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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아!그런뜻이었구나] 두 지혜, “소피아”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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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지혜, “소피아” (2)

세상의 지혜로 알려진 세지 (世智)는 손에 책 한 권을 들고 힘들게 걸어가는 신자 (信者)를 만나자 말을 건넵니다. “선생님, 이렇게 힘들고 괴로운 모습으로 어딜 가세요?” 크리스천이라고도 불리우는 신자가 대답합니다. “저는 제 앞에 있는 좁은 문으로 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저 곳에서 저의 무거운 짐을 벗는 방법을 배울 수 있다고 들었거든요.”  세지는 언성을 높이며 “그 짐을 벗기 위해 이 길로 가라고 말한 사람이 누구요?”라고 말합니다. 신자는 “매우 훌륭하고 존경스럽게 보이는 사람이었어요. 제 기억으로 그분의 이름은 복음 전도자였어요.” 그러자, 세지는 신자에게 다시 말합니다. “그런 충고를 하다니, 괘씸한 사람이군! 이 세상에 그가 당신에게 지시한 것보다 더 위험하고 힘든 길은 없소. 그의 충고를 따르면 당신은 이 길이 얼마나 위험하고 힘든지 알게 될 것이오. 그런데, 처음에 어쩌다가 그 무거운 짐을 지게 되었소?” 신자가 “제 손에 있는 이 책을 읽은 다음부터입니다”라고 답하자, 세지는 이미 알고 있다는 듯 이렇게 조언합니다. “그럴 줄 알았소. 왜 편안함을 얻으려고 수많은 위험들이 있는 것을 알면서 이 길을 택한 거요? 만일 내 말을 참고 듣는다면 이 위험들 대신 큰 안전과 우정 그리고 삶의 만족을 얻는 방법까지 덧붙여 알려 드리겠소.”  신자가 즉시 “선생님, 제발 그 비결을 알려 주십시오”라고 조르자, 세지는 이런 답을 줍니다. “저쪽을 보시오. 저 도덕 마을에 율법이라는 이름을 가진 분이 계십니다. 그분은 매우 판단력이 뛰어나고 지혜로운 분으로 명성이 자자하죠. 그분은 당신과 같은 사람들의 짐을 벗겨줄 재주를 갖고 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신자는 지금까지 가던 길을 바꿔서 더 쉽고 현명한 방법을 얻기 위해 율법 선생이 사는 마을로 향합니다. 그런데 그 마을로 가까이 갈 수록 등에 있는 짐이 더 무거워져 발걸음을 옮길 수 없게 됩니다.  신자는 그 때 자신이 세상 지혜자의 그릇된 충고를 받아들인 것을 후회합니다.

   존 번연은  자신의 명저『천로역정』에서 세상 지혜는 사람들에게 행복과 안전한 삶을 보장할 것처럼 말로 유혹하지만 오히려 번민을 일으키며 영혼의 죽음에 이르게 한다는 것을 알립니다. 도덕적인 규칙이 아름답고 설득력 있어 보이지만  그 무거운 짐에서 인간을 구원하는  지혜가 아님을 역설합니다.    

   1세기 길리기아 다소 시 (현재 터키 동남부)에서 출생한 청년 바울도 지혜에 관해 깊은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 때는 학문을 많이 하여 박식한 사람을 지혜자로 이해했습니다. 사람들은 지혜를 찾기 위해 현실과 단절된 상태로 책 속에 묻혀 살았습니다. 많은 지식으로 언변이 유창한 학자는 왕보다 더 훌륭한 차원의 사람으로 여겨져 최고 존중의 대상이었습니다. 바울은 이런 지혜를 세상의 지혜 혹은 통치자들의 지혜로 정의합니다. 지식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홀리고 사회를 지배하는 세상의 지혜는 타락한 형태의 지혜라고 말합니다. 이 지혜는 말의 유능함으로 결정되었습니다.

   고대 그리스 로마 사회는 언제나 말(words)을 사랑했습니다. 그리스 사회는 이 사실을 잘 말해 주는 지식인 그룹인 “소피스트”가 있었습니다. 소피스트는 “지혜” 혹은 “배움”으로 번역되는 희랍어 “소피아”에서 그 이름을 가져왔습니다. 소피아는 삶의 수행에 대한 일반적인 현명함 뿐만 아니라 깊은 통찰력으로 내일을 예견하는 특정 지식을 뜻했습니다. 그 결과 “소피스트”는 원래 삶에서 지혜나 학문을 실천하는 자라는 의미였습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소피스트는 영화배우 못지않게 유명한 웅변가로 이해되었습니다. 그들의 관심은 언변의 지혜였고, 그들의 목표는 박수를 불러일으키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황금의 입으로 알려진 크리소스톰은 자신의 책 『연설』에서 소피스트를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들 모두는 군중의 소리를 사랑한다. 어둠속을 걷는 사람들처럼 그들은 항상 박수와 환호가 있는 방향으로 움직인다.” 바울은 그들의 지혜는 하나님의 지혜가 아니라 사람의 지혜로 자신을 자랑하는 헛되고 어리석은 짓이라고 말합니다. 성경은 하나님과 적대적인 세상 지혜의 결말을 이렇게 기록합니다. “내가 지혜롭다는 자들의 지혜를 없애 버리고 똑똑하다는 자들의 식견을 물리치리라.” 결국 세상의 지혜는 쓸모 없어 폐하게 됩니다.  

   이에 반해 한 개인의 삶을 완전하게 하여 선한 열매를 가득 맺게 하는 하나님의 지혜는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지혜는 예수 그리스도 자체입니다.  성경은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렛에서 설교하실 때 사람들은 그의 메시지에 놀라며 “이 사람의 이 지혜와 이런 능력이 어디서 났느냐”며 의심했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에 대하여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느니라”고 언급합니다. 지혜이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는 그 안에 있는 지혜를 우리에게 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둘째, 지혜는 위대한 사람들의 성품의 한  특징입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주신 은총과 지혜로 애굽왕 바로의 온 집을 통치하는 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솔로몬의 지혜는 동쪽 모든 사람들의 지혜와 애굽 모든 지혜보다 뛰어나서 천하의 사람들이 그의 지혜를 들으러 몰려왔습니다. 초대 교회의 직분을 맡을 수 있었던 일곱 사람의 자격은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상태였습니다. 사람이 진정으로 지혜롭게 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을 알 때만 가능합니다.  

   셋째,  지혜는 그리스도인들이 소유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의 모든 대적이 능히 대항하거나 변박할 수 없는 구변과 지혜를 너희에게 주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야고보도 지혜에 관해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바울은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을 우리에게 넘치게 하신다”고 기록합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사람에 의해서 개발되고 축척 되는 것이 아닌 하나님의 전폭적인 은혜로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는 많은 지식으로 말만 잘하는 것이 아니라 삶이 성결한 가운데 이웃과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로 나타납니다. “너희 중에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가 누구냐 그는 선행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온유함으로 그 행함을 보일지니라.”

이남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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