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룻과 보아스의 기업 무르기(11)
룻 4:6, “그 기업 무를 자가 이르되 나는 내 기업에 손해가 있을까(내 기업을 황폐하게 만들지 않을까) 하여 나를 위하여 무르지 못하노니 내가 무를 것을 네가 무르라 나는 무르지 못하겠노라 하는지라.”
이에 그 친족은 “나는 내 기업에 손해가 있을까 하여 나를 위하여 무르지 못하노니 내가 무를 것을 네가 무르라 나는 무르지 못하겠노라”라고 말한다. 여기서 “손해가 있을까”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아쉐히트’로서, ‘솨하트’의 히필 동사인데, ‘솨하트’의 히필 동사는 ‘망치다, 황폐하게 만들다’(spoil, ruin)라는 뜻이다. 그래서 “나는 내 기업에 손해가 있을까 하여”(펜 아쉐히트 에트-나할라티)는 정확히 번역하면, “나는 내 기업을 망치지 않을까 하여”, “나는 내 기업을 황폐하게 만들지 않을까 하여”라는 뜻이다.
곧 그 친족은 엘리멜렉 가족의 토지를 물러준 후에, 그 토지를 경작할 남자가 엘리멜렉 가족에게 없으므로 자신이 그 토지까지 경작해서 나오미와 룻을 부양해야 하기 때문에 정작 자기 가족의 기업 토지를 잘 돌보지 못해 황폐하게 만들지 않을까 하여, 엘리멜렉 가족의 토지를 무르지 못하겠다고 말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진짜 이유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가 “내 기업을 황폐하게 만들지 않을까”라는 똑같은 가능성을 잘 알면서도 처음에는 엘리멜렉 가족의 토지를 무르겠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이 친족이 처음에는 무르겠다고 했다가 나중에는 무르지 못하겠다고 말을 바꾼 진짜 이유는, 처음에는 엘리멜렉 가족의 토지를 자기가 받을 줄 알았다가, 나중에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장차 엘리멜렉 가족의 토지를 받게 된다면, 그 토지가 자기 가문의 기업 토지로 편입되는 것이기 때문에, “내 기업을 황폐하게 만들지 않을까”라는 그런 가능성은 아예 문제 자체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엘리멜렉 가족의 토지를 받지 못하게 된다면, 자신이 토지 무르는 값을 대신 지불하기 때문에 감수해야 하는 손해와 그 후에 엘리멜렉 가족의 토지를 경작하여 나오미와 룻을 부양하기 위해서 기울여야 하는 노력이 자기를 위해서는 아무 쓸모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 친족은 철저하게 자기의 이익과 손해를 계산해서 그것을 기준으로 결정을 내리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룻기는 이 사람의 이름을 밝히지 않고 그저 ‘아무개’(룻 4:1, 펠로니 알모니)로 표현한다. 이런 종류의 사람을 성경은 하찮은 존재로 평가하는 것이다.
이 친족은 죽은 말론의 친형제가 아니기 때문에, 시형제결혼법의 문자적 규정대로 하면 말론의 아내였던 룻과 결혼해서 아들을 낳아 그 아들을 죽은 자의 양자로 입적시켜 죽은 자의 이름이 끊어지지 않게 해야 할 의무는 없다. 그러나 그는 엘리멜렉 가문의 가장 가까운 친족으로 기업 무를 자의 의무를 진 최우선 순위의 사람이라는 사실을 고려하면, 자식 없는 엘리멜렉 가문을 위한 땅 무르기가 온전하게 실현되도록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룻과 결혼해서 아들을 낳아 그 아들이 엘리멜렉 가문의 아들로서 땅을 상속받게 해야 할 의무를 수행해야 마땅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의무 수행을 거부한 것이다.
룻 4:7-8, “7.옛적 이스라엘 중에는 모든 것을 무르거나 교환하는 일을 확정하기 위하여 사람이 그의 신을 벗어 그의 이웃에게 주더니 이것이 이스라엘 중에 증명하는 전례가 된지라 8.이에 그 기업 무를 자가 보아스에게 이르되 네가 너를 위하여 사라(무르라) 하고 그의 신을 벗는지라.”
그 친족은 자신이 엘리멜렉 가족의 가장 가까운 친족으로서 자신이 수행해야 할 자신의 의무를 거부하고 그 의무를 보아스에게 넘기면서 그 사실을 확정하여 증명하는 표시로 자기 신을 벗는다. 8절에서 그 친족이 보아스에게 “네가 너를 위하여 사라”라고 한 말은 정확하게 번역하면 “네가 너를 위하여 무르라”라는 뜻인데, 이 말은 어폐가 있다. 왜냐하면 6절에서 그 친족은 “나를 위하여 무르지 못하노니”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 친족은 자기를 위하여 무르지 못하겠다고 말해 놓고, 정작 보아스에게는 “너를 위하여 무르라”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무르는 일은 분명히 보아스에게도 손해가 되는 일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친족은 마치 보아스를 위하여 자신이 양보하는 것처럼 말하고 있다. 이중적이고 위선적인 인간이다.
혹시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서 그 친족과 같은 모습은 아닌가? 절망에 빠져 도움을 간절히 원하는 이웃 앞에서 자신의 경제적 손익을 계산하고 그 계산에 따라 그 이웃을 외면하는 이기적인 모습에 더하여, 그 이기적인 언행을 화려한 언변으로 합리화하는 이중적이고 위선적인 모습까지 보이고 있지 않는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걸어가야 할 삶은 분명하다. ‘아무개’라는 하찮은 사람으로 평가받는 그 친족의 이기적 삶이 아니라, 장차 다윗을 넘어 예수 그리스도로 이어지는 보아스의 희생적 삶이 바로 그것이다. 이 희생적 삶이 바로 희년 실천이며 십자가의 길이고 제자도이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더 이상 그 친족과 같이 이기적이고 위선적인 삶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세상에서 욕보이지 말아야 하고, 보아스와 같이 희생적이고 대속적인 삶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본받아 살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