이 정상으로 돌아오고 지구 온난화 문제가 해결될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해결책을 알면서도 그것을 받아들이기를 거절하는 나라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세계에서 가장 큰 농토를 가진 세 나라가 이 협약에 사인하기를 거부하였는데 그들은 중국, 인도, 그리고 미국이었습니다.

전문가들은 인류에게 시간이 그리 많이 남지 않았다고 경고합니다. 2019년 11월 5일 세계 153개국 과학자 11,258 명은 BioScience 라는 학술지를 통해 공동 성명을 발표하였습니다. “인류가 그 동안 환경 파괴를 막고자 여러가지 협약을 했지만 지켜지지 않았고, 온실가스 배출은 여전히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고 그들은 말합니다. 이런 상태로 계속 갈 경우 20 년 후에는 지구 평균 온도는 15.5°C 까지 올라갈 것이며, 지구 환경은 인류가 아무리 노력해도 ‘복구불가능한 상태’가 될 것이라고 합니다. 이런 경고에도 불구하고 많은 정치인들은 인류의 미래보다 자신의 표에 더 마음을 씁니다. 농업 관련 기업들은 토양을 살리는 데보다 수익을 올리는 데 더 큰 관심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환경 관련 경고를 들을 때는 잠시 걱정하지만 곧 잊어버리기 잘합니다.

악화되어가는 지구환경은 사실 대단히 심각한 문제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하나님이 인류에게 바라시는 것이 무엇일까요? 점점 더 병들어가는 지구가 보내오는 경고를 보고들으며 정신을 차리는 것입니다. 더 큰 재난이 오기 전에 서로 힘을 합하여 환경 파괴를 막고자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거기에 머물러 있으면 안됩니다. 우리는 ‘작은 구원’만 바랄 것이 아니라 ‘큰 구원’을 바라야 합니다, 이것이 그분이 인류에게 간절히 원하시는 것입니다. 큰 구원, 다시 말해 “그리스를 믿음으로써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그분과 동행하는 새로운 삶”을 얻기 위해 사람에게 주어진 시간은 그리 길지 않습니다. 큰 구원으로 들어오는 것이 늦으면 늦을수록 그만큼 인생을 허비하는 것입니다.

요셉을 보면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이 참으로 ‘큰 구원’임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은 그의 죄를 용서하시고 심판에서 건져주시는 정도에서 끝내지 않으셨습니다. 성품과 가치관을 아름답게 바꾸어 새사람으로 만드시고 새 인생을 살 수 있기까지 키우고 인도하셨습니다. 본래 그는 아버지 야곱의 사랑을 독차지하며 응석받이로 자랐습니다. 아버지의 편애 때문에 아픔을 당한 형들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던 중에 애굽으로 팔려가서 노예 생활을 하면서 그는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창세기는 그 사실을 이렇게 서술합니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창 39:2a) 요셉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났고 그분과 동행을 시작하였습니다. 추구하는 바가 달라졌고, 시각도 달라졌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떤 사건이 일어나면 자신의 입장에서 그것을 보고 반응합니다. 상대방의 입장에서 그 사건을 보기도 어려우며, 하나님의 시각으로 보기는 더더욱 어렵습니다.

십여 년 동안 죽도록 고생한 끝에 총리가 되었다면 크게 기뻐할 일이지만, 그렇다고 그가 억울하게 당한 일들을 쉽게 잊지는 못합니다. 귀공자처럼 살던 그가 왜 노예가 되어 말도 통하지 않는 애굽으로 팔려왔습니까? 형들이 그를 죽이고자 하다가 팔아버렸기 때문입니다. 이 사건은 그의 인생에 지울 수 없는 커다란 흉터를 남겼습니다. 총리가 된 그는 당당하게 형들의 죄를 묻고 복수할 수 있었습니다. “내가 잃어버린 13년을 어떻게 책임질거야? 당신들은 악을 행하였으니 그에 상응하는 벌을 받는 게 마땅해” 라고 문책하는 게 당연합니다. 그런데 요셉은 전혀 다른 말을 합니다.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창 45:7-8a) 그는 피해자인 자신의 입장에서 그 사건을 보지 않고 하나님이 알려주신 관점에서 봅니다. 겉으로는 비극적인 사건이었지만 구원을 받고 보니 그 속에서 하나님의 선한 계획이 보였습니다. 요셉의 시각은 이처럼 넓어졌습니다. 시각이 넓어지니 형들을 용서하는 것도 어렵지 않았던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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