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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단상] 왕좌에서내려와, 잿더미에앉아드리는회개(요나서 3:1-10)_심포니교회 차정호 목사

왕좌에서 내려와, 잿더미에 앉아 드리는 회개(요나서 3:1-10)

심포니교회 차정호 목사

요나서가 총 4장으로 되어 있죠? 1장에서는 어떤 내용이 있었나요? 하나님께서 요나 선지자에게 니느웨로 가서 너희들의 죄가 가득 찼으니 회개할 것을 선포하라고 말씀하셨지요. 그런데 요나는 이스라엘과 적대국인 앗수르의 니느웨로 가지 않고, 그 반대쪽인 스페인으로 가려고 했는데 마침 그쪽으로 가는 배를 만나 그 배를 타고 가다가 풍랑을 만났고 거기서 잠들었는데 하나님께서 요나를 제비에 뽑히게 하셔서 요나는 바다에 던져지게 됐죠. 

그리고 2장에서 요나는 물고기 배에 삼켜졌고 삼 일 동안 물고기  배 속에서 기도를 했어요. 그런데 그 기도의 내용을 들어보니까 정말 회개한 것처럼 들려요. 얼마나 절박하고 절실했겠어요. 그러니까 그 뱃속에서는 뉘우치고 또 그런 회개 같은 기도를 드렸단 말이죠. 하지만 요나의 기도에 중요한 것이 빠져있어요. 회개 기도에서 중요한 개념은 내가 하나님께 맞춰지지 않은 것을 돌이켜 맞추는 것이 회개 기도예요. 그런데 요나의 기도를 들어보면, 니느웨 백성은 우상을 섬기고 심판받아 마땅한 민족이지만 요나 자신은 그렇지 않다고 하면서 자신의 의를 나타내며 호소했죠. 이것은 진정한 회개의 마음이 아니죠. 

우리가 회개하는 것도 마찬가지예요. 하나님과 함께하지 않게 된 것을 회개하는 것이에요. 내가 미워하고 거짓말하고 훔치고 하는 이런 죄들을 회개하는 것이 아니라, 물론 이것들도 나쁜 것이고 죄인데 그 죄가 저질러지게 된 근본적인 원인은 내가 하나님과 함께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과 단절되어 있는 상태를 회개하는 것이에요. 이렇게 하나님과 떨어져 있는 상태에서 죄인은 죄를 짓고 살아갈 수 밖에 없는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회개란 주님을 떠나 스스로 주인 된 그 상태를 회개하고 주님께로 돌아오는 것 그것이 바로 온전한 회개예요. 

요나가 물고기 배 속에서 기도했을 땐 심지어 이렇게 기도했어요. 2장 4절에 보시면, 내가 주님께 아뢰기를 “주님의 눈앞에서 쫓겨났어도, 내가 반드시 주님 계신 성전을 다시 바라보겠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정답이 무엇인지 알 수도 있고 그렇게 기도할 수도 있어요. 그런데 정말 주님께 마음이 합하여 삶을 돌이켰는가 이것이 회개예요.

니느웨 왕이 회개를 하는데 진짜 회개가 무엇인지를 요나 선지자에게 그리고 먼저 택함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보여 주고 있어요. 참 놀랍기도 하고 참 우습고 슬픈 그런 상황이에요. 먼저 택함을 받았고 말씀을 받은 백성은 주님이 그렇게 말씀하셔도 못 알아채고 오히려 이방 왕이 회개를 하는데 진짜 회개를 하는 거예요. 진짜 회개가 무엇인지 말씀을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3장 1절에, ‘주님께서 또다시 요나에게 말씀하셨다.’ 다시 말씀하셨어요. “너는 어서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이제 내가 너에게 한 말을 그 성읍에 외쳐라.” 1장에는 어떻게 하라고 말씀하셨죠? 1장 2절에 이렇게 나와 있죠. “너는 어서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 성읍에 대고 외쳐라. 그들의 죄악이 내 앞에까지 이르렀다.” 죄를 깨닫고 뉘우치라고 이렇게 선포하라고 하신 것이었죠. 그런데 이제 3장에서 요나는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곧 길을 떠나 니느웨로 갔어요. 그런데 이 니느웨는 둘러보는 데만 삼 일이 걸리는 아주 큰 도시였어요. 그런데 요나는 그 성읍으로 가서 하룻길을 걸으며 큰 소리로 외쳤어요. 

삼 일 길이나 돼야 다 도달하고 전달될 그 성읍에 하루만 외쳤는데 이 심판의 메시지가 다 전달되었어요. 그런데 문제는 뭐라고 외쳤는가 하면 회개를 촉구했다기보다 “사십 일만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진다!” 심판을 선포한 거예요. 너희들이 회개하지 않으면 주님의 심판이 임할 것이다. 이렇게 외치지 않고, 어떻게 외쳤어요? 그냥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질 것이다. 요나의 이 메시지에는 하나님 앞에 너희의 죄를 돌이키라고 하는 내용은 없었어요. 그냥 심판만 외친 거예요. 

그런데 5절에 놀라운 일이 벌어졌어요. 어떤 일이 벌어졌어요? ‘그러자 니느웨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그들 가운데 가장 높은 사람으로부터 가장 낮은 사람에 이르기까지 모두 굵은 베 옷을 입었다.’ “사십 일만 지나면 니느웨가 멸망한다!” 이렇게만 외쳤는데, 자기들의 죄를 깨닫고 회개를 하는 거예요. 회개를 하는데, 니느웨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 니느웨 백성들은 이방 민족이고, 자신들의 신들을 섬겼던 민족이에요. 여기서 그들 신의 말씀을 믿고 하는 뜻이 아닐까 하고, 히브리 원문을 보니까,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이럴 때 하나님을 ‘엘로힘’이라고 하죠. 여기에 ‘엘로힘’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이렇게 되어 있어요. 더군다나 여기서 ‘믿고’라고 하는 ‘아만’이라는 이 단어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그의 의로 여기셨다.’ 했을 때 진짜 하나님을 믿었다고 하는 그런 믿음을 말하는 것이에요. 이렇게 심판만 외쳤는데 회개의 역사가 일어난 거예요. 금식을 선포했어요. 그리고 가장 높은 사람으로부터 가장 낮은 사람에 이르기까지 모두 굵은 베 옷을 입었어요. 굵은 베 옷을 입었다는 것은 무슨 의미죠? 높은 사람이 입는 옷과 낮은 사람이 입는 옷이 달라요. 그런데 다 같이 굵은 베 옷을 입었어요. 일단 굵은 베 옷은 거칠거칠하고, 보기에도 그리 좋지도 않고 그런 거예요. 그리고 회개하는 의미에서 나의 어떤 신분이나 나 자신을 드러내지 않겠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나를 감추는 그러한 의미가 있는 것이죠. 

그리고 6절에 이어서 보시면, 이 소문이 니느웨 왕에게까지 전달됐어요. 니느웨 왕이 회개를 하는데 요나 선지자의 말을 직접 들은 것도 아니었어요. 그냥 소문 듣고. 어떤 선지가가 와서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멸망된다. 이 얘기를 듣고 백성들이 금식하고 베 옷을 입고 회개한다는 소문만 듣고, 선지자의 말을 직접 들은 것도 아니고, 어디 확인 한번 해보자, 이런 것도 아니고 그냥 소문을 듣고 그다음에 어떻게 했어요? 그 왕이 회개하는 자세가 어땠나요? ‘그도 왕의 의자에서 일어나, 걸치고 있던 왕의 옷을 벗고, 굵은 베 옷을 입고 잿더미에 앉았다.’ 왕의 의자에서 일어났어요. 자기가 왕인데 그 자리에서 내려온 거예요. 그냥 내려온 정도도 아니고 걸치고 있던 왕의 옷도 벗었어요. 왕이고 뭐고 이게 중요한 게 아니라는 거죠. 그리고 왕도 굵은 베 옷을 입었어요. 그뿐만 아니라 어디에 앉았어요? 왕좌에 앉은 게 아니라 잿더미에 앉은 거예요. 잿더미 위에. 

우리가 회개를 한다고 할 때, 주님을 떠나있는 상태에서 누가 왕이예요? 나 자신이 왕이에요. 이런 거죠. 내가 좋아야 좋은 거죠. 내 뜻이 이루어져야 좋은 거죠. 내 생각이 중요하고, 내 느낌이 중요하고, 내 꿈이 중요하고, 내 삶이 중요하고, 내가 중심이고 내가 왕이란 말이에요. 우리가 다 나를 신으로 삼는 우상숭배자가 된다는 말이에요. 그 자리에서 일어나야 해요. 거기서 내려와야 해요. 그리고 어떻게 해야 해요? 왕의 옷을 벗는 거예요. 나를 부인하는 것이에요. 나를 내려놔야 해요. 끊임없이 내 위주로 판단하죠? 나 중심적인 자아가 계속 살아서 꿈틀꿈틀 되죠? 막을 수가 없어요. 그런데 그것이 죄성과 버무려져서 나온다는 것이에요. 내가 왕으로서 세상을 바라볼 때는 나 위주로 살아가는 것이 너무나 타당하고 그래야 좋은 거예요. 나한테 딱 맞으니까. 나를 제일 잘 맞춰주는 사람이 누굴까요? 나를 제일 좋아하는 사람이 누굴까요? 이 세상에서 나만큼 나를 사랑하고 좋아하는 사람이 또 어디 있겠어요? 그런데 정작 우리는 한계가 있어서 내가 나를 모르기도 하죠. 내가 나를 잘 안다고 하는 착각하는 모순덩어리예요. 

원래 주인이신 예수님이 나의 왕 자리에 자리하고 계시지 않는 이상 바르게 생각할 수 없어요. 삐뚤어지게 생각할 수밖에 없어요. 그러니 니느웨 백성들이 온갖 죄를 다 저지른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니까 자신들의 죄를 깨닫게 된 거예요. 낱낱이 죄를 지적할 필요도 없었어요. 우리는 누가 구체적으로 지적해 주거나 하나님이 구체적으로 깨우쳐 주시지 않으면 아무도 모르는 줄 알고 가만히 있어요. 정말 들킬 때까지. 나중에 다 깨지고 나서야 회개하고 돌아오고 하나님의 은혜라고 한다고요. 그러나 그전에 얼마나 많은 말씀이 있었어요. 

요나도 얼마나 많이 돌이킬 기회가 있었어요? 사실은. 풍랑이 일었을 때, 풍랑을 보내셨을 때 ‘어이쿠’하고 자기 길을 돌이켰어야죠. 제비 뽑혔을 때 ‘어이쿠야’ 역시 하나님께서 다 알고 계셨구나 하고, 너무나 부끄럽고 창피하지만, 주님 뜻대로 가야지 했었어야죠. 물고기 배 속에서도 니느웨 백성을 정죄하며 진정한 회개가 사실 없었죠. 그리고 물고기가 요나를 니느웨에다 토해 놓을 때 니느웨에 심판의 메시지를 전했어요. 요나가 일일이 백성들의 죄를 이거저거 지적하지도 않았어요. 니느웨 백성들은 그 심판의 메시지를 피하려고 하지도 않았어요. 왕이 명령해서 그들이 이렇게 다 금식하고 베 옷을 입은 게 아니었어요. 자신들이 요나 선지자의 메시지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어져서 하나님 앞에 이렇게 회개했어요.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시는 자는, 요나의 외침을 듣고서 저거 어떤 선지자인데? 저자가 뭔데? 그런 게 중요하지 않았어요. 저 메시지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하시는 말씀이다. 바로 이게 중요했어요. 

니느웨 백성들은, 사실 요나 선지자가 니느웨에는 오지도 않으려고 했고 그의 불순종으로 인해서 어떤 기가 막힌 과정으로 여기까지 왔는지 그것을 모두 알았다고 해도 그것이 중요한 게 아니었어요. 자신들의 죄를 인정하지 않으려고, 그런 엉터리 같은 요나 선지자가 하는 소리가 오죽하겠어? 라고 하며 들을 필요조차 없다고 자신들의 죄를 덮을 핑계를 삼지 않았을 거예요. 

니느웨 백성들은 하나님의 메시지를 들은 거예요. 그래, 맞아 내가 죄인이야 하나님 앞에 나는 죄인이야. 그래서 금식을 하고 베 옷을 입은 거예요. 그 왕도 마찬가지였어요. 엉터리 같은 요나 선지자라도 직접 와서 왕에게 전하는 말을 듣고 회개한 것이 아니었어요. 단지 소문만 듣고도 왕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버린 거예요. 그 메시지를 듣고서. 그뿐만 아니라 왕의 옷을 벗고, 굵은 베 옷으로 갈아입고 잿더미 위에 앉았다고 그랬어요. 

우리가 앉을 자리는 우리 중심에 있는 왕좌가 아니에요. 내려와야 해요. 내려오는 것이 우리를 부인하는 것이에요. 우리 자신을 보면 부인할 만하지 않나요? 저도 저를 보면, 정말 내가 나를 주장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것이죠. 은혜받았는데도 죄성과 싸우잖아요. 이처럼 말도 안 되는 견딜 수 없는 이 죄성을 가지 존재인데 그런데 그리스도의 은혜로 내가 의롭다고 여김을 받는 은혜를 입게 되었다니, 어떻게 예배를 안 드릴 수 있고, 어떻게 찬양 안 할 수 있고, 어떻게 나를 주님께 맞추지 않을 수가 있을까요. 이 주님의 사랑을 진짜 믿는다면 어떻게 내 생각과 내 마음과 내 주장과 내 꿈 이런 게 어떻게 따로 있을 수 있나요. 완전하시고 선하신 주님께 모든 것을 기꺼이 맡길 수 있고 나를 받아주시는 자체로 감사할 뿐이죠.

그리고 7절을 이어서 보겠습니다. ‘왕은 니느웨 백성에게 다음과 같이 선포하여 알렸다. “왕이 대신들과 더불어 내린 칙령을 따라서, 사람이든 짐승이든 소 떼든 양 떼든, 입에 아무것도 대서는 안 된다. 무엇을 먹어도 안 되고 물을 마셔도 안 된다.”’ 이것은 금식 중에 최고의 금식이죠. 물까지 마시지 않겠다는 것은 죽을 각오를 한 거예요. 참 이상하죠? 살려달라고 회개하는 것 같은데 죽겠다는 각오를 한 거예요. 그렇다면 무슨 뜻일까요? 단순히 죄의 상태로 살아있는 것은 의미가 없고,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의 뜻대로 의롭게 살기를 구한다는 것이죠. 죄를 용서받겠다는 마음에서 물까지 마시지 않는 회개를 한다는 것이에요. 그런데 이것을, 왕이 온 백성이 회개하도록 칙명을 내린 거예요. 심지어 짐승들까지도 엄청난 거죠. 살아있는 모든 것들은 다 회개하라는 거예요.

8절에 “사람이든 짐승이든 모두 굵은 베 옷만을 걸치고, 하나님께 힘껏 부르짖어라.” 여기서도 ‘하나님’, 이 단어가 ‘엘로힘’이에요, 엘로힘, 이스라엘의 하나님, 우주를 창조하신 그 하나님께 힘껏 부르짖으라는 것이에요. 그냥 자기네들의 신에게 회개한 게 아니에요. “저마다 자기 가던 나쁜 길에서 돌이키고, 힘이 있다고 휘두르던 폭력을 그쳐라.” 이건 요나가 해야 할 얘기인데 누가 하고 있어요? 이방 왕이 자기가 왕 아니라고 왕좌에서 일어나서 왕의 옷까지 벗어 던지고 베 옷까지 입고 잿더미 위에 앉아서 이렇게 왕이 금식 회개의 칙명을 내린 것이라고요. 

왕, 자신도 내려앉았어요, 왕도. 죄인이 힘쓰면 죄만 지을 뿐이죠. 죄인에게 기회가 생기면, 자유가 쥐어지면, 죄지을 자유를 누리는 것이에요. 기분 상하고, 자존심 상하는 소리로 들리더라도 메시지를 들어야 해요.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면 내게 심어져야 해요. 부딪쳐야 해요. 내가 쪼개지고 깨뜨려 지는 것이 하나님 말씀의 역사예요. 계속 내 생각만 나오고, 내 주장만, 내 신학, 내 신앙, 이것만 계속 나오면 어떻게 내가 깨져요? 

9절을 보실까요? “하나님께서 마음을 돌리고 노여움을 푸실지 누가 아니냐? 그러면 우리가 멸망하지 않을 수도 있다.” 여기서 보면 단순히 그냥 살기 위해서 이렇게 금식하며 몸부림친다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죠? 물까지 마시지 말고 우리 회개하자 이렇게 한 것이니, 죄를 용서받자라는 것이죠. 그 노여움을 푸실지 우리가 저지른 죄에 대해서 용서를 받자. 거기에 목적이 있다고 이게 진정한 회개라고 할 수 있죠. 그런데 이방 왕이 이렇게 진정한 회개를 하고 있다고요. 말씀 받은, 먼저 택함 받은 이스라엘 백성이 아니라, 선지자도 아니라. 

그런데 여기 9절에 하나님께서 마음을 돌이키시고 할 때, 여기서 ‘하나님’이란 단어는 조금 더 특별해요. ‘엘로힘’ 앞에 ‘하’라는 정관사가 붙어있어요. ‘하 엘로힘’, 바로 ‘그 하나님’ 이스라엘의 바로 그 하나님. 자기네들 신한테 가서 살려달라고 외치는 그런 회개가 아니었어요. 

10절에도 보시면, ‘하나님께서 그들이 뉘우치는 것을 보시고’, 여기서도 마찬가지예요. ‘하 엘로힘’ 바로 그 하나님께서 ‘그들이 뉘우치는 것, 곧 그들이 저마다 자기가 가던 나쁜 길에서 돌이키는 것을 보시고’, 이게 회개예요. 내가 가는 길을 돌이켜서 즉 나를 부인하고 십자가의 길 주님의 길 따르는 것, 주님을 따르는 길은 꽃길만이 아니에요. 십자가의 길이라고요.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너라. 그런데 자꾸 ‘나의 길’ 내가 세운 계획, 내 뜻, 내가 좋은 길, 이 계획을 자꾸 이루어지기를 원한다고요. 이방 왕도 그렇게 안 했어요, 이방 왕도. 하나님께서 아주 극적으로, 먼저 택하신 백성들, 선지자에게 말씀하시는 거예요. 진정한 회개는 이런 거야. 그런데 너희들 중에서 진정한 회개하는 자가 하나도 없구나. 내가 이방 백성을 구원하는 것을 보라. 그래서 하나님께서 뜻을 돌이키셔서 그들에게 내리시겠다고 하신 재앙을 내리지 않으셨어요. 

주님께서 뜻을 돌이키세요. 주님께서 한번 말씀하셨으면 다 이루어져야 하잖아요. “선악과를 따먹으면 정녕 죽으리라!” 그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져야 하잖아요. 정녕 우리는 죽음의 심판을 받게 되어 있잖아요. 그런데 그 뜻을 돌이키시면 어떻게 돼요? 하나님이 말씀을 어기시는 거라고요. 그래서 반드시 죽음의 심판을 내리셔야만 해요. 그래서 죄 없으신 예수님이 우리 대신 죽으신 것이잖아요. 여기서도 마찬가지예요.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죽으셨다는 것을 믿는다는 것은 회개를 통해서 믿는 것을 말하는 것이에요. 회개 없이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영생 보험 드는 것과 같은 가짜 믿음이에요. 내가 믿는다고 손해볼게 있겠나? 그렇게 위대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이 기도도 들어주시고, 함께 하시고, 사랑도 해주신다는데 안 믿을 이유가 있나? 그런데 이런 자기중심적인 회개 없는 믿음은 주님께서 그냥 받아주실 수가 없어요.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지성소에 대제사장만 일 년에 한 번씩 들어가는 곳, 어린 양의 피가 뿌려지는 그 곳, 그런데 온전한 속죄가 드려지지 않고 주께서 말씀하신 대로 준비하지 않고 주님의 임재를 맞이하면 어떻게 되죠? 그 자리에서 즉사해 버리는 거죠. 바로 그거예요. 주님께서 진노의 뜻을 돌이키셔서 우리를 용서해 주실 때 그냥 용서해 주시는 게 아니에요. 회개를 통해 용서 받는 것이에요. 온전한 회개는 어떻게 이루어져요? 오직 십자가를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거예요. 우리가 어떻게 온전한 회개를 해요? 우리가 온전한 회개할 수 있을까요? 회개조차 온전히 하지 못 해요. 완전한 그리스도의 은혜만이 있을 뿐이에요.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 지신 거예요. 우리가 온전히 믿을 수 있을까요? 온전히 믿지도 못해요. 주님께서 다 이루어주신 은혜를 믿을 뿐이에요. 

우리의 회개가 용서를 받게 되는 것은 회개에 앞서 주님의 속죄가 있었기 때문이에요. 예수님의 대속이 없었다면 우리가 아무리 회개를 한들 용서받을 길이 없는 것이에요. 예수님의 십자가가 회개를 용서로 응답받게 하시는 것이에요. 회개하고 믿는 게 우리로부터 시작되지 않아요. 죄로 죽은 우리를 성령님께서 살리셔서 회개할 수 있도록 해주시는 은혜를 입었기 때문에 회개하는 거예요. 믿을 수 있는 은혜를 주셔서 믿는 거예요.

우리가 구원 얻는 데 기여한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요. 한 것이 하나 있다면, 예수님이 십자가 지시도록 죄지은 것밖에 없어요. 주님께서 십자가 지시고 부활하셔서 이 구원의 복음을 우리에게 베푸시는 데 있어서 우리가 일조한 게 하나 있다면 그것은, 내가 스스로 주인 되려 한 죄를 지은 것밖에 없어요. 

그리고 하나 더 있다면, 우리를 구원하러 오신 예수님을 우리 손으로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일이죠. 

“뜻을 돌이켜 그들에게 내리시겠다고 하신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않으셨다.” 예수님 때문에 우리가 영원히 죽어야 할 그 심판을 당하지 않게 된 거예요.

이러한 죄인인 나를 살리신 예수님을 진정 믿는다면, 더 이상 나를 주장하지 않고, 예수님만 찬양하고, 예수님만 영원히 높이는 거예요.

요나는 어떤 회개를 했어요? 자기 자신에 대한 회개가 없었어요. 자기중심의 자리에서 내려오지 않았어요. 자신은 의롭다고 주장했어요. 이방 민족처럼 우상 섬기지 않는 주님의 택함 받은 주님의 백성이라고 했어요. 틀리지 않은 것 같죠? 그런데 참 회개와 참믿음은 내 중심에 주님이 자리하시도록 내가 내려와야 하는 거예요. 내가 여전히 주인으로 있으면서 주님을 믿는다는 것은 믿음일 수 없어요. 이런 믿음으로도 구원을 받나요? 부끄러운 구원이라도 받을 수 있는 것일까요? 이런 믿음은 아직 구원의 은혜에 속하지 않은 것이에요. 주님이 말씀하시는 회개와 믿음은 내가 내 주인의 자리에서 내려오는 것이에요. 

니느웨 왕이 자기 왕 자리에서 내려와서 잿더미 위에 앉았어요. 자기를 부인했어요. 죄인인 자신이 주인 된 죄를 회개했어요. 그리고 ‘하 엘로힘’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왕좌에 모셨어요. 

우리 모두가 자신의 왕좌에서 내려오는 자신을 부인하는 회개와, 영원 전부터 나의 왕이신 예수님을 본래의 왕좌에 모시고 따르는 믿음으로, 주님의 용서와 구원의 은혜를 얻게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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