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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아!그런뜻이었구나] 십자가 (2)  “신앙의 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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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 (2)  “신앙의 심장”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바울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바울의 이 표현에 대하여 중세 로마 카톨릭 교회는 다음과 같이 반응했습니다. “이곳에서 바울은 진심으로 정직하게 말한 것이 아니다. 바울에게 성경은 그 자체와 일치하지 않는다. 그리스도가 악인이나 도둑도 아니고 오히려 의롭고 거룩한 분인데, 어떻게 하나님께 저주를 받아  나무에 달리는 십자가의 판결을 그에게 적용할 수 있겠는가?” 

   이에 대하여 마틴 루터는 거친 말로 강력하게 로마 카톨릭을 비난합니다. “제롬과 그를 추종하는 카톨릭 궤변가들이 비참하게 괴로워 하면서 매우 사악하게 이 문장을 변경시켰다. 그들의 가르침은 순진하고 무식한 사람들을 움직일 수 있다. 그 궤변가들은 약삭빠르게 말할 뿐만 아니라 매우 경건한 척 말함으로써 자신들이 마치  그리스도의 신성과 영광을 변호하는 사람들로 보여지게  한다. 그리고 모든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가 저주를 받아 십자가에 달린다는 부정적인 생각을 못하도록 경고한다.” 그러면서 루터는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목적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께서 저주를 받은 이유는 자신의 죄 때문이 아니라, 우리 죄를 없이 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므로 이 말씀 (갈 3:13)에서 가장 중대한 요소는 ‘우리를 위하여 for us’라는 성구 (phrase)에 있다.  그리스도는 무죄하기 때문에 십자가에 달리는 것이 마땅치 않으시다. 모세의 법에 따르면 모든 도둑과 행악자는 나무에 달려야 한다. 또한 동일한 법에 의하면 그리스도는 모든 죄인들과 도둑들의 죄를 떠 맡아야 한다고 기록되었기 때문에, 그는 십자가 형에 처해져야 한다.  우리는 죄인이고 도둑이기 때문에 영원한 저주와 죽음에 대한 죄를 지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셨고 그것들을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그러므로 그는 죄인이 되어야 하며, (선지자 이사야가 말한 대로) 그는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며, 범죄자를 위하여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그리고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받아야 한다.” 루터에게 그리스도의 저주와 그의 십자가는 우리의 저주와 죽음을 대리한 희생제물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에 관해서 성경은 일관되게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 (그리스도)에게 담당시키셨도다”고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달려 죽은 근본 목적은 무엇일까요? 사도 요한은 이 질문에 관해서 이렇게 답합니다.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근본 마음인 사랑을 현실로 보이신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인간의 실제 삶으로 옮겨지는 가교 (架橋)입니다. 이것을 기독교 용어로 화목 제물이라합니다.     

   주전 천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고대 문명의 발상지에서는 제사 때 사람을 희생제물로 바치는 인신공양이 전 세계에 폭 넓게 존재했다는 증거가 나타납니다. 신들은 인간 사회를 통치했고 한 결같이 노를 발하고 변덕스러웠습니다. 연약한 인간들은 신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제물을 바쳤습니다.  신들은 큰 제물을 요구했고, 더 큰 제물 일수록 효력이 강했습니다. 특별히 인간을 제물로 바치는 것은 큰 희생이 따르지만 가장 효과적이었습니다. 이처럼 이방 종교는 사람이 뇌물로 신들을 교묘히 다루고 조정했습니다. 이방 종교에서는 못된 기질의 신을 달래는 예식은 반드시 치러야 하는 두려운 절차였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죄를 씻기 위한 희생제물이 되었다고 가르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인신공양을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선언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위에서 화목 제물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화목제물이 된 이유를 존 머레이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진노를 불러 일으킨 대상들을 하나님께서 너무나  사랑하셔서 자기 아들의 피로 자신의 진노를 제거하기 위해 그 아들을 주셨다. 사랑받는 자들이 더 이상 진노의 대상이 되지 않도록 하고, 진노의 자식들을 하나님께서 즐거워하는 자녀로 만드는 것, 그 사랑의 목적을 성취하도록 진노를 처리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일이었다.”  형벌 받아 죽을 죄인의 신분을  사랑받는 하나님의 영원한 자녀로 변화시키기 위해 하나님께서 직접 나섰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진노를 일으키는 그들의 추악한 모든 죄를 제거하기 위해 그리스도를 화목의 도구로 쓰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체가 되는 기독교의 화목은 인간이 주도적으로 신을 화목시키기 위해 뇌물을 수수하는 이방 종교와 구별됩니다.  

   화목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직접 주체가 된 이유는 인간에게는 죄를 처리하는 길이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유대인들은 율법의 힘을 빌렸고, 로마 카톨릭은 인간의 의로운 행위를 신뢰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단호하게 “율법의 행위로 그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다”고 선언합니다.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가 되는 유일한 길은 가장 비참하고 가련한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헤아릴 수 없는 자비와 사랑으로만 가능합니다. 그 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나타났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베드로같은 변절자, 사울처럼 교회와 그리스도인을 핍박했던 박해자, 다윗처럼 간음한 자, 아담처럼 에덴 동산에서 선악과를 먹었던 불순종 자, 또한 십자가에 달렸던 강도 같은 자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그가 나무에 달려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므로 우리는 하나님과 화목되었습니다. 화목되었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심자가 죽음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유발시키는 인간의 죄가소멸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진노의 공포에서 오히려 하나님의 사랑과 보호를 받게 된 것입니다. 이 화목의 교리는 우리 신앙의 중심입니다. 화목이 빠지 신앙은 불완전할 뿐만 아니라 성경이 전하는 믿음과 다른 것입니다.  화목과 관계하여 바울은 이 땅에 거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렇게 조언합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우리는 세상을 화목케 하는 사명이 있습니다. 토마스 아 캠피스는 『그리스도를 본받아』에서 “십자가를 사모하는 사람들”이라는 주제로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기적을 존경하면서도 그분의 십자가의 치욕을 따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사람들은 역경에 처하지 않을 때만 예수님을 사랑합니다. 그분에게서 어떤 위로라도 받을 때에만 그분을 찬양하고 축복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자취를 감추고 잠시라도 그들을 떠나면, 사람들은 불평하기 시작하고  깊은 실의에 빠집니다.그러나 십자가에 구원이 있고, 십자가에 생명이 있으며, 십자가에 우리의 적에게서 지켜 주는 보호함이 있습니다. 십자가로 하늘의 감미로움이 흘러 들어 오고, 십자가에 마음의 강건함이 있으며, 십자가에서 신성힘이 완성됩니다. 십자가가 아니면 영혼의 구원도 없고,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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