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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단상] 부부제자 7주 시리즈(6)”부부제자의 속사람(Inward Man)”

부부제자 7주 시리즈_6주차_”부부제자의 속사람(Inward Man)”

고린도후서 4:16-18

지난 금요일에 임플란트를 심는 약속을 하고 치과를 가게 되었다. 몇 개월 전에 어금니를 뽑게 되었고 한참이 지나서 임플란트 시술을 받게 되었다. 그런데 임플란트를 심은 것이 아니라 먼저 사랑니를 빼야한다고 했다. 어금니를 뺀 곳에 염증이 생겼는데 그곳에 누워있는 사랑니를 빼지 않으면 임플란트를 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사랑니가 옆으로 누워 있어서 자칫 잘못하면 신경을 건드리게 될 수도 있다고 치과의사선생님이 그러신다. 혹시라도 말을 못하게 될 수도 있으니 치료동의서에 서명이 필요하다고 하셨다. 서명을 하였고 마취를 했다. ‘우지끈 우지끈’ 사랑니가 쉽게 빠지질 않으니, 조각조각내서 뽑으셨다. 기도가 절로 나왔다. “기적이 일어나게 해주소서. 신경이 손상되지 않게 해 주소서. 치과의사선생님이 꽤 오랜 시간 동안 치과를 운영하시고 수술경험이 많으시니 그 실력과 노하우와 시행착오로 얻었던 경험까지 그대로 드러나는 시간이 되게 하여 주소서. 그의 이제까지의 경험의 온전체가 녹아 있는 시술이 되게 하여 주소서.”

사랑니 뽑으면서 그동안의 모든 신학적인 단어들이 다 나왔다. 내가 더 이상 말을 못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니, 하나님 밖에는 의지할 분이 없었다. 하나님이 없다고 하고, 죽은 다음에는 아무 것도 없이 모든 것이 소멸된다고 믿는 사람들도 이런 상황에 처해진다면 저 마음 깊은 곳에서 무엇이라 기도할까 궁금해졌다. 하나님의 기적을 기대하고, 그 초월적인 능력이 의사 선생님과 간호사 선생님이 실수하지 않고 수술이 잘 마쳐지기를 바라고 소망하지 않겠는가? 

이제 나이가 들어가니 정말 겉사람은 계속 고칠 곳이 많아진다. 계속 수선(?)하며 고쳐가며 잘 사용해야 한다. 그럼에도 속사람은 어린 아이처럼 하나님을 찾고 구할 수 있음에 참으로 좋았다. 꼭 새로워지는 것 같았다. 오늘 본문 16절에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 지도다” 우리에게 겉사람과 속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부부끼리 함께 앉아 있다면, 지금 서로를 바라보자. 겉사람은 분명히 연애할 때와 신혼 때의 그 풋풋한 모습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그 속 사람은 어떠한가? 이렇게 고백해 보자. “겉사람은 중후해지고, 속사람은 늘 새롭네요”

부부제자는 예수님을 영접함으로 옛사람이 죽고 우리 안에 새로운 “속사람”이 형성된 부부를 말한다. 이런 부부제자는 보이지 않던 영적인 세계에 눈을 뜨게 된 자들이다. 이전 까지는 소중한 것이 돈과 명예와 세상의 재미였다면 이제는 소중한 것이 말씀과 영원한 삶이며, 하나님의 동행, 성결, 거룩함 등으로 바뀌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이 속사람이 자주 변덕을 부린다는 것이다.  ‘변덕이 죽 끓듯 하다’라는 말이 있듯이 부부사이에도 Up and Down이 있다. 관계가 좋을 때도 있지만, 나쁠 때도 있다. 항상 일정하면 좋겠지만 왠만해서는 그렇게 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각자의 속사람이 지금 어떤 상태인가 확인해야 한다. 

보통은 그냥 놔두면 우리의 속사람은 강해지는 쪽이 아니라 약해지는 쪽으로 간다. 시험에 드는 쪽으로나 문제에 빠지는 쪽으로 가게 되어있다. 왜냐하면 우리 눈에 속사람은 잘 안보이고, 또한 타인의 눈에도 잘 안보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람을 보면 무엇이 보이는가? 겉사람이 보인다. 저는 사람을 양파와 같다고 정의한다. 양파는 여러 겹으로 되어 있지만 실제로 자르기 전까지는 겉모습만 보인다. 사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의 속사람보다는 겉사람에 엄청나게 신경 쓴다. 겉사람을 위해서 엄청나게 돈을 쓴다. 명품으로 치장하고, 옷을 구입하고, 신발을 산다. 리얼터 하시는 분에게 들었는데, 리얼터를 하려면 좋은 차를 일단 구입하고 일을 시작해야 한다고 한다. 왜냐하면 고객들은 좋은 차를 타고 다녀야 일단 자신에게 신뢰를 보이고 안심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거래 성사률이 높아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울며 겨자먹기로 제일 먼저 타고 다니던 차부터 럭셔리한 차로 바꾼다는 것이다. 

신앙생활을 오래했다고 속사람이 그냥 강건해지지 않는다. 성경과 신학적 지식이 많다고 속사람이 건강한 것이 아니다. 신학박사, 신학교수, 목사, 장로, 권사라는 직분과 속사람의 강건한지의 여부는 솔직히 별개이다. 신학박사님이 아내에게 정기적으로 언어폭력과 가정폭력을 일삼는 경우도 많으며, 권사님이 며느리에게 혼수가 부족하다면 구박하기도 한다. 새벽예배 한 번도 안빠지는 장로님이 탈세하려고 꼼수를 부리기도 한다. 이 모든 과정에 부부가 공범이 되기도 한다. 어떤 경우에는 이런 배우자로 인해 참으로 참기 힘든 생활을 하는 사람도 많다.

보기에는 대단한 믿음을 가진 사람처럼 보일 수 있으나 속사람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무너진 사람을 만나는 것도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것이 단시간에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말씀을 가까이함에서 멀어지고, 기도하지 않으며 하루를 살아간다면 우리의 속사람은 서서히 무너지다가 결국에는 붕괴한다. 꼭 알레스카의 빙하처럼 어느 순간까지는 외관상으로는 전혀 문제가 없는 듯 하지만, 어느 순간 갑자기 빙하가 우루루 무너지는 것과 같다. 

우리들은 어떤가? 요즘 언제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해달라고 기도한 적이 있는가? 요즘 속사람을 위해서 돈을 써 본적이 있는가? 명품 가방을 사려고 몇 달간 돈을 저축하고, 오매불망 바라보는 그 수많은 시간을 보내면서도 정작 자신의 속사람의 강건함을 위해서는 말씀묵상에 시간을 투자하고 신앙서적을 구입하거나 세미나 등을 수강한 적이 있는가? 신상상품은 다양한 루트로 구하려고 사방팔방 애쓰면서도 이 땅에 소외된 사람들을 위해서는 한 푼도 쓰고 있지 않고 있는 것은 아닌가? 부부끼리 서로의 속사람에 대해서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누어 본적이 있는가? 속사람의 강건함을 위해서 어떤 것을 같이 하면 좋을 지 고민하고 함께 기도해 본적이 언제였는가?

어느 미국의 대통령 후보가 “문제는 경제야, 바보들아”라는 캐츠프레이즈로 현직 대통령이 경제적인 어려움을 해결하지 못하는 것을 꼬집었다. 결국에는 차기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던 적이 있다. 개인적으로 이 땅에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던지고 싶은 캐치프레이즈는 “문제는 속사람이야.”라고 말하고 싶다. 왜냐하면 겉사람은 사용 한도가 정해져 있지만, 속사람은 사용한도가 영원이기 때문이다. 겉사람의 사용한도는 죽음과 함께 끝난다. 그러나 속사람은 사용한도에 끝이 없다. 오늘 본문 18절에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 하신다. 즉 보이지 않는 영원한 것에 잇닿아 있는 것이 우리의 속사람이기 때문이다. 

이솝 우화에 ‘요술쟁이와 생쥐’라는 이야기가 있다. 생쥐 한 마리가 요술쟁이의 집에 살았다. 공교롭게도 그 집에 고양이도 있어서 생쥐는 공포에 질렸다. 요술쟁이는 불쌍하게 생각한 나머지 생쥐의 겉모습을 고양이로 만들어주었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개를 무서워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고양이 모양의 생쥐를 다시 개로 만들어주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호랑이가 무섭다고 한다. 실망한 요술쟁이는 이렇게 말했다. “너는 겉모양만 바뀌었지 속은 언제나 생쥐의 마음이니 무엇으로 변해도 가망이 없다. 다시 생쥐가 되어라.” 웃픈이야기지만 이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겉사람이 아무리 바뀌어도 속사람의 수준이 바로 그 사람이다.’라는 교훈을 얻을 수 있다. 겉사람 보다 속사람이 더 중요하다는 이야기이다.  

예수님도 속사람이 문제임을 아셨기에 히브리서 5장 7-9절에 예수님께서 순종을 배우셨다는 말씀이 나온다.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이 불순종을 일삼다가 순종하는 법을 발견했다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순종을 지속적으로 연습함으로써 불순종하고 싶은 유혹을 받을 때도 한결같이 순종하셨다는 말이다.

우리가 믿음을 시작하면 예수님을 닮게 되는 일이 시작된다. 그래서 점점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을 성화(sanctification)라고 한다. 이 성화는 속사람의 변화이다. 속사람이 늘 새롭게 변화하는 것이다. 어제와는 다르게 새롭게 변화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저 구원받은 것으로 만족하며 살아갈 수 없다. 여러분, 그냥 피아노 앞에 앉기만 하면 갑자기 베토벤의 소나타를 즉석에서 연주할 수는 없다.  모스크바행 비행기에서 내리는 순간 한 번도 안 해 본 러시아어를 유창하게 할 수는 없다. 또한 단 한 번의 기도가 마음과 정신과 육체의 온전한 헌신이 가능하도록 할 수 없다. 

우리 자녀들은 영어가 편하다. 그러나 어른들은 제2외국어인 영어를 하려면 열심히 공부하고 발음연습도 해야 한다.  왜 그렇게 하는가? 그 언어가 사용되는 장소에서 편안함을 느끼고 싶거나 그 언어로 된 책을 읽거나 영어를 사용하는 사람들과 온전한 의사소통을 하고 싶기 때문이다. 따라서 언어를 배운다는 것은 뚜렷한 목표를 염두에 두고 하는 일임에 틀림없다. 제2의 언어를 배운 사람에게 최고의 칭찬은 “혹시 원어민이세요?”라고 하는 말일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처음에는 너무나 힘든 여정이었다. 그럼에도 열심히 노력하면 할수록 더 자연스러워진다. 언젠가는 그 언어를 유창하게 말하는 때가 온다. 이처럼 천국의 원어민이 되기 위해서는 이 땅에서의 준비가 필요하다. 이 땅에 있는 동안이야말로 이 준비를 할 절호의 기회다. 

어떤 합창단 지휘자는 상당 기간동안 방치되었던 시골 교회의 성가대를 맡게 되었다. 오랫동안 연습해도 별로 나아지지 않았던 터라 새로운 지휘자는 그들이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구분하는 것부터 시작했다. 형편없다거나 곡조에 맞춰 부르라고 소리치지 않았다. 사실 그렇게 해봐야 좌절감만 더 많이 생기고 그다지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지휘자는 현재 있는 모습 그대로 봐주고 그 안에서 함께 연습했다. 그는 생각했다. 지휘자가 있는 이유는 그들이 노래 부르는 법을 배울 수 있게 돕기 위해서라는 점이다. 놀랍게도 그 성가대는 정말로 나중에는 노래를 제대로 부를 수 있게 되었다. 성가대원들은 똑같은 사람들이었으나 새로운 소리로 부를 수 있게 된 것이다. 왜냐하면 자신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았고 더 나은 소리를 내는 법을 배웠기 되었기 때문이다. 

얼마전 트위터에 베를린 오페라 악단에서 악기를 연주하는 한 자매가 글을 올린 것이 Viral이 되었다. 내용은 이렇다. “베를린에서 오페라 일하는 첫날에 지휘자님이 ‘제발 모르는 것, 못하는 거 티내라.’라고 말하셨다. 서투른 거 숨기는 학생만큼 가르치기 어려운 사람도 없다고, 확 못하고, 모르고 그래야 잘 배운다고… 그날 내가 진짜 못했기 때문에 응원이 됐다. 아직도 생각하며 용기 낸다.”라는 글이었다.

아마도 하나님도 이런 마음이시지 않을까? 하나님은 우리의 있는 모습 그대로인 자만심과 두려움, 엉망진창의 모습, 노골적인 불순종과 죄로 가득한 우리를 만나러 오셨다. 예수님의 우리 인생의  새로운 지휘자가 되셔서 함께 악보를 보고, 의미를 이해하게 하시고, 화음을 알아차리게 하시고, 멜로디의 형식을 느끼게 하시고, 호흡과 발성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알려주신다. 그러다가 조금씩 곡조를 맞추게 되고 노래를 부를 수 있게 해주시고, 악기를 연주할 수 있게 해 주신 것이다. 

속사람의 성장은 배워야 할 언어이며, 연습해야 할 악기요, 가파르고 까다로운 낭떠러지를 따라 올라가야 하지만 그 정상에 황홀한 경치가 기다리고 있는 산과 같다고 할 수 있다. 2017년도 청소년들과 청년들과 함께 스쿼미시에 있는 Stawamus Chief 산봉우리를 올랐다. 올라갈 때는 불평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숨은 턱까지 차오르고, 땀으로 목욕을 하니 더 이상 올라가지 않겠다고 버티는 친구들이 생겼다. 중간에 포기하고 다시 내려가고 싶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서로 격려하고 등을 밀어주고 손을 잡아주었다. 결국에는 전원이 산봉우리 정상에 올라 참으로 황홀한 경치를 끌어안을 수 있었다. 

속사람은 변덕도 심하고 종잡을 수도 없으며 금세 변심하기도 하고, 수련회나 기도회에 다녀오면 금세 천하를 얻은 것처럼 방방 뛰다가도 2-3일후면 원래대로 돌아오기도 한다. 그래서 부부가 필요하다. 부부제자는 서로 격려하고 등을 밀어주고 손을 잡아주면서 끝까지 함께 하는 것이다. 그것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서로를 부부로 맺어주신 것이다. 변덕이 심한 배우자의 속사람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도우라고 하신다. 시골교회 지휘자가 그랬듯 포기하지 말고 배우자의 속사람을 강건케하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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