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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단상] 참된 자유(요8:32-36)_박원철 목사 (늘사랑교회)

참된 자유(요8:32-36)_박원철 목사 (늘사랑교회)

우리 인간이 지나온 역사를 살펴보면, 각 시대마다 그 시대만의 특징과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특정한 시대에 특정한 진리와 사상이 더욱 강조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기독교의 역사만 살펴 보아도 이방인의 사도였던 바울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전의 예루살렘 초대교회는 여전히 모세의 율법을 강조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이방인 그리스인들이 모세의 율법을 따라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켜야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하는 유대주의자들의 율법주의를 반대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강조했습니다. 그리고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므로 핍박받던 변방 종교에서 주류(majority) 종교가 되었던 4세기 경에는 예수님의 신성을 부인하는 여러 기독교 이단들이 나타났기 때문에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강조해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중세 시대에는 로마 카톨릭 교회와 교황 중심의 사회였기 때문에 “로마 카톨릭 교회와 교황의 절대적인 권위”가 강조되었습니다. 그러나 로마 카톨릭에 대항하여 종교개혁이 일어났던 16세기에는 믿음으로 의롭게 되어 구원받는다는 “이신칭의”의 교리가 강조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천년 동안의 중세 암흑기를 끝낸 17세기 이후의 근대는 “인간의 이성”을 강조하는 시대였습니다. 그리고 인간 사고의 중심에 있던 이성을 해체한 소위 말하는 – 20세기 중반부터 유럽과 미국에서 시작된 –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에는 “인간의 감성”이 중시되었습니다. 그 결과 이성 중심의 시각에서 벗어나 영성을 강조하는 포스트모던 시대로 접어 들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미국의 영향을 받아 한국에서 1990년 경부터 시작된 포스트모더니즘이 본격화되었던 2000년경의 한국에서 가장 유행하였던 주제는 “영성”이었습니다. 하지만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의 영성은 기독교적 영성이 아니라 범신론적인 혹은 인간 감성 중심의 영성입니다. 다시 말해, 마음 수련 같은 명상적인 영성입니다. 이렇게 인간의 감성 혹은 범신론적 영성 중심의 포스트모더니즘 시대는 시간의 흐름을 따라 더 진전되어, 절대적 진리의 자리에 있는 모든 것을 분해시켜 버리는 해체주의(deconstructionism) 시대로 나아갔습니다. 다시 말해, 20세기 후반부터는 “해체”(deconstruction)라는 단어가 중심이 되어버린 시대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코로나 바이러스가 전 세계를 집어 삼켜 버렸던 전무후무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앞으로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는 ‘코로나 바이러스 전(前)’의 시대(BC, Before Corona)와 ‘코로나 바이러스 후(後)’의 시대(AC, After Corona)로 나뉘어 질 것이라는 말이 유행하였듯이, 우리는 지금 코로나 바이러스가 창궐하고 지배하였던 시간 이후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시대에, 다시 말해, 코로나 바이러스가 전 세계적인 영향을 미쳤고, 인간의 일상적인 삶을 완전히 바꾸어 버린 코로나 바이러스 후의 시대에 우리가 한번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주제 혹은 ‘Key Word’(핵심단어)는 무엇일까요? 저는 개인적으로 “자유”(freedom)라고 생각합니다.

얼마 전까지만해도 우리는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로 인해 일상 생활의 자유가 엄청나게 통제되고 있는 시대를 살았습니다.‘lockdown’ 명령보다 더 심각한 ‘stay at home’이라는 강제 명령 아래에서 약국에 간다든지, 식료품을 산다든지, 병원에 간다든지 하는 정말로 근본적이고 급박한 일이 아니면 마음대로 밖으로 나다닐 수 없는 그런 통제의 시대를 살았습니다. 이렇게 ‘lockdown’이나‘통행금지’(curfew) 그리고 ‘stay at home’ 같은 행정 명령을 통해 국가와 정부가 사람과의 만남을 통제하고, 외출을 금지시키니까 곳곳에서 흥분한 사람들이 데모를 하였습니다. 국가와 정부가 일상 생활을 통제하고 활동을 금지시키니까 화가난 사람들이 격렬한 시위를 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왜 이 사람들이 정부에 대항하는 데모를 하였던 것입니까?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전 세계적으로 약 3억명 이상의 사람이 감염되었고, 그 중에 약 500만명 이상의 사람들이 사망하였던 그런 위급한 시기에 왜 이 사람들은 그렇게 격렬한 시위를 하였던 것입니까? (2023년 3월 9일자 코로나 바이러스 누적 확진자는 약 6억 7천 6백 57만 명이며, 누적 사망자는 약 6백 88만 명입니다.) 국가와 정부가 이렇게 위급한 상황에서 치명적인 코로나 바이러스 확산을 막기 위해 실시하는 행정 명령에 왜 사람들은 이렇게 흥분하고 분노하며 격렬한 시위를 하였던 것입니까? 그들이 주장하였던 것은 무엇입니까? 한 마디로 말해, “자유”가 침해당했다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마음껏 누릴 권리가 있는 자유가 통제되고 침해당했다고 주장하였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 동안 자신들이 마음껏 누려왔던 자유가 통제되고 침해당하는 것을 참지 못하고 밖으로 뛰쳐나와 분노를 표출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백신 접종을 통해 일상 생활이 어느 정도 정상화된 시점에서는 사람들이 백신 접종을 거부할 자유를 달라고 소리치며 데모를 하였습니다. 그래서 지난 2021년 8월 27일 금요일에는 코로나 백신 접종을 의무화하고 백신 여권을 도입하려는 연방 정부의 정책에 항의하는 시위가 온타리오주 볼튼에서 벌어져 결국 트뤼도 총리의 선거 유세가 중단되는 사태까지 발생했었습니다. 그런데 이 시위대들의 주장은 한마디로 말해 백신 접종을 강제하지 말고 백신 접종을 거부할 자유를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이 주장하였던 자유는 과연 무엇입니까? 그리고 그들이 주장하였던 자유가 과연 진정한 자유, 참된 자유일까요?

사실 우리 현대인들은 그 어느 시대보다 자유로운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자유 민주주의 국가에서 자유 경제가 실행되는 자유로운 사회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어느 시대보다 물질적으로 풍족하고, 어디든지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고, 돈만 있으면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그런 자유의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마치 완전한 자유를 누리며 살고 있다는 착각 속에 살고 있습니다. 좀 더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자유에 대한 환상이 넘쳐나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 인간들은 물질과 권력과 쾌락과 오락에 기대어 자유로운 삶을 꿈꿉니다. 그러나 참으로 슬프게도 우리 현대인들은 실제로는 참된 자유를 거의 경험하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어느 시대보다도 물질적으로 풍족한 시대를 살고 있으면서도 우리는 물가가 오를까봐 걱정하며 살아갑니다. 몰게지 이자를 걱정하고 주식을 걱정하고 집값에 노심조차하면서 살아갑니다. 다시 말해, 물질의 노예가 되어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어느 시대보다도 더 오래 사는 건강한 시대를 살고 있으면서도 건강을 잃어 버릴까봐 염려하고 걱정합니다. 그래서 교회 친교 시간에 성도들이 가장 많이 나누는 대화가 건강에 관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 건강이 삶에서 가장 중요한 목표요 목적 중 하나가 되어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그 어느 시대보다 돈이 많은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자신들이 가진 재물 때문에 두려워하고 염려하며 살아갑니다. 자신들이 소유한 돈과 재산이 사라져버릴까봐 노심초사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들의 돈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값비싼 감시 시스템을 설치하여 다른 사람들을 감시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감시는 실상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나에 대한 감시가 되어 버렸습니다. 실제로 안전을 강화하고 범죄를 막기 위한 감시 시스템은 이제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 곳곳에 설치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휴대폰과 컴퓨터도 실제로는 감시당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휴대폰이나 컴퓨터를 통해 사용하는 모든 정보와 데이트는 그대로 남아 있기 때문에 전문가가 마음만 먹으면 우리의 모든 히스토리(사용 내역)을 검색하고 알아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국가와 정부 혹은 역량이 있는 단체나 개인이 마음만 먹으면 어떤 사람의 사생활도 다 감시하고 심지어 파헤칠 수 있는 그런 감시와 통제의 시대를 우리는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현대인들이 살아가고 있는 실상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는 자유가 아니라 도리어 감시와 통제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마치 자유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것처럼 착각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자유로운 삶에 대한 환상을 품고 살아가고 있는 현대인들은 국가와 정부가 코로나 바이러스 확산 방지라는 명목으로 자신들의 자유를 제한하고 통제한다고 생각하여 분노하며 격렬하게 데모를 하였던 것입니다. 또한 백신 접종을 의무화하고 강제하지 말라고 소리치며 데모하였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 자신들의 자유를 통제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그들이 주장하였던 자유는 “참된 자유”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들이 주장하였던 자유는 “헛된 자유”이고, “거짓된 자유”이고, “환상적인 자유”일 뿐입니다. 그럼 참된 자유는 무엇입니까? 우리가 정말로 울부짖으며 힘을 다해 찾아야 할 참된 자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유”입니다.

요한복음 8장 32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여기서 말하는 진리는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죄의 종”이 되었던 우리를 죄로부터 자유롭게 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죄의 노예가 되어 영원한 죽음의 심판 가운데 거할 수 밖에 없는 우리를 위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므로 우리를 죄와 죽음에서 해방시켜 주셨다는 것입니다. 죽음의 노예였던 우리에게 생명의 자유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의 능력과 은혜를 통해 죄의 노예였던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아들 딸이 되므로 자유인이 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요한복음 8장 36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 다시 말해,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참된 자유를 누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를 참으로 자유롭게 하는 것은 세상의 것들이 아닙니다. 세상의 돈과 물질이 우리를 자유롭게 할 수 없습니다. 일상의 생활에서 즐기는 여가와 오락이 우리를 자유롭게 하지 못합니다. 사람들과 자유롭게 만나는 친교나, 어디든지 마음대로 다니는 여행이 우리를 자유롭게 하지 못합니다. 발달된 과학 기술이 우리를 자유롭게 하지 못합니다. 인간의 시간과 노동을 절약시켜서 인간에서 더 많은 자유 시간과 복지를 주기 위해 개발되고 있는 인공지능(AI)은 지금 인간의 자유뿐만 아니라 점점 인간의 존재까지 위협하고 있습니다. 인공지능의 지성과 능력이 인류의 지성과 능력을 뛰어넘는 지점인”싱귤래러티(Singularity)”의 기점을 지나 많은 시간이 흐른 후에 어쩌면 인간은 인공지능의 노예가 되어 있을 지도 모릅니다.  

또한 종교의 자유가 있는 세상에 살아가고 있다고 해서 우리가 자유로운 것은 아닙니다. 도리어 사람들이 자유의 시대라고 칭송하는 이 시대에 사람들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이단적인 종교와 미신들이 더 많이 확산되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 넷플릭스를 통해 방영되었던 “나는 신이다”라는 다큐멘트리에 등장하였던 JMS 정명석과 신천지 이재록 등과 같은 이단 교주들에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유를 잃고 억압과 착취를 당하고 있습니까? “나는 신이다”라는 다큐멘트리에서 이단 종교에 의해 유린당하고 착취당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참으로 충격적이었습니다. 종교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착취와 유린과 억압에 분노를 금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자유는 우리가 스스로 얻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자유는 코로나 바이러스를 통제하기 위한 행정 명령에 분노한 사람들이 밖으로 뛰쳐나와 데모하고 폭력을 휘두른다고 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풍요로운 재물과 발달된 과학 기술이 우리에게 참된 자유를 주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참된 자유는 어떻게 얻을 수 있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참된 자유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참된 자유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얻을 수 있습니다.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는 말씀처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은혜와 능력을 통해 우리에게 자유를 주실 때 우리는 참으로 자유로워질 수가 있습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는 말씀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 안에서 우리는 참으로 자유로워질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시는 믿음 안에서 살아갈 때 우리는 참된 자유를 누릴 수가 있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누려야할 참된 자유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유, 진리 안에서의 자유”입니다. 그리고 이 자유는 우리가 스스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셔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참된 자유를 얻으려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유”를 배워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 안에서 누리는 자유”를 경험해야 합니다.

우리가 잘 알듯이, 성경의 첫 시작은 하나님께서 생명을 창조하신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좀 더 핵심적으로 말하면,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생명을 주신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그러나 바로 두 페이지 뒤부터, 다시 말해, 창세기 3장부터 인간이 죽음을 선택하는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인간의 반역으로 말미암아 인간에게 죽음이 임했던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생명은 단순히 생물학적 생존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죽음이라는 말도 생물학적 기능이 종료되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성경은 “생명과 죽음”이라는 이 두 단어를 이렇게 심오하고 깊이있는 의미로 사용하면서 “하나님의 생명과 인간의 죽음”에 대해 대비적으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성경은 “인간이라는 존재는 필연적으로 죽을 수 밖에 없는 존재”라고 선언합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9장 27절“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고 말씀합니다. 에베소서 2장 1절“인간이 죄로 말미암아 죽었다”라고 선언합니다. 그래서 소설가이자 극작가였던 사무엘 베케트는 “인간은 죽음이라는 치명적인 질병에 걸려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죽음이라는 질병에 걸려있는 인간에게는 참 자유가 없습니다. 죽은 시체에게 자유가 없는 것처럼 죄로 말미암아 죽은 인간에는 참 자유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에게는 자유가 없다”고 결론을 내리는 것은 틀린 말이 아닙니다. “인간에게 자유가 없다”는 말은 “인간 스스로 자유를 찾을 수도 없고 얻을 수도 없다”는 말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자유를 이야기할 때, 인간이 결코 주어가 될 수는 없습니다. 인간은 언제나 목적어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자유를 이야기할 때에, 인간에게 자유를 주는 주체는 누구입니까?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자유에 대한 이야기에서 하나님이 언제나 주어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죄를 위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 위에서 죽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죽음에서 살리셨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죽음의 심판에서 건져주셨습니다.

갈라디아서 1장 4절,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주셨으니.”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 반역하여 죽음이 다스리는 이 세상을 “악한 세대”라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에덴 동산에서 추방된 인간이 살아가고 있는 세상을 “악한 세대”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악한 세상은 위험한 세상입니다. 죄악된 세상입니다. 어둠과 죽음이 다스리는 세상입니다. 이 악한 세상에서 우리는 “죽음의 노예”가 되어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악한 세상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사도 바울은 말씀합니다. 그럼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우리를 이 악한 세상에서 건져주시나요? 우리는 어떻게 죽음의 노예에서 완전히 해방될 수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 우리는 이 악한 세상의 노예 상태에서 해방됩니다. 죽음의 속박에서 자유롭게 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 1장 4절에 나오는 “건지다”의 헬라어(엑사이레오)는 “어떤 권세로부터 구속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와 능력을 통해 죄에서 구속됩니다. 죄로부터의 구속이 없으면 우리는 자유에 대해 말을 시작하지도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어 주시고 십자가 위에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심으로 우리를 죄에서 구속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죽음의 권세에서 해방되었습니다. 죽음으로부터 자유를 얻었습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에서 사도 바울은 계속해서 십자가의 중요성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갈라디아서 2장 20절, 5장 24절, 6장 14절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계속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켜야만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하는 유대주의 거짓 교사들이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을 십자가의 은혜 안에서 누리는 자유로부터 벗어나 율법의 속박 안으로 끌고 가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은혜를 통해 우리가 죄와 죽음으로부터 해방되었음을 강조합니다. 율법의 종이 아니라 십자가의 은혜를 통해 자유인이 되었음을 선포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자유는 세상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셔야만 하는 것입니다. 더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하나님으로부터 우리가 스스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은혜로 우리에게 주셔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우리는 인간의 기본 권리를 중시하는 자유 민주주의 국가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자유 경제를 기본으로 하는 자본주의 국가에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자유를 누리며 살고 있다는 착각 속에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실상은, 우리 모두는 무엇인가에 얽매여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무엇인가에 속박되어 살아가고 있습니다. 돈과 물질에 속박되어 살고 있습니다. 건강과 장수(즉 오래 살고 싶은 욕망)에 속박되어 살고 있습니다. 성공하고 싶다는 야망에 속박되어 살고 있습니다. 권력욕에 속박되어 살고 있습니다. 쾌락과 행복에 속박되어 살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과의 인간관계에 속박되어 살고 있습니다. 심지어 가정과 가족에게 속박되어 살고 있습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종교에 조차 속박되어 살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죽음이라는 질병”에 속박되어 살고 있습니다. 이런 모든 속박의 쇠사슬에서 우리를 해방시켜줄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누가 우리에게 참된 자유를 줄 수 있습니까? 바로“예수 그리스도” 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참으로 해방받은 자의 기쁨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 안에서 우리는 모든 것에 대해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 안에서 우리는 물질욕에서, 권력욕에서, 성공하고 싶은 야망에서, 인간관계의 속박에서, 심지어 죽음의 두려움에서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와 진리 안에서 참된 자유를 누리시는 사랑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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