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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단상] 이에는 이, 눈에는 눈? (마 5:38-48)_노스욕한인교회 송만빈 목사

이에는 이, 눈에는 눈? (마 5:38-48)

노스욕한인교회 송만빈 목사

오래전 신문에서 읽었던 재미있는 기사가 있어서 여러분에게 소개해 드리려고 합니다. 일본 어느 대학 연구팀이 한 농촌에 사는 60∼84세 노인 3000여명을 4년 반 동안 추적 조사했는데,  그 결과가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아내가 없는 남자’가 ‘아내가 있는 남자’보다 사망률이 80% 더 높았던 반면, 남편이 있는 아내의 사망률은 남편이 없는 아내보다 55% 더 높았다는 것인데요. 그리고 남성의 경우에는 “흡연을 한다”, “1년 이내에 병원에 입원한 적이 있다”, “당뇨병 약을 먹고 있는 중이다” 등등 건강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들이 높은 사망률과 상관관계가 있었지만, 여성의 경우에는 오직 한 가지, “남편이 있다”는 점이 사망률 상승에 영향을 미쳤다는 것입니다. 

조사 대상이 3000여명 밖에 안되는 적은 인원이다 보니까 그 결과를 100% 신뢰할 수는 없겠습니다마는, 남편들이라면 심각하게 생각해 봐야 할 연구 결과이지요. 남편에게 아내는 참 소중한 존재이지만, 아내에게 남편은 수명을 단축시키는 존재밖에 되지 않으니까요.

화제를 바꿔서 80여년 전에 일어났던 제 2차 세계대전에 대해 말씀 드리겠습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 76년이 넘었지만 전쟁의 상처는 아직도 여전히 남아 있지요. 독일 정부가 최선을 다해 사과와 보상을 계속해서 하고 있지만, 홀로코스트를 겪었던 유대인들의 육체적 정신적 고통과 상처는 아물지 않은채 남아 있습니다. 

한국의 위안부 할머니들은 어떤가요? 평생 씻을 수 없는 수치심과 자괴감으로 살아오시지 않았겠어요? 

이와 같이 전쟁 피해자들이 겪은 고통, 너무나도 큽니다. 사라지거나 잊혀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전쟁의 고통과 상처로부터 사각지대에 놓인 사람들에 비하면 이들은 양반입니다. 그래도 국제사회의 관심을 받고 보상과 사과를 받을 수 있으니까요. 많은 사람들이 너무나도 쉽게 간과하는 역사의 다른 얼굴이 있는데, 전쟁의 승전국들이 패전국들에게 행한 만행이고 이 만행으로 고통받은 피해자들이 너무나도 많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독일, 이탈리아 그리고 일본은 패전국이며 전범국가이기 때문에, 종전 후 미국과 구소련을 위시한 승전국들이 이들 국가들에게 전쟁의 책임을 묻는 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네! 전쟁의 책임을 묻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리고 꼭 물어야 하고요. 하지만 불법적 반인륜적 폭력을 패전국의 포로들과 국민들에게 가한 승전국들의 만행을 합리화하거나 당연시 해선 안되죠. 

이 점에 대한 역사적 고증들이 너무나도 많이 있지만, 두 가지만 말씀 드리겠습니다. 하나는 미군이 범한 만행입니다. 1945년 초 미군이 라인강 근처까지 진격하게 되는데, 문제가 생깁니다. 짧은 기간내에 연전연승하는 바람에 전쟁포로의 수가 급증하였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라인강 근처에 전쟁포로들을 수용할 임시 간이 수용소를 급하게 세웠습니다. 문제는 포로들의 탈출을 방지하기 위해 철책을 물샐틈 없이 세웠지만, 인간의 기본적인 권리인 의식주에 관련한 시설은 제대로 세운 게 하나도 없었다는 겁니다. 

먼저 화장실 만드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포로들은 철책 뒤의 비좁은 공간을 화장실로 사용할 수 밖에 없었고 비가 오면 배설물이 범람하는 바람에 전염병이 창궐하게 됩니다. 이보다 더 암울한 사실은 병에 걸려 죽어가는 독일 포로들을 그냥 방치했다는 점입니다. 물론 전쟁 중이니 의약품이 부족하였겠죠? 

하지만 포로들을 살려야겠다는 최소한의 노력은 고사하고, 포로니까 적군이니까 저렇게 죽어도 마땅하다는 생각으로 죽게 내버려두었다는 거예요. 이밖에도 변변한 모포 한 장 제공되지 않아서 추운 겨울엔 뜬눈으로 밤을 지새는 경우가 허다했고,  하루에 필요한 식사량의 1/4도 안 되는 양을 배급 받기 일쑤였다고 해요.

미군은 제네바 협정을 준수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몇 개월 사이에 약 5만명의 독일 포로들이 비참하게 사망하게 됩니다. 미군보다 더한 만행을 저지른 군대는 구소련 군대인데요. 구소련군은 238만명이라는 어마어마한 수의 전쟁 포로들을 붙잡아서 종전 후 자기 나라의 기간 산업을 재건하기 위해 노예처럼 부려먹었는데, 42만여명의 전쟁포로들이 과로와 열량 부족, 병으로 사망합니다.

만약 최소한의 기본권만 제공했어도 그렇게 많은 포로들이 죽진 않았을 겁니다. 무엇보다 소련군의 잔혹성을 극명하게 보여준 곳이 독일 도시들 중 소련군에게 가장 먼저 점령당한 네메르스도르프라는 도시인데, 무자비한 학살로 인해 살아남은 사람이 거의 없었다고 해요. 

소련군의 만행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은, 힘없는 여성들을 수십 차례 걸쳐 강간하여 죽이고 그 시체를 사격장 표적물로 썼다는 것, 그리고 도망치는 아이들을 탱크로 무자비하게 깔아뭉개었다는 것으로, 그 잔혹성은 일부 소련 장교들마저도 경악케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만행이 2차 세계 대전때에만 있었겠습니까? 

인류 역사상 모든 전쟁에는 먼저 도발했다가 패망한 국가이던 세계 정의와 평화를 수호했다는 명분을 챙긴 승전국이던 상관없이 힘없는 부녀자와 어린이들 전쟁 포로들을 반인륜적 방법으로 학살하였어요. 

제가 왜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이겠어요?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존재입니다. 다른 피조물에게는 찾아볼 수 없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았으니,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 땅을 다스리고 돌보라는 특권을 부여받았고 그 특권을 행사하고 있으니,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렇다면 이 은혜에 맞게 살아가야 하잖아요. 하지만 우리 인간이 그렇게 살아갑니까? 그렇지 않을 때가 너무나도 많잖아요. 

오늘 본문인 마 5:38의 말씀처럼, 이에는 이, 눈에는 눈으로 대응하는 것이 너무나 자연스럽잖아요.

이에는 이 눈에는 눈으로 대응하는 것, 인간의 생각과 행동을 지배하는 인간의 본성이니까요. 상대방이 내게 잘못을 저지르고 해를 끼치면 그만큼 아니 몇 배로 되갚아주려는 마음을 먹는 것, 배우지 않았는데도 본능처럼 저절로 그리고 자연스럽게 나오니까요.

그래서 그 결과 야만의 시대가 아닌 문명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땅에는 전쟁이 그치지 않지요. 폭력이 난무합니다. 불의가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 본성이 언제부터 우리 인간에게 들어왔나요? 

아담과 하와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기 전엔 이런 본성이 없었습니다. 선악과를 따먹은 이후 들어왔어요.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서 금하신 선악과를 따먹고 어떻게 했나요? 하나님의 얼굴을 피해 숨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어디 있느냐” 하시며 그들을 찾으셨을 때, 아담은 다음과 같은 첫마디를 내뱉습니다. 창 3:12입니다.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아담이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이유를 그의 아내 하와 탓으로 돌립니다.

사실, 아담이 내 아내 하와가 주었기 때문에 실과를 먹었다고 하나님께 말한 것은 틀린 말이 아니죠. 하와가 선악과를 주지만 않았어도 죄를 범하지 않았을테니까요. 하지만 그 말 안에 아내 대신 책임을 지겠다라는, 그리고 아내를 위해 희생과 고통을 대신 감내하겠다는 아담의 의지가 담겨 있나요? 전혀 담겨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마땅히 저 여자가 책임져야 한다는 변명이 있을 뿐입니다. 서두에서 말씀드린 남편있는 여자가 남편없는 여자들보다 수명이 짧다는 신문 기사가 제시하는 바가 무엇이겠어요? 서로의 허물을 덮어주고 사랑해야 할 부부 사이에 이에는 이, 눈에는 눈으로 대응하는 본성이 개입했고 아내들이 더 큰 피해자들이라는 점이지 않을까요? 

그리고 제 2차 세계 대전에서 미군과 소련군들이 전쟁 포로들과 민간인들에게 만행을 저질렀던 이유 또한 무엇이겠습니까? 전쟁터에서 적을 어떻게 죽여도 괜찮고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선 적들의 인권을 짓밟아도 괜찮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런 반인륜적인 폭력을 저지른 것 아니겠습니까?

이와 같이 이에는 이, 눈에는 눈, 받은 대로 되돌려 주고자 하는 마음은, 아담 이후 우리 안에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자리잡아서 아무리 고치려고 노력해도 고쳐지지 않는 고질병이고 불치병이 되고 말았어요. 

예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이런 본성이 있다는 것을 모르셨겠어요? 우리의 본성을 잘 알고 계셨어요.

그런데도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39-44절입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우리에게 너무나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이에는 이 눈에는 눈으로”라는 본성의 사슬을 끊으라고 말씀하시는 것인데, 예수님은 왜 우리에게 타고난 본능과도 같은 이 본성을 버리고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고 자연스럽지 않는 은혜와 용서를 베풀라고 명령하시는 것인가요? 

그 이유는 너무나도 간단명료합니다. 45절을 볼까요?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하나님이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시기 때문이다. 네! 하나님은 그런 분이십니다. 의로운 자이던 불의한 자이던 상관없이, 착한 자이던 악한 자이던 상관없이, 은혜를 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이던 자격이 없는 사람이던 상관없이, 하나님은 동등하게 해를 주시고 비를 주시며 생명을 주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용서를 먼저 경험한 자들이예요. 세상을 향한, 열방을 향한, 잃어버린 영혼들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공유한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그러하기에 자녀가 부모를 닮 듯, 우리 역시 하나님을 닮아가야 하죠.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온전하심 같이 우리 또한 온전해야죠.

하나님께서 값없이 우리에게 은혜와 용서를 베푸신 것처럼, 우리 역시 원수들에게, 내게 피해를 입힌 자들에게, 상처와 고통을 가져다 준 자들에게, 은혜를 베풀어야죠.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우리가 은혜의 통로로 쓰임받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힘과 능력으로 할 수 있나요? 아닙니다. 하나님의 권능을 체험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권능을 체험하는데에는 왕도가 없습니다. 날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말씀에 순종함으로 그리스도의 인격을 닮아가지 않으면 하나님의 권능을 체험하기란 불가능합니다. 

제 2차 세계대전으로 다시 돌아가서 드릴 말씀이 하나 있는데, 독일 나치정권에 맞서 싸우면서도 “네 원수를 사랑하라”라는 예수님의 명령 때문에 고민하며 씨름하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다름아닌 기독교 국가라고 자처하던 독일이 가장 잔혹하고 악랄한 범죄를 저지르는 것을 목격하면서 신앙적 양심을 끝까지 지키다 총살된 현대기독교 신학의 거인 중 한 분인 본회퍼 목사인데요. 

본회퍼 목사는 나치 정권에 맞서 싸우면서도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그들을 사랑하려 애쓴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라면 하나님께서 원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압니다.” 본회퍼 목사는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를 알았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사랑인지를 알았습니다. 그러하기에 극악무도한 범죄를 저지르는 자들에게 맞서 싸우면서도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는 가운데 사랑의 마음을 품으려고 애쓸 수 있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은혜와 용서를 베풀며 산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닙니다. 조그마한 손해를 당해도 은혜와 용서 대신 이에는 이 눈에는 눈으로 대응하기가 훨씬 쉬워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온전하신 것처럼 온전해지도록 하나님께 구해야 하고 몸부림쳐야 합니다. 기도하고 몸부림치고 1분이 안되어서 본성의 자리로 다시 돌아간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의 능력을 간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이 세상에 고아로 내버려두지 않으세요. 예수님의 명령을 우리 힘으로만 지키라고 책임회피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를 지켜주고 도와주고 위로하고 지혜를 주시는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주셨어요. 그리고 그 성령님이 우리 안에 내주하십니다.

따라서 우리가 성령님의 인도를 받는다면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라는 사슬을 끊고 하나님의 은혜의 통로로 쓰임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과 저는 연약하고 불완전한 존재들이기에 그리고 그 무엇보다 원죄를 안고 태어나 자라왔기에 ‘이에는 이 눈에는 눈’으로 반응하는 것이 너무나도 자연스럽고 당연합니다. 

하지만 하나님 아버지께서 보혜사 성령님의 인도 역사하심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우리를 빚어가셔서 하나님의 온전하심과 같은 온전함으로 우리를 성숙시켜 가실 것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라는 본성적인 대응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고 베풀고 나누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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