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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단상]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합니다(시편 63편 1절~4절)_샘물교회 문갑주 목사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합니다(시편 63편 1절~4절)

샘물교회 문갑주 목사

  하루는 아들과 길을 가는 중이였습니다.  제 눈에 무언가 흥미를 끄는 것이 발견 되었는지 잡은 손을 놓고 앞으로 막 뛰어가는 것이였습니다.  보통은 아이를 지켜보곤 하는데 그날은 왠지 장난치고 싶어서 얼른 큰 나무 뒤로 몸을 숨겼습니다.  그리고 아이가 어떻게 하는지 숨어서 몰래 지켜봤습니다.  자신의 흥미를 끌었던 것에 한참을 집중해서 보던 아들은 이제 좀 시들해졋는지 뒤를 돌아보아 아빠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으레껏 제가 뒤에 오고 있겠거니 생각했겠지요.  그런데 당연히 곁에 있을 줄 알았던 아빠가 사라진 것을 보고 막 찾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두리번 거리며 주위를 살피고, 곧 왔던 길을 되돌아서 와서는 찾는 데에 여념이 없습니다.  그때부터는 슬슬~ 겁이 나는지 “아빠, 아빠”하며 소리를 높여 부르기 시작하더군요.  조금씩 울먹거리던 목소리는 곧 울음으로 이어지고 아빠가 없어졌다는 사실에 안절부절 못하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더 이상 장난을 치면 안되겠다 싶어 아들의 이름을 부르고 “아빠, 여기있지!” 하면서 뛰어나가 아이를 곡 안아주었습니다.  그제서야 빨갛게 상기된 채 울고 있던 아들은 울음을 멈추고 제 품에 안겨 환하게 웃었습니다.  아이를 키우는 부모님이라면 아마 다들 이런 경험이 한 번쯤은 있을 겁니다.  부모는 아이가 어떻게 하나 보려고 한 번 궁금하기도 하고 해서 장난을 칩니다마는, 그러나 막상 어린 아이들은 아빠나 엄마를 잃어버린 줄 알고 얼마나 심각한지 모릅니다. 아이들에게 있어서 부모를 잃는다는 것은 정말 최악의 상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실, 바로 옆에서 같이 손을 잡고 가던 아빠나 엄마가 가봐야 어디 멀리 갔겠습니까?  거기 어디 있겠지요.  조금만 기다리고 있으면 곧 제풀에 지쳐서 나타납니다.  그러나 아이들 중에서 뭐 조금 있으면 제가 나타나겠지 별 수 있겠느냐 하면서 여유있게 과자나 먹고 아이스크림 먹으면서 엄마 아빠가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경우는 없습니다.  아이들에게는 잠시라도 아빠나 엄마나 보이지 않는 그 상황은, 세상이 다 무너져 내리는 것과 같은 충격이요 공포 그 자체입니다.  아이들에게 이것처럼 무섭고 절망적인 상황은 없습니다.  이것이 아이들입니다. 아이들에게는 엄마 아빠가 전부입니다. 잠시라도 한시라도 부모에게서 떨어져 있는 것을 견디지 못합니다. 왜 입니까? 어린 아이들은 거의 전적으로 부모를 의지하고, 부모에게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잠시라도, 한 순간이라도 부모를 놓치고서는 결코 평안할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의 다윗도 이렇게 하나님을 간절하게 찾고 있습니다.  마치 숨어버린 엄마를 찾아 울면서 헤매는 아이들처럼, 침묵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그분을 갈망하며, 그분을 찾고 있는 다윗을 볼 수 있습니다. 

  먼저 1절을 보면,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황폐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라고 했습니다. 

  1. 내가 간절히 주를 찾습니다

  지금 다윗이 주님을 찾고 있습니다. 아주 간절히 심각하게 주님을 찾아 헤매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디 계십니까? 마치 어린 아이가 잃어버린 엄마 아빠를 찾아 헤매듯이 그렇게 하나님 아버지를 찾으며 부르짖고 있습니다.  그동안 다윗은 얼마나 하나님과 가깝고 친밀한 사람입니까?  믿음의 사람들 중에서도 단연 다윗만큼 하나님과 친근하고 깊은 대화를 나누는 사람이 있을까 할 정도로 그는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는 자였습니다.  언제나 하나님께 묻고 하나님의 응답을 받으며, 그분의 음성을 듣는 가운데 항상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이 다윗이였습니다.  그런데 그런 그가 이렇게 마치 하나님을 잃어버린 것처럼, 하나님을 찾고 있다는 것은 참 의외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선 우리가 본문에서 발견하는 것은 다윗이 지금 뭔가 상당히 심상치 않은 상황과 형편 가운데 처해 있다는 사실을 인지할 수 있습니다. 지금 다윗이 거처하고 있는 곳이 어디입니까?

  2. 물이 없어 마르고 황폐한 땅에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맨 앞에 보면 이 시편은 다윗이‘유대 광야에 있을 때 지은 시’라고 되어 있습니다.  유대 광야는 나중에 세례 요한이 거처하던 곳이었으며, 예수님께서 사십 일간 금식하며 기도하신 후에, 사단의 시험을 물리 치셨던 곳이기도 합니다.  광야는 잘 알다시피 사막과 같이 황량하고, 척박한 땅입니다. 사람도 살지 않고, 생명체도 존재하기 어려운 외롭고 쓸쓸한 곳이죠.  그런데 지금 다윗이 이 광야에 있습니다.  왜요?  그는 지금 사울의 미움을 받아 왕궁에서 쫓겨나서 도망치고 있는 상황이였습니다.  목숨이 경각간에 달린 위기의 상황이였습니다.  수많은 첩자들과 사울과 내통하는 자들이 도처에 깔려 있어서, 시시각각으로 다윗의 움직임에 대한 보고가 상부로 올라가고 있습니다.  다윗이 가는 곳마다, 움직이는 곳마다, 사울의 군사들이 그를 쫓습니다.  현재 결국 그는 아둘람 굴로, 십 황무지로, 헤렛 수풀로, 또 엔게디로 사람이 살지 아니하고 인적이 드문 유대 광야의 이곳저곳을 누비며 겨우 겨우 하루하루 목숨을 연명하고 있는 신세인 것입니다.  

  이런 위급하고 절박한 상황 속에서 그는 하나님께 기도하고 부르짖으며 하나님의 응답과 도우심을 구했습니다.  더군다나 지금 그는 홀홀단신 도망자의 신세도 아니였습니다.  자신을 따르는 무리들 400명의 공동체 운명까지 짊어지고 가고 있었습니다.  자기 한 사람의 생명만 아니라 공동체의 운명까지 짊어지고, 순간순간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모르는 일촉즉발의 상황을 대비하고 있어야 하는 초긴장 상태입니다.  그는 아마도 잠을 이룰 수 없었을 겁니다.  잠간 잠이 들었다가도 다시 새벽 동이 트기도 전에 일어나 다시 부르짖고 기도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보통 이런 상황 가운데 하나님께 기도하며 매달리게 되면 주로 어떤 간구를 드리게 됩니까?  “하나님, 나를 살려주십시오. 나를 구해주십시오. 내 원수를 갚아주십시오. 내 문제를 빨리 좀 해결해주셔야 겠습니다” 이렇게 기도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오늘 다윗의 기도를 보면 주님을 간절히 찾고 부르짖으며 매달리는데, 그렇게 주님을 찾는 내용이 보통 평범한 기도와는 다른 좀 특별한 기도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3.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합니다

  저 같으면 이렇게 기도할 것 같습니다.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황폐한 땅에서” 그 다음에 이렇게 기도가 이어지겠지요. “주님 목이 마르고 배가 고프니 빨리 여기서 좀 벗어나게 해주세요.  도저히 못 살겠습니다.  여기가 사람 살 곳입니까?  언제까지 여기 이렇게 버려두실 작정이십니까?  도대체 여기서 빨리 저를 건져주시지 않으시고 뭘 하고 계시는 겁니까?”  내 앞에 닥쳐있는 육체의 문제, 육체의 필요부터 해결하고자 급급했을 것 같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합니다.  영혼의 갈급함은 차치하고서라도 육체의 연약함과 무너짐 앞에서 그 부분 부터 채워야되지 않나라구요.  육체의 필요부터 채워져야 영혼의 문제도 돌아볼 겨를이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육신의 질병 앞에 영혼의 침체에 빠져도 육체의 치료에 급급해집니다.   가정과 사업과 관계의 모든 문제들 앞에서도 닥쳐있는 문제의 해결에 골몰하지, 그것을 영적인 문제로 인식하지 않을 경우도 허다합니다.  무엇이든 우리는 눈에 보이는 현상적인 육체의 문제에 늘 급급하여 골몰하며 침체의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합니다.   

  그런데 다윗의 기도는 다릅니다.  그는 지금 매우 영적인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는 물이 없어 메마르고 황폐한 땅에서 자신의 육신적인 필요와 갈망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영혼의 소원과 갈망을 주님께 아뢰고 있는 겁니다.

  지금 다윗에게도 당장 하나님께 간구하고 아뢰어야 할 현안들이 산적해 있습니다. 한 번 생각해보세요.  400명의 오합지졸을 이끌고, 광야로 수풀로 숲 속으로 사울 왕의 정예부대를 피해 다니는 상황입니다.  그 많은 인원이 먹어야 살 것 아닙니까?  하늘에서 만나와 메추라기가 쏟아져 내려오는 것도 아니고, 식량 확보도 큰 문제였습니다.  사울은 시시각각으로 포위망을 좁혀 옵니다.  다윗은 늘 퇴로를 확보해 두고 있어야만 했습니다.  어디 거하든지 도망칠 곳을 염두에 두고 미리 생각하고 있어야만 합니다.  그런데 그 좁은 이스라엘 바닥에서 어디로 도망을 갑니까?  또 누구 하나 다윗과 그 무리를 환대하고 반겨주는 이 없었습니다.  다윗을 숨겨 주었다가  다 사울의 손에 죽임을 당하게요?  당시 다윗은 현상금이 걸린 수배자였고, 이스라엘에서 가장 위험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니 다윗이 갈 데가 어디 있습니까?

  오죽하면 나중에는 다윗이 이스라엘과는 원수 관계인 블레셋의 가드 왕에게로 망명을 해서 그의 신하로 들어가기도 하지 않습니까?  얼마나 다급했으면 다윗이 그런 선택을 내릴 수밖에 없었을까요?  심지어 그일라 성 거민들은 다윗이 그렇게 어려움 속에서도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구해주었는데, 사울이 쳐들어오자 다윗을 배반합니다. 그래서 다윗은 목숨을 걸고 도와주고도 배반을 당하는 상황을 수도 없이 직면해야만 했습니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다윗과 그 무리들이 안전하게 거처해야 할 은신처도 큰 문제였습니다.  다윗에게도 이러한 절박한 현실적인 문제들이 있었습니다.  다윗이 이러한 현실을 도외시하는 몽상가는 아니었습니다. 그는 지혜롭고 탁월한 전략가입니다. 그가 현실을 외면하고 영적인 문제만 붙들고 있을 바보는 아닙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지금 자기 발등에 떨어진 불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아뢰지 않습니다.  그는 오히려 자신의 영혼의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갑니다. 왜 입니까?

  다윗은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이러한 기도를 드릴 수 있었을까요?

  여러분, 다윗이 이런 문제들을 가지고 왜 기도하지 않았겠습니까? 아마 밤잠을 못 이루고 몸부림치며 씨름했을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렇게 기도하고 간구하고 소원을 아뢰며 나아가는데도 불구하고 별로 신통한 응답이 없는 겁니다.  열심히 기도하고 간구하고 부르짖음에도 불구하고 상황이 별로 달라지거나 바뀌지 아니하고 여전히 답답하고 캄캄한 상황이 계속되는 겁니다.

  사울의 세력은 여전히 살기등등합니다. 다윗을 모함하고 참소하는 자들은 사울에게 빌붙어 득세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사울이 엉뚱한데 정신을 쏟고 있는 동안 나라의 기강은 흐트러지고, 공의가 바로 세워지지 않아 백성들의 탄식과 원성은 하늘을 찌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을  새로운 왕으로 세워주시겠다고 기름 부어 주신 하나님께서는 어쩐 일인지 잠잠하시고 움직일 생각을 안 하시고 계신 것 같아 보이는 겁니다.

  아니 그렇게 고생을 하고 또 그 오랜 세월을 간절히 기도했으면 무슨 액션을 취하셔야 할 것 아닙니까? 아니면 언제쯤 응답을 주시겠다는 기약이라도 주시던가. 아니면 최소한 무슨 사인이라도 보여주셔야 할 것 아닙니까? 봐라, 사울의 얼굴의 낯빛이 점점 변하고 있지 않느냐? 지금은 저렇게 혈기 등등하지만 조금만 지나면 이제 풀이 죽을 것이다.  이제 죽을 날이 가까웠느니라, 조금만 더 기다려라…는 최소한 이런 사인만 좀 주셔도 덜 답답할 것 아닙니까? 그러나 아무 응답이 없는 겁니다.

   이쯤 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아무리 다윗이라도 지치지 않겠습니까?  낙심이 되지 않겠습니까?  절망감이 들기 시작합니다.  처음에는 열심히 부르짖고 기도하다가도. 점점 이런 시간이 계속되면 기도도 다 부질없는 짓이 아닌가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외면하시는 것 같아 서운하고 섭섭하고 그래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이 점점 힘이 들고 괴롭습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마음이 조금씩 떠나기 시작합니다.  그의 마음이 점점 하나님을 외면하기 시작하고, 하나님을 등지기 시작하는 겁니다.  깊은 영적인 침체에 들어가게 되는 겁니다.  다윗은 유대 광야에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는 것과 같은 깊은 절망과 좌절의 세월을 보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그러던 어느 날입니다.  풀 한 포기 제대로 나지 않는 그 광야를 쓸쓸히 거닐던 그는, 지금 자신의 영혼이 이 광야와 같이 너무나 메말라 피폐한 상태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먼지가 바람에 날리고, 나무나 수풀이나 생명이랄 것도 없는 황량한 광야… 바람에 흩날리는 흙과 모래와 생명 없는 황무지가 끝없이 펼쳐져 있는 광야를 바라보며 다윗은 서글픈 눈물을 흘리기 시작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워주시겠다고 기름 부어 주신 내가 어쩌다가 이렇게까지 되었는가? 그래도 내가 한 때는 하나님께서 믿음과 용기를 주셔서 골리앗을 쓰러뜨리고 나라를 구하지 않았는가? 그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을 선포하던 내가 어떻게 이렇게 하나님도 느끼지 못하는 이런 무감각하고 딱딱하고 생명이 완전히 메말라 버린 이 광야와 같은 모습으로까지 전락하고 말았는가?

  그가 이렇게 탄식하며 눈물 흘리고 있을 때, 그는 저 깊은 내면에서 들려오는 영혼의 간절한 갈망과 부르짖음 소리를 듣기 시작합니다.

  비를 기다리는 저 메마른 황무지와 같이, 지금 그는 자신의 영혼이 너무나 간절히 주님의 은혜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의 영혼이 주님의 임재를 목마르게 사모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가 오늘 본문과 같이 하나님 앞에 다시 기도하기 시작했던 겁니다.

  “주님, 내 영혼이 주님을 갈망합니다! 내 영혼이 간절히 주님을 찾습니다”

  여기서 다윗이 얻은 귀중한 교훈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당장 시급한 인생의 모든 문제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 영혼의 소원과 갈망이 채워져야 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내 모든 문제가 해결되고, 내 모든 필요가 채워진다고 해도, 내 영혼이 주님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것이 내게 결코 평안과 만족을 줄 수 없다는 사실을 절감합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당장이라도 임하셔서 사울의 목을 치시고, 그를 뒤쫓는 모든 군사들을 다 쓰러뜨리시고, 그를 모함하고 참소하던 모든 악한 원수들을 다 하루아침에 멸하실 수 있습니다. 다윗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시고, 그의 모든 필요를 한 순간에 채워주시는 것은 일도 아닙니다.  지금이라도 당장 그를 왕위에 앉혀주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 이 모든 것이 없어도 살 수 있지만, 그러나 주님, 저는 주님이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어쩌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다른 것은 몰라도, 하나님이 없이는 살 수 없다는 사실을 깊이 깨닫게 하시기 위하여 우리가 영적으로 침체 상태에 내려가는 것을 그냥 내버려두시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계속해서 이렇게 기도합니다.

  3절을 보면, “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

  내 영혼이 주님의 사랑과 자비를 느끼고 경험하지 못한다면,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는 겁니다. “주의 은혜가 내 생명보다 더 가치 있고 소중합니다”  어린 아이 같이 철저하게 하나님만을 바라고 의지하고 있는 우리의 영혼은,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느끼지 못하고 그 임재의 은혜와 영광을 경험할 수 없을 때, 마치 아빠의 손을 놓쳐버린 어린 아이처럼 공황 상태에 빠집니다.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만족을 누리지 못한다면, 우리의 삶에 하나님이 주시는 행복은 없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믿든지 믿지 않든지,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영혼의 소원은 오직 한 가지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것이요, 하나님의 은혜를 느끼고 경험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영혼의 바람과 소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입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은 다른 어떤 은혜가 아니라, 바로 이것 하나만을 맛보고 누리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이것이 영혼의 갈망이며 열망입니다. 이것이 채워지기 전까지 그러므로 우리의 인생은 사실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무엇을 먼저 구해야 하는지를 주님은 오늘 다윗을 통해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질병도 나아야하고 육체의 연약함이 강건해져야 하지만, 먼저 그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 자신입니다.  어려운 재정적인 문제도 해결이 되어야 하고, 인간관계의 문제도 풀려야 하지만, 그보다 먼저 필요한 것은 바로 하나님입니다.  우리에게는 바로 하나님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인생에 가장 필요한 것은 바로 하나님, 그 분 자신입니다.  우리의 문제의 본질은, 외적인 것에 있지 않습니다.  육신의 질병이나 육체의 연약함, 물질의 어려움, 인간관계의 어려움. 등 이런 외적인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문제의 본질적인 근원은 우리의 영혼이 지금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의 품안에서 안식하며 위로를 얻을 수만 있다면, 우리는 어떤 고난도 어떤 어려움도 참을 수 있습니다. 견딜 수 있습니다. 인내할 수 있습니다.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습니다. 능히 순종할 수 있습니다. 반드시 이기고 승리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의 영혼이 메마른 광야와 같은 상태라는 겁니다. 하나님을 느끼지 못하고 하나님과의 깊은 영적 교통의 끈이 끊어져,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힘과 능력과 사랑을 맛보고 누리지 못하고 있는 겁니다. 이것이 정말 큰 문제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주님, 우리의 건강보다 먼저 하나님이 필요합니다.

  돈보다 먼저 하나님이 필요합니다.

  성공보다 하나님이 필요합니다. 

  우리 인생의 모든 것의 안정과 성공보다 더 귀하고 소중한 것은 바로 우리가 하나님을 모시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 우리의 가정에, 사업에, 관계에, 재정에, 무엇보다 우리 심령에 하나님이 필요합니다!“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삶에 오실 때에, 아니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을 느끼고, 하나님의 임재를 놓치지 않고 붙들게 될 때에, 우리의 삶에는 놀라운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3. 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

    4. 이러므로 나의평생에 주를 송축하며 주의이름으로 인하여 내 손을 들리이다

    5. 골수와 기름진 것을 먹음과 같이 내 영혼이 만족할 것이라 나의 입이 기쁜 입술로 주를 찬송하되

  우리 서 있는 곳이 어떠하든지 간에 우리 심령에 주님이 임재하시면 그 입술에서 노래가 터져 나오기 시작합니다.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 한 분으로 말미암아 만족할 때, 이곳이 유대 광야라 할지라도 우리의 입술에서는 주를 향한 노래와 찬양이 흘러나옵니다. 손을 들고 주를 향해 감사의 기도를 드리며 주를 송축합니다.  다윗의 영혼은 골수와 기름진 고기를 먹은 것처럼 만족하여 기쁜 입술로 찬송을 부르며 주께 나아갑니다. 얼마나 놀라운 변화입니까? 어떻게 이런 변화가 일어나게 됩니까?

 4. 바로 주의 날개 그늘아래에 있을 때 가능합니다

    6. 내가 나의 침상에서 주를 기억하며 새벽에 주의 말씀을 작은 소리로 읊조릴 때에 하오리니

    7. 주는 나의 도움이 되셨음이라 내가 주의 날개 그늘에서 즐겁게 부르리이다

    8. 나의 영혼이 주를 가까이 따르니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거니와

  다윗의 영혼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만족을 느낄 때에 그는 자신이 지금 광야의 외롭고 한적하고 쓸쓸한 곳이 아니라, 주의 날개 그늘아래 거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기에 이릅니다.  주의 오른손이 나를 강하게 붙드시고 계시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될 때에 믿음이 생깁니다. 용기가 생깁니다. 하나님의 위로와 능력이 그를 강하게 사로잡기 시작하면서 그는 여전히 광야에 있지만, 그러나 종국에 임할 승리를 확신하게 됩니다.  상황은 여전히 아무런 변화가 없습니다. 그러나 다윗의 눈이 바뀌었습니다. 그의 마음과 생각이 변화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지키시고 보호하시며, 내 원수들은 반드시 주께서 심판하신다고 하는 강한 확신과 믿음이 그를 담대하게 합니다.

  결론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 여러분

  오늘 우리는 어떤 기도를 하나님께 드리고 있습니까?  오늘 우리의 영혼이 소망하고 바라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 기도는, 그 갈망하는 것은 오직 “주님이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내가 서 있는 이 자리는 비록 광야같이 척박하고 고된 자리이지만, 주님이 내 안에 계시면 그곳이 주님의 날개아래입니다.  다윗처럼 성숙된 기도를 드리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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