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생존입니까? 생명입니까?”


밴쿠버동산교회 장천득 목사
캐나다는 아름다운 나라입니다. 한때는 기독교 국가였습니다. 인권을 존중하며 이민자를 존중하는 사회주의 복지국가라고 말합니다. 캐나다는 1971년 다문화주의 (Multi-culturalism)를 헌법으로 채택하며 기독교를 폐기처분 했습니다. 그래도 한때는 기독교 국가였습니다. 사람들은 캐나다의 아름다운 자연에 경탄합니다. 그러고 보면 나름 매력 있는 나라입니다. 그런데 이민자로 살아가는 것이 정말 쉽지 않습니다. 특별히 반기독교적 문화, 다문화주의에서 신실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더더욱 어렵습니다.
자연이 아름다운 나라, 그런데 우리의 삶은 어떤가요. “내가 지금 제대로 가고 있는 거 맞아? 내가 잘 살고 있는 걸까? 하나님이 인도하셔서 왔는데 현실은 왜 이렇게 만만치 않을까요?” 라는 질문을 해보기도 합니다. 때로는 사방이 지뢰밭입니다. 교회는 그나마 유일한 안전지대인데 마치 상처받기로 작정한 사람들이 모이는 것 같습니다. 한인사회 곳곳에서 불협화음이 일어납니다. 누가 잘되면… 사람들은 배가 고픈 것은 참아도 배 아픈 것은 못 참습니다. 잘 되는 사람도 있지만 사실 어려운 사람이 대다수입니다. 신앙이나 본질보다는 늘 만만치 않은 현실, 실존이 문제입니다. 이민자로 살면서 현실의 장벽을 마주하면 아름다움을 즐길 여유가 없습니다. 공원에서 산책할 여유, 정원에 피여 있는 꽃 하나 즐길 마음의 여유 없이 달려오신 분들이 참 많습니다. 연세 드신 어르신들의 얼굴에는 이민생활의 년 수가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그 고단함과 억척스러움을 설명하지 않아도…. “아, 정말 고생 많으셨구나” 언어와 문화가 다른 땅에 와서 그동안 전쟁처럼 살아오셨구나!…. 왜 얼굴과 마음에 상처(스티그마)가 남지 않을까요? 처음에는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왜 말씀이 저렇게 억세고 드셀까? 굳이 남은 음식 잔반을 저렇게 싸가지고 가시는 걸까? 하나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캐나다에서 그만큼 살아 본적 없고 늙어 본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20여년 지나고 나니 어르신들의 모습이 이제 이해가 됩니다. 이젠 어르신들을 닮아가는 나자신을 보게 됩니다. 다 이유가 있었구나! 저럴 수밖에 없었구나! 살아보지 않으면 경험하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습니다. 결코 이민자의 마음, 어르신들의 삶을 전혀 이해하지 못합니다. 한 집사님의 말이 귓전을 때립니다. “내가 아파서 드러누우면 우리 가족 책임져줄 사람 하나 없습니다.” 나를 책임져주는 사람 하나 없는 낯선 땅에서 분투하며 달려온 삶이 어떻게 한가하고 여유로울 수 있을까요? 이제는 그 마음 십분 이해합니다. 어찌 보면 지금껏 살아 있는 것이 기적이요 은혜입니다. 일단 살아있기에, 실존이 있기에 본질에 대한 고민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민자로서 분투하며 존재함 자체에 대한 깊은 응원과 따뜻한 박수를 보냅니다. 생존의 전쟁터에서 살아 남았으니 참으로 다행스런 일이요 감사한 일입니다. 너무나 수고 많았고 고생 많았습니다. 열심히 수고한 모두를 존경하며 충분히 공감하며 이해합니다.
그런데, 가끔 그런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은 그런 우리를 어떻게 보실까요? 혹시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을까요? “너 정말 가족을 위해, 자녀를 위해 정말 애쓰며 수고 많았다. 열심히 살았다. 고생했다. 그런데, 열심히만 살았구나.” 너무나 바쁘게 생존의 전쟁 속에서 사느라 어느새 하나님을 까맣게 잊었습니다. 하나님은 현실 속에서 멀리 계신 분입니다. 차라리 그게 속 편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전쟁터에서 사느라 삶의 목적과 사명을 잊고, 때로는 가족도 뒤로 하고, 생명의 소중함을 잊어버렸습니다. 소중한 것을 다 잃어버렸습니다.
더 나은 삶, 더 행복 한 삶, 가족을 위해, 생존의 안전자산을 확보하기 위해 열심히 사느라 하나님을 잊었고 천국을 잃어버렸습니다. “먹고 사는 문제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죽고사는 문제입니다!” “생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생명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서먹하지는 않습니까? 생존을 위해 살다가 영원한 생명을 잃어버리고는 합니다. 한때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다 너무 멀리까지 가버렸습니다. 어느 지점에서 하나님과 관계가 멀어진 것일까요? 은혜를 입은 둘째 아들이었는데 이젠 첫째 아들처럼 되어 버렸습니다. 사랑은 메말랐고 열심 하나만 특심입니다. 각박한 실존 때문에 본질을 잃어버렸습니다. 믿음은 껍데기만 남았습니다. 사실, 구원은 어느 누구도, 저 자신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구원은 교리를 믿어서 구원얻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 속에 있는 사람만이 천국에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열심과 노력이 하나님과 관계없다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생명은 잃어버린 채로 생존만을 위해 산 것은 아닌지…. 하나님과 관계없는 자기 열심, 자기 의로, 안전 지대와 자기왕국을 건설한 것은 아닌지…. 나도 나 자신을 잘 모릅니다. 왜냐하면 스스로를 기만하고 합리화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나를 판단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습니다. 타인이 나를 판단하는 것도 정확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의 칭찬도 의미 없습니다. 나를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비난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나를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기뻐할 이유도 슬퍼할 이유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정확합니다. 나의 전부를 아십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정확하시기에 오늘도 저는 제 자신에게 질문합니다. 하나님은 지금 나에게 뭐라고 말씀하실까? 나는 지금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 것일까? 생존보다 더 중요한 생명, “먹고 사는 문제” 보다 더 중요한 “죽고 사는 문제”를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나는 지금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일까? 스스로 자문해 봅니다. 믿음과 현실 사이에서, 생존과 생명의 경계선에서…. 그래도 “하나님 나라와 의”를 구하며 살고 있는지?” 한번 자문해 보면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