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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단상] 어히묵 – 보좌 우편에 앉으신 예수 (히브리서 8장 1~2절)_토론토 동산교회 차재화 목사

어히묵 – 보좌 우편에 앉으신 예수 (히브리서 8장 1~2절)

토론토 동산교회 차재화 목사

동산교회에 여든을 바라보시는 권사님께서 어느날 간곡히 부탁을 하셨습니다. “목사님, 성경을 여러번 읽어도 히브리서 읽기가 참 어렵습니다.” 권사님께서는 오래전에 캐나다 이민을 하시고 간호사로 일하다가 은퇴하신 분이십니다. 온라인(Zoom)으로 성경공부하는 것도 좋아하시고, 평소에는 전도와 심방하는 사역에도 적극 참여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런 교회 어르신께서 히브리서가 읽기 어렵다고 하시며 말씀하시기까지 오래 고민하다 조심스럽게 속마음을 전해 주셨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말씀을 준비하며 “어려운 히브리서를 전교인이 함께 묵상하자!” 싶었습니다. 세 살 버릇이 여든까지 간다고 하듯, 지금 어려운 성경은 여든까지 계속 어려울 수 있겠다는 힌트를 얻었습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묵, 어히묵(어려운 히브리서 묵상하기!) 시리즈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이 설교문을 읽으시는 분들 중에, 히브리서가 참 어렵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에게 성령님께서 조명하시는 은혜가 있기를 소망합니다. 

신앙의 힘이 가득할 때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선포가 힘이 됩니다. 심지어 ‘예수’라는 두 글자에도 감동이 되고, 감사의 눈물이 흐릅니다. 그러나 신앙의 힘이 약해져 교회를 떠나려는 사람들에게는 두려움과 후회로 가득차서, 이전에 즐기던 각자의 전통과 삶의 방식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히브리서는 후자들을 위해 쓰여진 목적이 분명한 말씀이기 때문에, 신앙을 잃어가는 사람들을 붙들 수 있는 해답이 있습니다. 문제는 그런 분들은 어려운 히브리서를 읽을 마음이 조금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평소 은혜가 충만할 때, 히브리서를 묵상해야 하고, 누구나 예외없이 불씨에 찾아 올 수 있는 고난의 때를 대비해 히브리서 말씀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히브리서의 저자가 무명으로 된 것이 오히려 잘 된 것 같습니다. 저자가 누구인지 보다, 저자의 의도만이 분명한 말씀이니까요.

기독교로 개종한 유대인들 중, 다시 유대 전통으로 돌아가려는 사람들을 권면하기 위해 히브리서 저자는 비교급 서술 방식을 통해 예수님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1장 4절, ‘그가 천사보다 휠씬 뛰어남은 그들보다 더욱 아름다운 이름을 기업으로 얻으심이니’. 분명 히브리서를 시작할 때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만유의 상속자이시고, 모든 세계를 지으셨고,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고,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고, 죄를 정결하게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지극히 크신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계신 분이라고 선포하였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는 천사보다 훨씬 뛰어나다고 비교하십니다. 

한때, ‘엄친아’라는 단어가 유행했었습니다. ‘엄마 친구 아들’ 이란 뜻이죠! 부모님들께서 자녀 교육을 하실 때, 가장 실수 하는 방법이 다른 아이와 비교하는 것입니다. 자녀 교육에서 단기적 효과가 있을 수 있겠지만, 부모님과 자녀 둘 다에게 장기적 관계 손상을 입힐 수 있습니다. 누군가와 비교하는 삶, 비교받는 삶 모두 가급적 지양해야 하는 방식입니다. 세명의 자녀가 있는 가정에서 가운데 있는 아이는 항상 첫째보다 덜 존중받고, 막내보다 덜 관심을 받아 “모” 아니면 “도”라고 합니다. 살아남기 위한 생존법칙을 일찍 터득하던지, 아니면 자존감이 결여되어 아픈 손가락이 되곤 합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예수님에 대해 분명한 신앙관을 갖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천사와 비교합니다. 이유는 예수님이 천사만 못하다고 후회하는 신자들을 권면하기 위해서 입니다. 뿐만 아니라, 유대인들이 존경하는 모세, 목숨처럼 여기는 율법과 전통에 예수를 비교합니다. 그것들 보다 더 소중한 가치있는 분이 예수라는 강조를 하기 위해서 입니다. 긴급한 상황속에 극약처방하는 이유는 예수 믿는 공동체를 후회하고 떠나려는 형제들을 권면하기 위해서 입니다. 무명의 히브리서 저자의 간절한 기도가 보입니다.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예수 그리스도를 인간의 조상이나, 전통에 비교한다는 것은 예수에 대한 가치 절하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히브리서를 읽으며 다시 힘을 내야 하는 사람들이 믿음을 이미 저버린 사람들이라면 모호한 신학적 표현으로 예수의 신성을 설명하는 것 보단, 정확하게 그들의 문제를 파악하고 직언할 필요가 있습니다. 때론 그 방법이 비교방식이라 하더라도 말입니다. 

마치 교회를 떠난 우리의 자녀들에게 ‘매 주일 교회 가라’, ‘새벽기도 해라’, ‘적어도 일년에 성경 일독은 해야 한다’, ‘엄마 친구 아들은 이번에 교회에서 단기 선교 간다더라’.. 이런 권면이 더 이상 효과가 없을 때, 내 자녀가 지금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파악하고, 그것 보다 더 중요한 예수님에 대해 정확하게 지적해 주어야 하는 심정으로 히브리서를 묵상해야 합니다. 그러면 히브리서를 덮고 있는 “검은 구름”이 벗겨지고, 구약과 신약에 종종 나오는 어려운 신학 용어들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평소 은혜가 충만할 때, 그런 성경 지식과 배경들을 이해하고 있어야 합니다. 언제 찾아 올지 모르는 신앙의 검은 구름이 덮이면 무엇을 말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더이상 신앙적 권면의 말씀들을 듣고 싶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이런 관계성들이 아마도 대부분 사람들이 히브리서가 어렵다고 생각하는 이유가 되지 않을까 합니다. 

저는 현재 히브리서 1장에서 7장까지 묵상하며 설교한 결과 두가지 결론을 내렸습니다. 첫째, 히브리서에 언급되는 천사는 캐나다 포스트(Canada Post) 우편 배달부이고 예수님은 편지, 그 자체입니다. 캐나다에서 좋은 직장 중 하나는 캐나다 포스트인 것 같습니다. 시간 활용도 좋고, 급여와 베네핏도 좋습니다. 그 직장에 들어가기 위한 온라인 한인 카페도 있을 정도로 인기가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정작 중요한 것은 우편 배달부가 아니라, 그들이 전달하고 있는 편지입니다. 특히, 나에게 오는 편지가 있다면 우리는 캐나다 포스트 직원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그 편지를 기다려야 합니다. 그 편지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입니다. 안타깝게도 다년간의 경험상, 사람들은 배달부의 태도, 생김새, 인종, 또 그들의 베네핏에 너무 관심을 갖는 나머지 그들이 전달하고 있는 편지에 대한 관심을 잃어가는 것 같습니다. 

예수를 믿는 신앙에서 뒤돌아 선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대부분 상처가 있습니다. 교회에 대한 상처, 목사에 대한 상처, 교인들에 대한 상처 등등 입니다. 예수 자체에 대한 상처가 아니고, 예수님께서 전한 말씀에 대한 후회가 아니고, 그것을 전달하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오는 상처들이 큽니다. 히브리서는 그렇게 상처받고 낙심한 자들을 향해, 다시 예수님의 위대하심과 우리를 위해 이 땅에 왜 오셨는지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 말씀 8장 1절에서 요약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단어 “대제사장”입니다. 우리에게 대제사장이 있다는 것 입니다. 한국인들에게는 감흥이 덜 하겠지만,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대제사장이란 역할의 중요성은 대단했습니다. 예수가 대제사장이란 설명을 목숨걸고 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대제사장은 레위지파 중 아론계통의 자손들만 할 수 있는 매우 특별한 사명인데, 유다지파의 다윗 자손으로 오신 예수가 대제사장이란 표현 뿐만 아니라 강조의 설교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자가 이름을 밝힐 수 없었을 지도 모릅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모두 이해하고 믿는 것 처럼, 예수님은 죄를 지은 인간들의 죄를 위해 대속 죄물이 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고 그렇게 순종하셨습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과 구원의 길을 여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이는 분명 당시 사람들이 잘 알고 있던 대제사장의 역할이기에, 예수님을 믿는 것이 모세와 아론과 율법과 유대전통을 존중하고 지키는 것 보다 더 중요한 일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흠 없는 어린양, 예수 자신”을 대속 제물로 드렸던 대제사장적 사명입니다. 그리고 이 복음의 편지가 인류 모두에게 발송되었습니다. 기독교인은 이 편지의 수취인이고 또한 전달자입니다.      

둘째, 예수님의 그림자를 바라보는 신앙관에서 벗어나 예수님을 다시 바라보아야 합니다. 지구에 있는 모든 물체는 그림자를 갖고 있습니다. 태양의 존재성을 입증하는 과학적 방식이 아니더라도, 문학적으로 나와 가장 닮고 늘 함께 하는 것이 그림자입니다. 어렸을 때는, 동네 친구들과 그림자 밟기 놀이도 하며 어느새 날이 저물면 길어지는 서로의 그림자를 보며 낄낄 웃기도 합니다. 요새는 정신없이 일하며 사느라 내 옆에 함께 있는 그림자의 존재를 잊고 살 때도 종종 있습니다. 그래도 항상 빛 앞에 나가면 그림자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예수님도 인간이시기에 그림자가 있었습니다. 그분이 가시는 길마다 그림자는 가장 가까이에서 그분을 따라다녔습니다. 옛말에, 스승의 그림자는 밟는 것이 아니라고 배웠는데, 가끔 믿는 자들 중에 예수님의 그림자에 심취하신 분들이 계십니다. 예수님이 아니라 그의 그림자에 대한 연구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그분의 말씀외에 그분과 관련되었던 역사적 사료들에 지나친 연구와 관심으로 인하여 미궁으로 빠지시는 분들을 보면 안타깝습니다. 왜냐하면 그림자는 태양의 위치에 따라 시시각각 변화하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를 묵상하다 보면 멜기세덱이란 사람에 대해 자주 언급되며 지금까지 성경을 읽으며 도무지 기억나지 않는 멜기세덱에 대한 정보들의 부재에 자신을 자책합니다. 그런데 성경에 멜기세덱에 대한 자료가 거의 없습니다. 아브라함과 멜기세덱의 관계성을 창세기 14장에서 잠깐 언급한 것과 다윗이 시편 110편에서 그의 이름을 언급한 정도 입니다. 그리고 나서 히브리서에서 멜기세덱과 예수님을 비교하며 그의 이름의 뜻과 역할에 대한 몇가지 정보들을 알려 줍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멜기세덱이란 왕이며 대제사장이었던 조상에 대한 언급과 비교를 통해 예수가 이 땅에 오신 우리의 왕이시며 대제사장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또한 그 이전 아브라함과 다윗 그리고 멜기세덱을 연구해 오던 수 많은 유대인 학자들이 그토록 찾던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을 명쾌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바로 멜기세덱은 예수님의 그림자이고, 우리는 그림자가 아닌 그림자의 본체인 예수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그림자만 바라보면 나의 관점과 다른 사람의 관점의 시각차가 발생됩니다. 설령 예수의 그림자를 찾았더라도 바로 그 그림자의 본체이신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분이 이 땅에 오신 이유, 그곳에 머무르신 이유, 그렇게 말씀하신 목적, 그리고 그분이 걸어가신 십자가 사명의 길로 바라본다면, 서로 다른 곳에서 다른 시대에서 예수를 바라보아도 같은 예수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한 사람, 예수를 바라보는 모임, 우리가 기독교인입니다. 교회입니다. 다시 말하면 교회는 예수를 바라보는 곳입니다. 그곳에 예수님께서 전하셨던 하나님 나라가 세워지는 줄 믿습니다.  

말씀을 정리하며, 히브리서 11장 1절을 암송하는 것처럼,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를 다시 바라보는 것이 믿음의 용기입니다. 낙심한 자들이 다시 예수를 바라볼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는 방법을 히브리서 말씀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이미 교회를 떠난 자들에게 어려운 히브리서를 묵상할 수 있도록 돕고자 한다면 다시 히브리서를 작성한 저자의 심정으로 묵상해 보시길 권해드립니다. 히브리서 묵상을 하면 더 좋은 소망 (7장 19절,  a better hope), 더 좋은 언약 (7장 22절,  a better covenant), 더 좋은 약속 (8장 6절, a better promise)으로 히브리서 말씀을 읽는 은혜와 회복의 기쁨을 경험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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