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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로윈, 이태원 그리고 기독교

할로윈, 이태원 그리고 기독교

“올해는 더 멋있을거 같지 않냐?”
“그러게 매년 더 화려하고 큰 행사가 열리는 거 같아”

“이번에는 축제 행사로 크게 열리나 본데, 푸짐한 상품도 준다는데?”

우리는 들떠 있었다

대한민국이 온통 할로윈에 들떠 있었다. 거리 곳곳 간판, 각종 미디어와 TV를 통해 각종 희한한 분장과 소품과 옷차림이 한층 분위기를 고조 시켰다. 그렇게 모두들 별 거리낌 없이 의례 진행되는 크리스마스나 발렌타인데이 처럼 할로윈에 다들 잔뜩 부풀어 있었다. 젊은이들은 해방의 분출구를 찾듯이 이태원으로….. 이태원으로……. 몰려들었다.

할로윈? 생소한데….

사실 할로윈은 한국이나 아시아권 나라들의 행사는 아니다.

할로윈(Halloween)이라는 말은 Hallow라는 Holy(거룩한, 성스러운)라는 옛 영어이고, Eve(ning)이라는 말은 전야라는 말이다. 그래서, 이 할로윈이라는 말은 “Allhallows Eve(ning)”이라는 말, 즉 거룩한 전야라는 뜻이다.

처음에는 유럽 켈트족의 신년인 11월 1일 하루 전 10월31일(그들에게는 New year’s Eve)dl 한 해의 마지막 날로써 가을의 수확에 대하여 감사하고 축하하며 풍요로운 새해를 맞이하기 위하여 이 날 밤 모든 악령과 악마를 몰아내고 새해에는 행운과 풍작을 기원하는 의식을 올린 것이 기원이다. 사실은 지금과 같은 의미로 시작된 것은 아니었다. 또한 가톨릭에서는 10월 31일을 purgartory(영혼이 정화되는 날)로 생각하고 지내오기도 했었다.

원래의 의미를 잃고 변질되다

 시대가 바뀌고 문화가 변해감에 따라 할로윈도 변해갔다. 한 해를 돌아보거나 자신을 추스르는 계기였던 날들이 오래된 호박을 도려내 찢어진 눈과 입을 만들고 밀짚으로 만든 으스스한 각종 귀신 모양 등을 만들어 집밖에 걸어두고 아이들은 무서운 가면과 복장을 하고 돌아다니며 캔디나 초콜릿을 얻는 행사로 전락된 것이다. 악령과 귀신을 놀라게 해 퇴치하는 의식을 흉내 내며 말이다.

귀신을 흉내 내는 의식이 가지는 의미는 신경 쓰지 않고 귀신과 유령 그리고 마귀와 같은 모습이 특이해서 매력적으로 느끼고 즐거움으로 미화한다면 귀신과 유령을 퇴치나 부정의 대상이 아니라 친숙의 대상으로 오해할 소지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인에게 거리낌없이 다가온 이유는 대중문화를 이용한 상업적 수단의 결과물이며 그로 인해 이런 행사를 단순히 축제의 일부이고 서양에서 유입된 건전한 전통적인 문화형식의 일부로 인식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대중문화를 그냥 무분별하게 방치할 경우 기독교적 신앙사고에 반하는 사고로 서서히 의식화 되어 갈 수 있는 위험성이 있다. 분명 귀신은 물리치고 퇴치해야 할 상대이지, 함께 하거나 따라 하거나 즐길 수 있는 대상은 절대 아닌 것이다. 이런 무분별한 행사를 통해 귀신에 대한 생각이 우호적으로 조금씩 바뀔 수 있는 확률이 있다면 우리 아이들에게 좀더 바른 신앙적 가이드를 해 줄 필요가 있다. 가랑비에 옷이 적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사고, 그리고 우리의 민 낯

한국에서 매년 행사 규모가 커지던 할로윈데이, 올해도 어김없이 대단위적으로 커지기 시작했다. 더욱이 코로나 팬데믹의 규제가 차츰 풀리면서 지난 시절 모이지 못하고 즐기지 못했던 억울함(?)이 이번 기회에 분출되어 나왔다. 수많은 젊은이들, 그들은 과연 어디로 모일 것인가? 그들은 이태원을 선택했다. 서양문화와 자유로움의 아이콘 이태원에 모이게 된 것. 같은 시간 서울시내 다른 곳에서는 우파, 좌파가 대립하며 시위를 하고 있었다. 참 우스운 모양이다. 어느 쪽에서는 정권 퇴진을 위해 애국 보수를 위해 태극기와 촛불을 들어 올리는 그 시간에 수많은 젊은이들은 그런 정치적 이분법을 비웃기라도 한 듯이 이태원에 모여 마시고 즐겼던 것이다. 이 장면으로도 한국 사회는 많이 분열되어 있다는 모습을 지울 수가 없다.
그러던 중 예기치 못하게 밤 10시쯤 이태원에서 대형 사고가 일어났다. 축제를 즐기러 수많은 인파가 모였다가 골목길에서 사람들이 뒤엉키면서 우르르 넘어졌다. 150여명 이상이 목숨을 잃고 많은 사람이 다쳤다. 사상자 수가 전례 없이 많은 데다 서울 한복판에서 벌어진 일이기에 몹시 충격적이다. 전세계 기자들은 이를 퍼 날랐고 세계적으로 한국은 후진국에서나 일어날법한 사고를 아무런 손도 쓰지 못하고 당해버린 그야말로 무능으로 얼룩진 나라가 되어버린 것이다.

사망자, 그리고 가족들

지금도 유가족은 끔찍한 비통함에 빠져 있다. 병원에서 생사를 오가며 고통과 싸우는 생존자도 있다. 심폐소생술을 하고 환자를 나르고 지켜보던 사람들은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중이다. 이태원에서 살아 돌아왔다는 이유로 죄책감에 허우적대는 이들도 있다. 참사를 매체로 접한 수많은 국민들조차 분노와 우울과 무기력을 경험한다.

어느 누구든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잃게 된다. 인간의 숙명이다. 주변의 그 어떤 사람도 또한 그것을 지켜보았던 자신도 죽음을 겪게 된다. 누구나 알고 있다. 그리고 그 상실을 직면하는 일은 너무도 고통스러운 일이다. 만수를 누리고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의 주변인도 상실이 큰 법인데 말도 안 되는 사고로 인한 죽음 앞에 그 유가족과 친지, 친구들의 상실감과 분노를 어찌 가늠할 수 있을까?

비극적 참사 앞에서 각각의 죽음을 가벼운 언어로 위로하기보다는 슬픔에 대한 깊은 공감이 먼저다. 그리고 그들에겐 시간이 필요하다. 슬픔에 빠진 사람들이 깊은 상실을 이겨내고 정상적인 생활로 돌아오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잊혀질 수는 없겠지만, 그 시간의 흐름 속에 무뎌질 수 있도록 시간이 필요하다.

친구가 죽어간다. 분노에 찬 젊은이들

이번 사태를 통해 드러난 또 다른 우리의 민 낯이 있다면 젊은 세대, 즉 다음세대가 굉장히 화가 많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사건 진위와는 관계없이 어떤 사실을 마녀사냥으로 정해놓고 주변을 선동해서 다 같이 몰려가 집단으로 광기를 드러내며 자신의 그간 울분의 감정을 쏟아내려는 것은 아닌가? 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가짜 뉴스를 만들고 인터넷을 통해 집요하게 범죄사건의 주동자를 찾는 것 같은 수많은 움직임, 누군가의 책임으로 몰아서 집단행동을 하고자 하는 움직임 등….. 그들의 마음속에 울분들이 있다는 것을 느낀다.

사실 지금의 젊은 세대는 살아갈수록 희망은 안보이고 부채에 허덕이고 정치적 이익에 희생되어 만년 저 소득층처럼 사는 자신의 모습 그리고 그것을 비웃기라도 하는 듯 미디어에서 연일 터지는 벼락부자가 된 사람들 돈 자랑에 허세부리는 모습들 갑부가 된 연예인들을 통해 상대적 박탈감을 느꼈을 것이다. 그래서 오늘 만이라도 모든 것을 잊고 해방의 분출구라도 찾듯이 뛰쳐나온 이태원, 그곳에서 코가 삐뚫어져라 마셔야 했고 즐기기 위해 귀신가면도 써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오늘 하루 살아가는 게 너무 힘들고 싫었을 테니………그런데 그렇게 즐기기 위해 나온 그들의 친구가, 동료가 죽었다. 그들은 이성을 잃을 수 밖에 없다.

이런 모습 속에 놓인 그들, 이토록 아파하고 힘들어 할 수 밖에 없는 젊은이 들에게 우리 교회는 무엇을 해왔고 무엇을 해야 하는가?

사망자와 유족 그 친구들을 위해 전하는 설교가 그들 마음에 대한 진정한 위로가 될 수 있을까?

그들이 느끼는 슬픔에 대한 묘사나 가늠조차 가능할까? 성경에 근거한 언행이라고 해도 피해자와 희생자의 입장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채 가르치려 든다면 장미꽂으로 상처를 내려치는 교훈이 될 것이다.

그럼에도 말씀이고, 예수 그리스도가 해답이다

이태원 참사가 젊은 세대를 향한 복음선포와 전도를 생각하게 한다. 사고 진위를 밝히는 것 그리고 귀신 복장하고 모이는 죄악 된 그곳에 왜 갔느냐? 라는 질의성 논리보다는 상실감이 가득 차고 분노로 가득 찬 이 젊은 세대를 우리가 복음으로 끌어안아야 한다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것은 결국 공허하고 헛될 뿐이다!’ 라는 것을 그들이 모를까? 사실감이 있는 그들도 마음속에 이것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런 그들을 그 길에서 돌이킬만한 강한 복음의 선포가 교회에서 일어나지 않는다면, 우리는 직무유기를 하고 있는 셈이다.

청년들, 다음세대들…. 그들은 진리에 목마르다. 이 세상을 넉넉히 이길 복음, 진리, 그것이 그들을 이 모든 시궁창 같이 느껴지는 그들의 삶에서도, 또한 이런 비극적 참사 앞에서도 자유롭게 할 것이다.

인간의 지식과 지혜로도 아니 어떠한 논리로도 설명되기 어려운 커다란 참사 앞에서 우리는 너무나 나약하고, 하나님의 뜻은 과연 무엇인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무엇인지? 이해하는 것은 너무 어렵다. 아니 논리로 이해 될 수 없는 부분이다. 그러나 언제나 선하신 하나님의 뜻, 그분의 섭리를 믿고 따르는 것이다. 답답함이 밀려오는 이 순간, 우리에게 믿음이 필요하다. 그리고 아픔을 당한 이들, 그리고 주변인들, 그리고 아파하는 젊은 세대, 그들에게 지금 교회가 해야 할 일은 ‘우는 자들과 함께 울고’, 예수 그리스도를 그들의 품 안에 소유할 수 있도록 돕는 일이다.

목수 전도사, Woody Kim

(전도사, 작가, 목수, 연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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