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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단상] 부부제자 7주시리즈(4)”부부제자 아이덴티티(Identity)”_디모데후서 2장 3-4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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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제자 7주시리즈_4주차_”부부제자 아이덴티티(Identity)”_디모데후서 2장 3-4절

어린 꼬마 아이들이 축구 하는 것을 보면 참 재밌다. 아이들의 공통점은 골대를 보는 것이 아니라 공만 보고 달린다는 것이다. 그래서 공을 따라 우루루 몰려다닌다. 자기가 어디로 가는 지 모르고 오직 공 만을 쫓아다닌다. 결국 그러다 보면 자기 골대에 골을 넣기도 한다. 물론 꼬마들의 이야기라서 웃으며 이야기할 수 있지만, 장성한 사람들이 그렇게 한다면 문제다. 더욱이 전쟁에 나서는 군인이라면 문제는 더 심각하다. 아군과 적군도 모르고, 작전도 모른다면 정말 대책이 없다. 

오늘 본문은 우리의 정체성(identity)을 군인이라고 한다. 3절에 “너는 그리스도 예수의 병사”라고 하신다. 또한 에베소서 6장 12절에는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고 말씀한다. 그러므로 이 땅에 살아가는 사람들은 모두 영적 전쟁 중인 군인이라고 하신다. 전시상황이라는 것이다. 이 전쟁의 상대는 어둠의 주관자들과 악의 영들이라는 것이다. 매일 매순간이 실전 전투상황이다. 이렇게 서로 인사하자. ‘당신은 하나님의 군인입니다.’

누가 좋은 군인인가? 오늘 본문에서는 “병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는”(4절)자라고 한다. 건강한 결혼관계, 맡겨진 직장과 직업, 자녀 양육 등 모두 우리에게 맡겨 주신 귀한 사명이다. 그런 사명을 대하는 자신의 정체성(identity)을 군인(soldier)처럼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결혼생활, 직장생활, 학교생활, 취미생활에 이르기까지 마태복음 6장 33절의 말씀처럼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모든 우리의 일상에서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는 자가 병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는 자이다. 

여러분에게 묻고자 한다. 지금 영적 전투가 실제로 있다고 믿는가? 당신은 영적인 전투 중에 있다고 생각하는가? 이 전투의 아군의 수장은 예수님이시고, 적군의 수장은 사탄이라고 생각하는가? 최근 언제 영적전투를 경험하였는가? 당신은 영적 전투에 나갈 준비가 된 병사(군인)인가? 당신이 잘 준비되었다고 생각하는가? 이 질문이 중요한 이유는 이 질문을 통해 우리는 우리의 정체성(Identity)을 다시금 정비하며 분명히 준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 보기에 캐나다 밴쿠버에서 사는 일반 대중에게 “당신은 영적인 전투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대장되시는 예수님께 당신을 맡기고, 영적 군사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대장 되신 예수님이 이끄시는 영적 전투에서 반드시 참여하시기 바랍니다.”라고 말한다면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예상이 된다. 아니 일반 대중이 아니라 크리스챤 들에게 물어봐도 시큰둥한 반응은 똑같을 것이라고 예상된다. 

말씀을 통해서 보면 지금은 전시상황이다. 우리의 정체성은 분명히 예수님의 군사이다. 그런데 실제 우리의 삶은 그리 전투가 일어나거나 급박하거나 긴급하지 않은 것 같다. False Alarm처럼 들린다. 실제로 전투도 없다. 이런 시기가 지나다 보면 불감증에 걸린 것처럼 더 이상 긴급할 것도 긴장될 것도 없이, 시큰둥한 상태가 된다. 그러다 보면 어떤 사람들은 교회지도자들이 크리스챤 들에게 경각심을 갖게 하려고 예배나 기도회, 특별 모임 등을 만들고 크리스챤 들에게 군인이라는 정체성을 주입하고 전투 중이라고 말하기를 반복하고 있다고 폄하하기도 한다. 

개인적으로 이런 무기력함은 실제 한국 군인으로 복무할 때 느꼈던 감정이기도 하다. 수색대 소대장으로 부임했을 때 나는 완전히 군기와 전투력이 충만하여 바로 전투에 투입되기를 바라듯 두 눈을 부릅뜨고 다녔다. 그런데 우리 부대원들은 다들 눈이 썩은 동태눈알 같았다. 선임장교와 부대 행정관과 상사들은 또 ‘철없는 소위 소대장 왔구먼.’ 하는 태도였다. 나는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 마음이 급한데, 다른 사람들은 너무나 느긋한 것이다. 화가 났다. 애국심은 어디에 처박아 둔 것인가?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실제로 전쟁의 위험성이 없는 상태에서 수없이 반복되는 훈련은 너무나 지루하고 피곤하였다. 전쟁에서 우리 나라를 지키며 적군을 섬멸하는 것을 준비하는 것이 훈련이다. 훈련에서의 땀한방울이 전쟁에서의 피한방울과 같다고 늘 역설한다. 그런데 평화의 시기가 지속될수록 훈련은 정체되었으며 그 과정의 피로감은 증가할 수밖에 없었다. 

준비를 위한 준비라고 할까? 나야 의무 복무 기간 2년 4개월이 끝나면 제대를 하겠지만, 직업군인인 저들은 얼마나 더 지난한 훈련 속에 피곤함으로 쩔었을까? 그리고 금방 전쟁이 날 듯 몰아세우던 초급 장교 소대장이 얼마나 하찮게 생각되었을까? 예를 들어 EPL 축구선수들이 팬데믹 상황에서 축구장에 모일 수 없어서 개인연습만 할 수 있는 기간이 2020년 봄철에 지속되었다. 상대방이 있어야 가능한 스포츠인 축구는 공격과 수비를 번갈아 가야 하는 것인데, 이 축구를 혼자 하고 있으니 무슨 도전이 되고 무슨 열심을 낼 수 있었겠는가? 

누가 그런다. 하이라이즈 빌딩에서 Fire alarm이 울리면 서둘러 나와서 슬리퍼에 잠옷 바람인데 이 때 중국인들이 가지고 나오는 캐리어만 들고 도망가면 그 속에 수억 들어있다고. 물론 인종 차별적인 말이라 그런 농담을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충분히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그 alarm이 지속적으로 false로 울렸다면 누구도 더 이상 믿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나중에는 자신의 집에서 아무도 나오지 않게 할 것이다. (우주의 휘슬러산 정상 False Alarm)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영적 전투가 없는 것이 아니라 우리 바로 눈 앞에서 펼쳐지고 있음을 보여주어야 한다. False Alarm이 아니라 실전임을 경험해야 한다. 실전도 아닌데 누가 목숨을 걸겠는가? 실제도 아닌데 누가 시간을 투자하겠는가? 만약 정말 포탄이 떨어지고, 총알이 빗발치고, 옆에서 동료들이 옆에서 쓰러져 간다면 100% 실감을 할 것이다. 그런데 이 땅에서의 영적전쟁은 그런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유대인들의 옛 이야기 중에 사탄이 자기가 사용해 왔던 무기들을 전시해 놓고 무기를 파는 이야기가 있다. 무기 중에 아주 낡은 무기 하나가 있었는데 거기에 제일 높은 가격이 매겨져 있었다. 한 추종자가 “도대체 이 낡고 오래된 것에 왜 이렇게 높은 가격이 붙어 있는 것입니까?”라고 물었다. 그랬더니 사단이 대답하기를 “너는 이 무기가 얼마나 유용한 것인가를 모른다. 나는 이 무기로 수많은 불신자들을 쩔쩔매게 하였고,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넘어지게 했다.”고 하였다.  그 무기 밑에는 “낙심”(discourage) 이라고 쓰여 있었다. 

사람 마음 속에 이 “낙심”만 집어넣으면 사람들은 더 이상 아무 것도 하지 않으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낙심이라는 도구를 사탄이 가장 유용하게 사용하게 되었단다. 그렇지 않은가. 신앙생활 잘 하다가도 어떤 이유에서건 낙심하게 되면 아무 것도 하지 않으려는 사람이 되기 때문이다. 

갈라디아서 6장 9절에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지니 때가 이르면 거두리라”고 말씀하신다. 무슨 말씀인가? 우리 삶의 영적 전투는 즉 때가 이를 때까지는 선을 행하는 것을 지속해야 하는 싸움이라는 뜻이다. 선을 행하는 것이 바로 영적전투가 된다는 말이다. 이를 방해하는 사탄이 다양한 모습으로 선을 행하지 못하도록 할 것이라는 것이다. 선을 행하지 않는 것이 악을 행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피부병의 특효약 606호라는 약이 있다. 이 이름은 605번까지 실패했는데 낙심하지 않고 계속하다가 606번만에 성공해서 606호는 이름을 붙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 말이 그렇지 605번의 실패를 겪었다면 606번에 도전하기라 정말 쉽지 않다. 그러나 낙심하지 않고 선을 행함으로 특효약을 발명하게 된 것이 아닌가. 

제 1차 세계대전 때 야전병원에서 다친 군인들을 치료하던 플레밍은 의사로서 한계를 느꼈다. 상처가 났을 때 소독하거나 상처가 심해진 부위를 절단하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1918년 제 1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플레밍은 본격적으로 세균 감염 치료법을 얻기 위해 연구를 시작했다. 연구에 연구를 하였지만 결과는 좋지 못하였다. 플레밍은 어느날 세균 배양 접시의 뚜껑을 열어두고 휴가를 다녀오는 실수를 했다. 푸른곰팡이가 잔뜩 퍼져 있었다. 플레밍이 배양접시를 청소하려다가 자기도 모르게 습관대로 배양접시를 관찰했는데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푸른곰팡이 주변에는 세균이 자라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그는 즉각 푸른곰팡이가 세균의 성장을 막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이것을 통해 항생제를 만들었는 데 그것이 바로 ‘페니실린’이다.

페니실린은 2차 세계대전 때 수많은 생명을 살리는 데 사용되었다. 그리고 1945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았다. “나는 자연에 이미 존재하는 물질을 우연히 발견했을 뿐이다.”라고 말하였지만 실제로 그가 세균을 이겨낼 물질을 찾기 위해 자신의 생을 헌신하지 않았으면 찾아내지 못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때가 이르면 거두리라’는 말씀에 실제 예라고 생각한다. 영적 전투는 교회에서만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 가정에서, 우리 직장에서, 우리 일터에서, 우리 학교에서 일어나고 있다.  

기회는 우연히 주어지지 않는다. 찾고 노력하는 자에게 다가온다. 우리의 영적 전투 현장에서도 마찬가지다. 영적 전투의 현장은 멀지 않다. 오늘 우리의 가정이 바로 그 현장이다. 우리의 직장이나 일터가 바로 그 현장이다. 학교가 바로 그 전투현장이다. 영적 전투의 현장에서 일어나고 있는 전투를 볼 수 있기를 축원한다. 그리고 그 곳에 나를 보내신 이유를 분명히 알자.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기 위해 찾고 구하고 두드리는 자에게 주시는 은총이 분명히 있음을 믿자. 

이재철 목사님은 뒷골목에 번듯한 간판도 없지만 설렁탕 애호가들이 원근 각지에서 찾는 집이 있었다고 한다. 뭐니뭐니 해도 설렁탕 국물에서 진가를 발휘했는데 1960년대 초부터 단 한 번도 불이 꺼진 적이 없는 대형 솥에서 고아져 나오는 설렁탕 국물 맛을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그 집에서만 맛볼 수 있는 진국이었다. 그 진국을 얻기 위해 설렁탕집 주인 할머니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매일 새벽 3시에 대형 솥뚜껑을 열고 삽 모양의 대형 주걱으로 설렁탕 국을 저어 주어야 국의 누린내가 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할머니는 젊은 시절 설렁탕집을 시작한 이래 식당에서 새우잠을 자면서 매일 새벽 3시에 불 위의 설렁탕 국을 저어야 했다. 설렁탕 애호가들이 사랑했던 그 집 진국은 주인 할머니의 그와 같은 지성의 산물이었다. 

손님을 만족케 하기 위해 새벽 3시에 일어나 설렁탕 국을 젓는 사람이 있다. 병사로 모집한 분을 기쁘게 하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 과연 어떤 것을 하고 있는가? 부부제자로서 어떤 것을 감당해 내고 있는가? 혹시 낙심한 후에 회복하지 못하고 그저 그런 삶을 살고 있지는 않은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결단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지 함께 찾는 부부 되길 축원한다. 그런 부부를 응원하고 또한 도전하는 교회 되길 소망한다. 또한 자녀들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도록 양육하는 부모 되길 도전한다. 여러분, 부부가 좋은 군사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다 보면 서로 싸울 시간이 없다. 이제 학교가 개학한다. 학생들은 학교에서 ‘나는 하나님의 군사’라는 Identity로 보면 영적전투가 일어나는 현장을 보게 될 것이다. 우리 삶의 영적전투 현장에서 낙심(lose heart)하지 않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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