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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정재천 교수의 말씀 에너지] 온전한 방향 일관된 행위

온전한 방향 일관된 행위

교회를 다니면서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고 공공연히 말할 성도는 많지 않을 것이다. 예수를 믿는다는 신앙의 고백은 동시에 주님의 복된 언약을 소유하는 특권을 이 세상에서부터 누릴 수 있다는 의미다. 이러한 특권을 잘 설명해 주는 말씀이 요한복음 14장12절이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더 큰 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이 말씀은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주님이 세상에서 하셨던 일들보다 더 큰 일도 할 수 있다고 말한다. 혹시 믿기 힘든 이 약속이 당시 본문의 배경에 등장하는 주님의 열두 제자들에게만 국한 되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안타깝게도 현대 신앙관은 믿음을 갖는다는 것에 대해서 안이하고 수동적인 태도를 갖고 있을 때가 많다. 마치 자신의 삶을 원하는 방향대로 살아가면서 언젠가 다가올 천국을 기대하는 것 정도로 인식할 때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믿음을 소유한다는 성경적 의미는 오히려 이와 정반대다. 믿음을 가진 성도의 삶은 매우 역동적인 영적활동으로 충만하게 채워져 있다. 그러한 역동성이 있기에 믿음을 가진 자는 주님이 하신 일을 할 수 있으며 그보다 더 큰 일도 할 수 있다는 소망도 가질 수 있다. 그렇다면 이렇게 상실해버린 역동성을 어디서 되찾아와야 할까? “어디서”라는 질문 속에 정답이 있다. 바로 역동적인 믿음, 기적을 일으키는 믿음을 찾는 것은 먼저 우리 신앙의 “방향성”을 회복하는 데서 시작할 수 있다. 

교회에 소속되어 건강하게 신앙을 해오신 분들이라면 “믿음”이 그 크기보다는 방향성이 중요하다는 말을 들어보지 않은 분은 별로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좀처럼 이 방향성을 온전히 발견하고 걸어가는 사람은 많지 않다. 영국의 대문호 G. K. 체스터튼의 말대로 정말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 그래서 로마에 도달하는 사람이 극히 적다”는 위트있는 냉소적 표현처럼 우리는 답을 알면서도 외면하고 있는 것일까? 성도들 대부분은 너무나 순수하고 아름다운 성품을 소유하고 있고 주님께 순종하고 싶어한다. 단지 누군가 그 길을 가르쳐줘야 한다는 게 중요하다.

믿음은 결코 추상적이지 않다. 성경적인 믿음을 갖는다는 것은 사실 “온전한 방향성”과 “일관된 행위”를 함축적으로 담고 있다고 이해하면 더 유익할 것이다. 온전한 방향성이란 우리 삶의 포커스가 “예수 그리스도”만을 향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일관된 행위란 “십자가의 도”에서 벗어나지 않고 걸어가는 것을 말한다. 그러다 보니 믿음을 갖는다는 것은 방향성(예수 그리스도)과 행위(십자가) 둘 중 어느 것 하나라도 부족하거나 빗나가지 않는다는 것이며, 동시에 이것이 부족하다면 신앙의 생명인 역동성, 즉 능력을 상실해 버렸다는 뜻이 된다. 

오늘날 교회에 “예수를 믿는다”라고 고백하는 사람은 많은데 “예수를 닮은 사람”을 눈 씻고도 찾아보기 어려운 것도 이 둘 중에 한 가지 (혹은 둘다) 소유하지 않은 채 반쪽짜리 믿음을 가진 성도들이 많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그 온전한 방향성은, 내 생각, 종교관, 가치관, 심지어 경험과 체험을 통해서 믿는 것이 아니라 요한복음 1장14절에 명시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다”는 진리, 즉 하나님의 말씀에 우리의 초점과 행위를 맞춰야 한다는 것이다. 그 일관된 행위는 먼저 우리가 주님을 영접하기 위해 십자가의 도인 회개를 이루는 것을 들 수 있다. 나의 죄를 대신 지시고 돌아가신 그 주님 십자가의 길이 헛되지 않게 하는 회개가 바로 그 출발점이다. 

그래서 믿음이란 하나님의 언약을 가장 핵심 기준으로 두고 온전한 방향성과 일관된 행위를 갖는 것이다(히브리서 10:36-11:1). 즉, 오직 주님을 바라보며 우리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과 함께 동행하는 삶을 살아가려는 결단이고 행동이 바로 믿음이다. 동시에 이 길이 괴롭고 외로운 길이 될까봐 먼저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주님이 “이 세상을 내가 이미 다 이기었노라”(요한복음 16:33)고 선언하셨기 때문이다. 이런 위로의 말씀을 붙잡고 전진한다면 언젠가 우리도 그가 한 일을 할 것이고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

캐나다크리스천컬리지(CCC) 정재천 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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