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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단상] 구속적 삶을 사는 성도들(딛 2:14)_토론토 영락교회 송민호 목사

구속적 삶을 사는 성도들(딛 2:14)

토론토 영락교회 송민호 목사

반갑습니다. 2023년 새해, 하나님의 크신 은혜가 성도님의 가정에 함께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우리는 은혜로 사는 사람들이고 은혜를 떠나서는 온전하지 못합니다. 입니다. 주의 은혜만을 구하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얼마 전에 오랫동안 알고 지내던 Rod Alm이란 분으로부터 편지를 받았습니다. 그분은 제가 대학교 1학년 때 저에게 예수님을 소개한 분입니다. 그는 대학생 선교회 Campus Crusade for Christ 간사로 평생을 헌신했습니다. 편지는 대충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나는 다시 밴쿠버로 돌아왔다. The University of British Columbia 근처에 아파트를 구해서 버스를 타고 캠퍼스에 가서 전도하고 있다. 진리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학생들에게 전하기 위해 그들의 삶 속으로 들어가려고 노력한다. 

그는 제가 대학에 다니던 시절, 그러니까 거의 45년 전에 UBC의 캠퍼스 간사로서 나에게 전한 동일한 복음을 이제는 70이 넘은 노인이 되어 캠퍼스에서 전하고 있습니다. 복음을 들고 학생들을 찾아다니는 그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이제 몸은 이전의 젊은이가 아닌 거구가 되었고, 이전처럼 자유롭지 못한 조건이 많은 70대 노인이 되었지만, 계속해서 사역하고 있습니다. 무엇이 이분을 이토록 복음에 매료되게 만들었을까요?

그것은 불변하는 복음의 매력 때문입니다. 지금이나 45년 전이나, 아니 450년 전이나 복음은 동일한 메시지입니다. 그리고 세상이 아무리 변했다 해도, 사람들의 기본적인 필요는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소망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없이는 불행한 인생입니다. 그런데 오직 예수 안에만 참 소망이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이 복음은 온 세상에 전파되고 있고, 짧은 인생의 의미를 찾는 사람들에게 답을 줍니다.  

복음은 기쁜 소식이란 뜻입니다. 무엇이 들어있을까요?

복음에는 만물을 소생시키시는 하나님의 계획과 능력이 담겨있습니다. 인간은 죄를 지으며 점점 더 나쁜 길로 가고 있습니다. 아무리 새로운 것이 발명되어도 인간의 뿌리 깊숙이 박혀 있는 죄성은 어디를 가지 않습니다. 여전히 한 세대는 가고 새로운 세대가 오지만, 인간은 변하지 않으며, 인간이 가지고 있는 욕심에서 일어나는 갈등과 다툼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인간의 죄가 해결되지 않는 한, 인간은 불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인생의 의미와 목적을 찾아 헤매기도 합니다. 타락한 인간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그래서 기쁜 소식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복음은 믿는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설명했습니다 (롬 1:16). 하나님은 죄의 형벌에서, 죄의 통제에서, 죄의 뿌리에서 우리를 구출합니다. 그래서 죄가 우리를 더 이상 정죄하지 않도록 합니다. 그리고 죄로부터 멀리하도록 만듭니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죄의 자녀가 아닙니다. 그리고 서서히 죄의 뿌리가 뽑히고 있습니다. 우리의 심령이 날로 새로워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기쁜 소식입니다.  

구권은 위험한 상황에서 구출되었다는 뜻입니다. ‘구원’ 외에도 ‘구속’ 혹은 ‘속량’이란 표현을 씁니다. 이 단어의 어원을 보면 노예나 포로를 몸값을 지불하고 사 올 때 사용한 단어입니다. 대가를 지불하고 다시 찾아올 때 사용합니다 (출 21:8).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의 노예 생활에서 구출해 내오실 때도 ‘속량’ 혹은 ‘구속’이란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출 6:6). 

나는 여호와라 내가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에서 너희를 건지며 편 팔과 여러 큰 심판들로써 너희를 속량하여 너희를 내 백성으로 삼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리니 … 

애굽의 노예 생활에서 구출하여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예수의 피를 지불하고 우리를 자유인으로 사 오신 것입니다. 죽음과 형벌의 길목에서 우리를 자유케 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나 구원받았다 너 구원받았다’ 하며 감사 찬양을 합니다. 죽어서 천국 간다고 안심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질문이 있습니다. 만일 우리의 신앙생활이 예수를 믿어 천국 가는 것으로 감사하고 만족한다면, 복음이라는 것은 천국행을 위한 일종의 보험 상품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즉, 사후에 천국 가기 위해서 지금 듣고 인정하면 좋은 복음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적당히 보험을 드는 것처럼 신앙생활도 적당히 하면 되지 않느냐는 결론이 나옵니다. 뜻밖에도 이런 생각을 하는 분이 많습니다. 보험은 큰 커버리지가 필요 없습니다. 그래서 보험의 키워드는 ‘적당히’입니다. 이런 크리스천을 명목상의 크리스천(nominal Christian)이라고 부릅니다.  

문제는 우리의 그릇된 구원관입니다. 우리가 예수의 피로 구원을 받아 끝나는 것으로 생각하면 하나님의 계획을 잘못 이해한 것입니다. 구원은 성도의 신앙생활의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구원받음으로 신앙생활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본문을 잘 살펴보십시오. 본문은 구원받은 이후(구속받은 이후) 성도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에 대해 말씀합니다. 즉, 왜 우리가 구속받았는가를 설명합니다.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딛 2:14)

우리를 속량하신 (구속하신) 이유는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구속(속량)의 놀라운 목적을 발견합니다. 궁극적인 구원의 목적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속량 🡪 성화 🡪 열심으로 선행 eager to do good 🡪 하나님의 백성이 됨

진행형이라는 사실을 먼저 보십시오. 구원받고 (형벌로부터 면제) 끝이 아니라, 속량을 통해 죄로부터 자유함을 얻고, 이어서 성화 되는 과정을 거쳐서, 열심으로 선한 일에 앞장서며,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가는 과정이라는 것입니다. 

다른 종교는 선한 일을 하여 구원받으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기독교에서는 구원받아 선한 일을 행하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피로 인해 구속 받은 성도라면 이제는 남은 삶의 목적이 완전히 뒤집혀야 합니다. 구원받은 성도는 하나님의 형상을 본받아 가는 삶을 삽니다. 적당히 보험에 들어 사후의 세계를 대비한다는 미온적인 자세는 전혀 성경의 가르침과 일치하지 않습니다.  

구속받은 성도는 구속적 삶을 사는 것이 마땅합니다. 

구속적 삶이란 선한 일을 열심히 해서 구속하신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구원받기 위해 선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 이후 마땅히 지나가는 과정입니다. 복음의 능력이 우리 삶 속에 놀라운 변화를 주어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복음에 의해 시작된 선한 일은 무엇입니까? 무엇이 구속적 삶의 중요한 바탕이 됩니까? 앞으로 세 가지를 천천히 설명할 것입니다. 

2023년 우리 교회의 표어는 ‘구속적 삶을 사는 성도들’입니다. Redeemed for Redemptive Living
우린 구속받았으니 구속적 삶을 살아야 합니다.  

첫째, 용서와 화해를 통한 회복을 말합니다. 

복음은 용서와 화해를 통한 회복입니다. 누가복음에 나오는 탕자의 비유를 통해 하나님의 마음을 보여주십니다. 집 나간 망나니 아들을 기다리며 그를 용서하고 집 안으로 받아들이는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복음을 제대로 체험했다면 우리는 용서와 화해에 익숙해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용서와 화해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창세기에 나오는 요셉의 삶을 잘 연구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린 요셉처럼 살아야 하며, 요셉처럼 사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요셉은 버림을 받았지만, 형들에게 복수하지 않았습니다. 형들과 함께 울었고 함께하는 삶을 택했습니다. 

얼마 전 우리 성도님 한 분과 대화하면서 마음이 매우 아팠습니다. 형제와 관계가 꼬여서 풀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먼 나라에 이민와서 서로 의지하고 살아야 하는데, 의지하기는커녕 생각할수록 스트레스만 받는 것입니다. 계속 이렇게 가서는 안 됩니다. 용서와 화해를 통해 회복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복음을 체험한 사람들이 하는 행동입니다. 누군가 나를 볼 때 스트레스를 받는다면 이 관계를 빨리 회복해야 합니다. 구원받은 자는 삶 속에 복음을 드러내야 합니다. 

마태복음 18장에 나오는 빚진 자의 비유를 기억하십시오. 만 달란트 빚진 자가 주인으로부터 탕감받았습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팔아서도 부족한 큰 빚이었습니다. 자기 몸과 아내와 자식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도 안 되는 상황에서 주인이 불쌍히 여겨 그의 빚을 탕감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천문학적 빚을 탕감 받은 사람이 나가서는 자기에게 아주 작은 액수를 (백 데나리온) 빚 진 동료를 만나 그의 목을 잡고 빚 독촉을 합니다. 이 소식을 들은 주인이 노하여 다시 그 종을 옥졸에 넘긴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이 비유를 통해 일침을 가하십니다.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마 18:35)

그러니까 하나님으로부터 죄를 용서받은 사람이라면 이제는 우리도 용서에 익숙해져야 마땅한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에 합당한 삶입니다. 복음의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용서와 화해를 통해 회복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지난번 파키스탄에서 오신 정마태 선교사님의 선교 보고에서 9년 전 (2013년) 무슬림 폭탄 테러로 부모를 잃고 자식을 잃은 기독교인들의 90%가 (어렵지만) 가해자를 용서한다는 통계를 보고 감동하였습니다. 쉽지 않은 일인데, 그들은 복음의 능력을 체험했기 때문에 가해자를 용서하고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긴 것입니다. 

여러분도 2023년엔 용서와 화해를 실천하는 삶을 사시길 바랍니다.  

둘째, 어렵고 소외된 자들을 향한 환대입니다. 

구약에는 수도 없이 나오는 가르침입니다. “나그네를 대접하라. 너희 가운데 외국인을 보호하라. 고아와 과부를 위하라 …” 이것은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이 지켜야 할 윤리 강행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없으십니다. 가난하고 약한 자를 위하시는 하나님의 변치 않는 마음입니다. 

우리가 이전에는 이스라엘 밖에 있던 외인이었지만, 하나님의 긍휼하심으로 복음을 받아들이고 유대인과 더불어 하나님 안에서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모든 사람에게 마음을 열고 주님의 사랑을 나누어야 합니다. 

여러 번 말씀드렸지만, 다시 드립니다. 우리에게 복음을 전해준 사람은 우리와 언어가 다르고, 문화가 다르고 생각이 달랐던 사람이었습니다. 1872년, 만주에 존 로스 선교사가 들어왔고 이어 우리 민족을 향한 복음이 준비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민족은 이 선교사님들의 수고로 복음을 받아들였습니다. 환대의 삶을 경험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서상륜은 우리 민족에게 있어서 최초의 신앙인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그는 존 로스 선교사를 도와 성경을 번역했고, 생명을 걸고 압록강을 건너와 당숙이 사는 황해도 소래마을에 가가호호 다니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마을 사람이 예수를 믿게 되었고, 최초의 교회인 소래교회가 세워졌습니다. 우리나라에 최초로 조직된 장로교회 새문안 교회가 서울에 세워질 때, 교인 대부분이 그가 전도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또한, 제주도에서 온 청년이 에이비슨의 치료를 받을 때 서상륜은 그를 전도했고, 그 청년이 제주도를 복음화하게 됩니다.   

서상륜이 이렇게까지 목숨을 걸고 (대원군의 통상수교거부정책 시대) 복음을 전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는 선교사들을 통해 환대받았고,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그가 홍삼 장수로 압록강을 수시로 건너다니며 장사를 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객지에서 장티푸스에 걸려 사경을 헤매게 됩니다. 

그때 한 번도 본 적 없는 백인이 그의 곁에 천사처럼 다가와 간호해주며 만주 서양인 의사에게 데려갑니다. 그리고 그의 곁을 떠나지 않고 살아날 때까지 보호해 줍니다. 서상륜은 이런 사랑을 잊을 수 없었고, 병상에서 일어나게 되면 이 사람이 믿는 하나님을 내가 반드시 믿겠다는 결심을 합니다. 그 사랑에 녹은 것입니다. 어렵고 소외된 자들을 향해 환대를 베풀라는 성경 말씀은 우리가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양과 염소의 비유를 기억합니다. 왕이 어떤 사람에게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35-37절)하며 와서 상을 받으라고 합니다. 그 사람이 깜짝 놀라서 내가 언제 왕을 위해 그런 일을 했습니까? 하며 묻습니다. 그때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마 25:40) 했습니다. 즉, 아주 작은 자에게 한 것이 주님께 했다는 뜻입니다. 

환대의 삶은 하나님을 아는 사람에게 반드시 나타나야 할 사항입니다. 선택이 아니라 필수입니다. 자연스럽게 자리 잡는 그리스도인의 성품이자 구원받은 성도가 살아가는 구속적 삶의 한 부분입니다. 외롭고 힘든 사람 중에 하나님이 보낸 사람이 있습니다. 

셋째, 공동체를 위한 나눔과 섬김입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예루살렘에 만들어진 초대교회의 믿음의 공동체가 나옵니다. 복음은 공동체를 낳았습니다. 창세기 1장에서 성령의 운행으로 창조가 시작되었고, 사도행전 1장에서 성령의 역사로 교회, 즉 믿음 공동체가 시작되었습니다. 복음의 결과는 건강한 공동체입니다. 예루살렘의 초대교회 성도들은 서로 물건을 통용하며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누었습니다. 재산을 팔아 사도들의 발 앞에 놓고 나누었습니다.

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 그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으니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줌이라 (행 4:32-35).

여기에 보면 복음을 듣고, 복음에 의해 삶이 변화된 성도들은 나눔과 섬김을 통해 분명히 건강한 공동체를 세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복음으로 하나 된 공동체가 건강해지는 길은 진정한 나눔과 섬김입니다. 구원받은 성도는 건강한 공동체를 세우는 것이 마땅합니다. 세우지 무너뜨리지 않습니다. 복음을 받아들이고 체험했기 때문에 복음대로 살려고 노력합니다. 

바울은 서로 사랑하라는 주님의 가르침을 구체적으로 서신에서 가르칩니다. 서로를 섬기기 위해 힘이 되어주고 손과 발이 되어줍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바울이 쓴 서신을 보면 나옵니다. 바울은 먼저 교리에 대해 쓰고, 이어서 생활에 대해 씁니다. 교리편과 생활편입니다 (롬 1-8장, 롬 9-16장; 엡 1-3장, 엡 4-6장). 

공동체가 건강해야 복음의 위력이 나타납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함으로 나의 제자가 된 것을 알리라”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서로 사랑하는 것이 복음의 엑기스를 살아내는 것입니다. 2023년에는 여러분이 속한 공동체에서 열심히 생활하시기 바랍니다. 샘터를 서로 섬기고 진정한 사랑을 나누면 교회가 건강해집니다.  

이 세 가지를 합하여 실천할 때 우리는 복음을 삶으로 살아냅니다. 즉, 구속적 삶을 사는 성도가 되는 것입니다. 내 이웃과 가족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어려운 이웃을 조건 없이 돕기 바랍니다. 내가 건강해야 내가 속한 공동체가 건강하며, 내가 속한 공동체가 건강해야 이 세상에 소망을 주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기억하십시오. 구원은 보험 상품이 아닙니다. 사후의 세계를 대비해서 내가 적당히 보험을 들면 된다는 식의 생각은 전혀 성경의 가르침과 일치하지 않습니다. 보험은 필요한 만큼만 들면 됩니다. 필요 없이 보험을 크게 들고 많은 보험료를 지불할 필요가 없습니다. 신앙을 이런 식으로 접근하면 안 됩니다. ‘적당히’ 믿는 것을 말합니다. 아닙니다. 우리는 선한 일을 위하여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마땅히 가져야 할 자세입니다. 

이것이 구속적 삶을 사는 성도의 모습입니다. 이렇게 2023년을 시작하고 구체적으로 선한 일을 도모하는 한 해가 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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