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te icon The ChristianTimes

[칼럼:김진수장로의 성공적인실패] 가난한 농부의 막내아들

성공적인 실패(2) – 가난한 농부의 막내아들

나는 강원도 삼척군 노곡면 상마읍리에서 가난한 농부의 셋째 아들이 태어났다. 그리고 태어난지 1년 2개월이 지나서야 아버지는 나의 출생신고를 하셨다.

1960년대, 버스가 다니는 동막이라는 마을에서 30리 되는 산길을 세 시간 이상 걸어 들어가면 육백산이 나온다. 우리 동네 사람들은 주로 밭농사를 하며 먹고 살았다. 생일이나 제삿날 또는 명절이 아니면 쌀밥을 구경하지도 못했고, 대부분 보리, 옥수수, 감자가 주식이었다. 흉년이 드는 해에는 도토리를 주워 모아 식량으로 보충하기도 했다.

어쩌다가 어머니가 쌀로 밥을 지으시는 날이 있었는데, 그때 어머니는 잡곡을 씻어 먼저 밥솥에 앉힌 후 그 위에 쌀을 따로 부으셨다. 집안의 연장자 순서로 밥을 담다 보면, 나는 아버지 보다 잡곡이 많은 밥을 먹게되었다. 아버지가 간혹 밥을 남기시면, 그 남긴 밥은 막내인 내 차지가 되었고 그 날은 운 좋은 날이었다.

깊고 깊은 산골에서는 쌀밥뿐 아니라 고기도 흔하지 않았다. 어쩌다가 한 번, 제삿날이나 명절에 겨우 먹을 수 있었는데, 고기를 먹는 날에는 기름진 음식에 익숙하지 않은 탓에 으레 배탈이 나거나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곤 했다. 고기 부작용 탓에 나는 거의 스무 살이 될 때까지 육류는 거의 입에 대지 못했을 정도였다.

3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난 나는 큰 형님과 스무 살 차이가 났다. 큰 형님은 거의 술과 더불어 살았는데, 어느 매서운 겨울날 술에 취해 도끼를 들고 나를 죽이겠다고 달려드는 바람에 맨발로 급히 옆집으로 피신하기도 했다. 이러한 일들 때문에 나는 청소년 시절 소심하고 내성적인 성격을 가지게 되었다.

그때 큰 형님이 그런 행동을 한 가장 큰 이유는 장남으로서의 부담감 때문이었던 듯 싶다. 딸 일곱을 두었던 큰 형님은 당시 우리나라의 정서대로 집안의 대를 이을 아들을 낳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가졌고 아들이 없는 것에 무력감을 느꼈던 것이다. 결국 큰 형님은 일곱 번째 자식으로 아들을 두게 되었지만 안타깝게 40대 후반에 술로 인해 돌아가셨다.

둘째 형님은 군복무 중 자살했다고 기록되어있다. 의문사 중 하나이다. 자살할 이유가 확실하지 않기 때문이다. 누나는 여자라는 이유로 초등학교 교육조차 제대로 받지 못했고 야학을 통해 한글을 익힌 정도였다.

부모님은 막내인 나에게 많은 기대를 거셨다. 내가 다닌 마읍 초등학교는 총 학생 수 200여 명, 학년별 학생 수 30명 남짓한 작은 학교였다. 그 학교의 졸업생 열 명 중 한 명만 겨우 중학교에 진학했다. 아버지는 동네 이장까지 지내신 까닭에 세상 물정을 잘 알고 계셨고, 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하시고 나를 중학교에 보내기로 결정하셨다.

아버지는 내가 6학년 때, 작은 삼촌이 사시는 근덕이라는 면 소재지에 있는 초등학교로 나를 전학시키셨다. 나는 1년 동안 삼촌 댁에서 지내며 초등학교를 다니게 되었다. 고향 집까지의 거리가 멀어 자주 갈 수는 없었고, 한 달에 한 번 정도 토요일에 수업을 마치고 출발해서 40리 되는 거리를 4시간 이상 산길을 걸어 집에 가곤 했다.

당시에는 중학교에 진학하려면 입학시험을 치러야 했다. 초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친구들 대부분은 가까운 근덕중학교로 지원했고 반에서 공부를 아주 잘하는 학생만 삼척중학교에 지원했다. 나는 삼척중학교에 붙은 자신이 없어서 근덕중학교로 지원하려고 했는데 아버지께서는 내가 삼척중학교에 지원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떨어질지 모른다는 나의 예상과는 달리 입학 성적이 상위 30% 안에 들어서 나는 여섯 반 중 두 번째 특수 반에 들어갈 수 있었다.

내가 삼척중학교에 합격하자 아버지는 우리 집 재산인 논과 소를 팔아서 삼척에 방 세 개짜리 집을 사셨다. 방 하나는 세를 내주고, 다른 방 하나는 사촌 두 명과 같은 학년의 시골 친구를 하숙 시키셨다. 아버지께서는 큰형님이 있는 마읍에서 생활하시고, 어머니로 하여금 삼척에서 우리 네 명을 보살피도록 하셨다. 나의 중학교 생활을 위해 뜻하지 않게 두 분께서 따로 생활하시게 된 것이다.

삼척으로 이사 온 그 해 겨울, 가난해서 배추 살 돈이 없었던 어머니는 동네에서 김장하고 버린 배추를 주워서 김치를 담그셨다. 얼어붙은 배춧잎으로 담근 김치는 질겼지만 내게는 그 어떤 김치보다 맛있었다. 거기에는 어머니의 눈물겨운 헌신과 자식 사랑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머니는 늦가을이 되면 방을 따뜻하게 하기 위해 뒷산에서 잡목을 베어 오시곤 했다. 아카시아 나무를 베어오느라 어머니 손이 가시에 찔리는 경우도 여러 번이었다. 어머니가 숱하게 찔리신 가시 덕분에 나는 추운 겨울을 따듯하게 보낼 수 있었다.

어머니께서는 매우 부지런하셨다. 삼척으로 이사온 후 집만 마련했지 땅을 살 형편이 되지 못해 우리 집은 우리 소유의 땅이 하나도 없었다. 어머니는 우리 옆집 부잣집 아주머니네 땅을 소작하셨고, 그 대가로 그 땅에서 나오는 농산물의 절반을 받으셨다. 그 농산물을 머리에 이고 다니면서 동네와 가까운 시장에 내다 파시고, 거기서 번 돈으로 나의 학비를 대주셨다.

학창시절에 나는 키가 작은 편이었고 운동을 매우 싫어하는 조용한 아이였다. 체육시간이 되면 대부분의 학생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밖으로 뛰어나가 놀았고, 누군가 한 학생이 남아서 교실을 지켜야 했다. 나는 교실에 남는 것이 제일 좋았다.

나는 앞에 나가서 반 학생들을 이끈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나의 중학교 때 별명은 ‘보바대학 총장’ 이었다. ‘보바’란 ‘바보’를 거꾸로 한 말이다. 나는 바보대학총장이었다. 그 별명이 붙은 이유는 다음과 같다.

중학교 3학년 때, 과학 수업이 시작하기 직전에 한 친구가 내게 다가와 말했다. “진수야, 담임선생님이 너를 찾는다. 어서 교무실로 가봐.” 나는 곧 수업이 시작되는 줄 알았지만 친구의 말을 듣자마자 교무실로 달려갔다. 그런데 선생님은 “나는 너 안 불렀는데?” 하셨고, 친구에게 속은 것을 뒤늦게 안 나는 서둘러 교실로 돌아왔다. 그러나 이미 수업은 시작된 후였고, 과학 선생님과 학생들의 시선이 일제히 내게 집중되었다. “야! 너 뭐야? 왜 수업에 늦었어?” 

과학 선생님의 질문에 나는 아무 말도 못하고 고개만 푹 숙인 채, 그 자리에서 그만 울어버리고 말았다. 그 후 친구들 사이에서 나는 ‘보바대학 총장’ 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게 되었다.

중학교를 졸업한 후 나는 일반 고등학교 대신 특수 직업학교인 삼척공업고등전문학교에 입학을 했다. 당시만 해도 가정 환경이 어려워 대학 진학이 어려운 학생들은 이 학교에 많이 진학했다. 이 학교는 공업고등학교 3년 과정과 전문대학 2년 과정을 통합한 5년제 학교로, 기술 전문 인력을 확보하기 위해 국가에서 설립한 특수학교로 등록금은 일반 고등학교의 등록금보다 적었다. 나는 이 학교의 전기과에 입학했고 한국전력에 입사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계속-

Exit mobile vers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