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희년 이야기] 느헤미야의 희년 개혁(4)
느 5:14-19, “14.또한 유다 땅 총독으로 세움을 받은 때 곧 아닥사스다 왕 제이십년부터 제삼십이년까지 십이 년 동안은 나와 내 형제들이 총독의 녹을 먹지 아니하였느니라 15.나보다 먼저 있었던 총독들은 백성에게서, 양식과 포도주와 또 은 사십 세겔을 그들에게서 빼앗았고 또한 그들의 종자들도 백성을 압제하였으나 나는 하나님을 경외하므로 이같이 행하지 아니하고 16.도리어 이 성벽 공사에 힘을 다하며 땅을 사지 아니하였고 내 모든 종자들도 모여서 일을 하였으며 17.또 내 상에는 유다 사람들과 민장들 백오십 명이 있고 그 외에도 우리 주위에 있는 이방 족속들 중에서 우리에게 나아온 자들이 있었는데 18.매일 나를 위하여 소 한 마리와 살진 양 여섯 마리를 준비하며 닭도 많이 준비하고 열흘에 한 번씩은 각종 포도주를 갖추었나니 비록 이같이 하였을지라도 내가 총독의 녹을 요구하지 아니하였음은 이 백성의 부역이 중함이었더라 19.내 하나님이여 내가 이 백성을 위하여 행한 모든 일을 기억하사 내게 은혜를 베푸시옵소서.”
느헤미야는 자신이 총독으로 재임한 십 이년 동안 정당하게 받을 권리가 있는 총독의 녹을 먹지 않았다. 그는 그 이전 총독들과 달리, 백성에게서 양식과 포도주와 또 은 사십 세겔을 빼앗지도 않았고, 백성을 압제하지도 않았다. 그는 재산 증식을 위해 땅을 사지도 않았다. 느헤미야를 본받아 그의 종자들도 백성을 압제하지 않고, 오히려 성벽 재건의 노역을 함께 감당했다.
그뿐만 아니라 느헤미야는 자기 사재를 털어 노역을 감당하는 유다 사람들과 민장들, 그리고 이방 족속들 중에서 나아온 자들에게 매일 엄청난 양의 식사를 대접하였다. 그것은 모두 백성의 부역이 중함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는 백성의 힘겨운 사정을 안 정치인이었고, 권력을 이용해 불의한 소득을 탐내지 않고 도리어 자기를 희생하며 스스로 모범을 지키며 산 정치인이었다.
만약 빈자에게서 이자와 토지와 주택과 자녀를 취한 귀족과 민장을 꾸짖으며 당장 빈자에게 돌려주라고 명령한 느헤미야의 사회 개혁이 성공하지 못했다면, 이스라엘 백성은 부자와 빈자로 나뉘어 사회 통합은 와해되었을 것이고, 침략 기회를 노리는 적대 세력에 의해 예루살렘 성벽은 재건되지 못했을 것이다. 희년 토지·주택·자유 회복과 빈민 무이자 대부와 안식년 부채 탕감은 귀환 공동체의 사회 통합과 건국(建國)과 영적 갱신을 위해 매우 중요한 법이었던 것이다.
느헤미야의 사회 개혁이 성공할 수 있었던 중요한 원인은, 느헤미야가 자신의 삶에서 스스로 먼저 희년 정신을 실천하는 희년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느헤미야는 땅을 사지도 않았고, 예루살렘 성벽 재건에 매진하였으며, 돈과 양식을 꾸어주면서 이자를 받지 않았고, 이방인에게 종으로 팔린 유다 사람들을 대속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그는 십이 년 동안이나 자신이 받을 권리가 있는 총독의 녹을 백성에게 요구하지 않았고, 오히려 자신의 사재(私財)를 털어 자기에게 온 수 백 명의 사람들을 위해 날마다 식사를 책임졌다.
바로 이런 느헤미야의 정의롭고 희생적이며 언행이 일치하는 삶을 귀족들과 민장들도 알았기 때문에, 그의 개혁 조치에 군말 없이 복종하고 아무런 보상도 요구하지 않은 것이다. 느헤미야는 자신의 자기희생적인 개인 생활과 자신이 제안하는 사회 개혁의 내용이 모두 희년 정신으로 일치했기 때문에, 귀족들과 민장들로부터 도덕적 존경을 받아 반발을 받지 않고 사회 개혁을 성공시킬 수 있었다.
가난한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느헤미야의 개혁을 통해, 저당 잡혀 빼앗긴 땅과 집을 되찾고, 종으로 끌려간 자녀들을 되찾고, 이자를 돌려받고 빚의 원금까지 탕감 받은 것은, 바로 안식년과 희년을 모두 포함하는 넓은 의미의 희년이 그들에게 선포된 것과 똑같은 것이었다. 왜냐하면 희년에 땅과 집과 자유를 되찾고 안식년에 빚을 탕감 받는데, 이 모든 일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일어났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자까지 돌려받았다. 따라서 느헤미야의 개혁은 한 마디로 희년 개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