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 가운데에서 말하되 마귀에게 기회를 주지 말라
삼위 하나님의 사역을 깨달은 성도들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와 거룩함으로 새 사람의 옷을 입은 모습은 어떠합니까? 사도 바울은 옛 사람의 옷을 벗어 버리고, 마음의 영을 새롭게 하여서 새 사람의 옷을 입은 성도들에게 거짓을 벗어 버리고 진리 가운데에서 말하고, 화를 내어도 마음 속에 분노를 조절해서 마귀에게 기회를 주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25) 그러므로 여러분들이 거짓을 버렸을 때에 각자의 이웃과 함께 진리를 말하십시오. 왜냐하면 우리는 한 몸의 지체들이기 때문입니다. (26) 비록 화를 내어도 죄를 짓지 마십시오. 여러분들은 분노 가운데서 해가 지지 않게 하십시오. (27) 마귀에게 기회를 주지 마십시오. (Translated by YG Kim)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난 성도들은 삶의 변화를 경험하게 됩니다. 바울은 거짓된 욕심을 따라 살았던 옛 사람의 옷을 벗어 버린 성도들의 가장 첫 번째 변화를 거짓을 버리고 이웃과 더불어 진리를 말하는 것이라고 언급합니다(엡 4:25).
그러면 우리들은 ‘거짓’(pseudos: falsehood)을 어떻게 정의 할 수 있습니까?
바울은 25절에서 거짓의 반대되는 개념으로 진리(aletheia: truth)를 언급하고 있는데, 우리들이 이미 생각해 본 봐와 같이 바울이 에베소서에서 언급하고 있는 진리는 ‘말씀’(logos: word)이라는 단어와 연결이 되어서 ‘구원의 복음’(the gospel of salvation)을 의미합니다(엡 1:13). 그러므로 바울이 말하고 있는 ‘거짓’이란 단순히 일상의 삶 속에서 잘못된 사실을 말하는 것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을 얻는다는 복음에 반대하여서 당시 에베소 지역에 널리 퍼져 있었던 풍요의 여신 아데미(Artemis) 숭배나(행 19:24), 로마의 황제 숭배(Emperor worship), 그리고 영지주의(Gnosticism)와 같은 거짓된 가르침을 의미합니다. 바울이 자신의 초기 서신서인 갈라디아서에서 언급하고 있듯이, 다른 복음은 성도들을 혼란에 빠뜨려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질 시켜서(갈 1:7) 성도들로 하여금 영원한 생명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지 못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에베소 교회가 거짓된 가르침으로부터 벗어나서 새 사람으로 살아가는 삶의 첫 번째 원칙은 바른 복음을 깨닫고 믿음으로 이웃들과 더불어 진리를 말하는 것입니다(엡 4:25b).
바울이 에베소서 4장 15절에서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하는 것이 머리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모든 면에서 성장하는 길이라고 언급하고 있듯이, 교회 공동체 안에서 성도가 서로 진리를 말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과 부활의 사건을 통하여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며 나아가는 한 몸의 지체들이기 때문입니다(엡 4:25c). 그러므로 한 몸의 교회 공동체는 구원의 소망(살전 5:8),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 소망(롬 5:12-21; 갈 5:5), 부활의 소망(고전 15:52-55), 영원한 생명의 소망(딛 1:2) 가운데에서 살아가는 성도들이므로 진리 되신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서로에게 말하고 전하는 것은 새 사람을 입은 성도들의 첫 번째 원칙입니다.
바울이 언급하고 있는 두 번째 새 사람을 입은 성도의 삶의 원칙은 마음 속에 있는 ‘화’(orge: anger)를 성경적인 방법으로 조절하는 것입니다(엡 4:26). 바울은 성도가 이 땅을 살아가면서 화를 내면 안된다고 금지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화를 내라’는 동사와 ‘죄를 짓지 말라’는 동사를 명령법(imperative)으로 함께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어떻게 화를 내면서도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들의 삶을 생각해보면 ‘화를 잘 내는 사람들’(quick-tempered persons)이 죄를 짓게 되는 이유는 자신이 낸 화로 인하여 자신이 본질적으로 하려고 했던 행동으로부터 멀어져서 자신이 원하지 않았던 행동을 하거나, 원하지 않았던 목적으로 나아가기 때문입니다. 결과적으로 화를 내는 행동들은 일반적으로 분노와 연결이 되어서 자신의 마음 속에 가지고 있는 분노로 인하여 하나님의 의로부터 벗어난 행동을 하게 되어서 죄를 짓게 합니다.
그러면 우리들은 어떻게 바울이 언급하고 있는 ‘화를 내라 그리고 죄를 짓지 말라’라는 퍼즐(puzzle)을 풀 수 있습니까? 조금 어려운 이야기이지만, 헬라어의 명령법(imperative)의 용례 가운데에서 조건(if)과 양보(although)의 기능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26절의 말씀을 헬라어 명령법의 조건과 양보를 적용해서 해석해 보면 이렇게 번역할 수 있습니다.
“만일/비록 화를 내어도, 죄를 짓지 마십시오”
그러면 바울이 언급하고 있는 ‘화’는 무엇입니까? 바로 25절의 ‘거짓’과 연결되어서 내는 ‘정당한 화’(righteous anger)입니다. ‘정당한 화’란 거짓에 대한 ‘화’입니다. 성도가 잘못된 다른 복음에 관하여 화를 내는 것은 ‘정당한 화’로 정의 할 수 있고, 이러한 화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은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 힘입어 다른 형제와 자매를 사랑하여서 거짓된 가르침으로 인하여 미혹에 빠져 있는 자들에게 바른 복음으로 인도함을 받도록 참된 것을 말하는 행동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정당한 화를 표현할 때에 주의해야 하는 것은 우리 자신의 감정을 조절하지 못해서 죄를 짓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정당한 화’를 표현한다고 할지라도 자신의 본질적인 목적에서 벗어나서 원하지 않는 비판적 말이나 행동을 하게 되면 하나님의 의로부터 벗어나 죄를 짓게 됩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삶의 현장에서 ‘정당한 화’를 낼 때에 이성적 판단을 잃어버려서 비판적인 언어에 빠지지 않도록 자신의 혀를 제어하는 훈련은 너무나도 소중합니다(약 1:26).
바울이 비록 ‘정당한 화’를 낸다고 할지라도 죄를 짓지 말라고 언급하고 있는 이유는 ‘화’가 분노와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신약 성경에서 단 한 번 사용이 된(Hapax Legomenon) ‘분노’(parorgismos: irritation)라는 단어의 의미는 ‘의도적으로 화가 나 있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상태는 화가 난 결과이기 보다, 화를 조절하지 못한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러면 바울이 화를 조절하지 못한 분노의 상황 가운데에서 해가 지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권면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바로 이러한 행동으로 인하여 마귀(diabolos: the devil)에게 기회를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기회’라고 번역 할 수 있는 헬라어 명사(topos)의 가장 기본적인 의미는 ‘장소’(place)입니다. 그러므로 화를 조절하지 못해서 분노의 상황이 지속되어졌을 때에 나타나는 결과는 마귀에게 우리들의 마음에 거주할 수 있는 장소를 내 주어서 마귀로 하여금 다른 사람들을 비방하는 기회를 주는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분노는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성도가 새 사람으로 살아가지 못하게 하는 중요한 원인입니다. 우리가 분노를 조절하지 못해서 마귀의 목적대로 사용이 되어진다고 하면, 우리들은 의의 도구로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불의의 도구로 죄에게 자신을 내어 주어서 마귀의 종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함께 나누기>
-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과 부활의 능력을 믿음으로 고백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향해 푯대를 정하고 살아가는 성도들의 가장 중요한 삶의 변화는 거짓을 버리고 진리 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는 삶입니다. 우리 가족은 복음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함께 말하는 공동체입니까? 만일 우리 가정 안에서 복음에 관한 대화가 사라져 가고 있다고 하면 우리들은 어떠한 노력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말하는 가족 공동체가 될 수 있습니까?
- 바울이 화를 내는 것을 긍정적인 입장에서 언급하는 이유는 이 화가 ‘정당한 화’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비록 정당한 화를 낸다고 할지라도 화로 인하여 죄를 지으면 안됩니다. 우리들은 이 수수께끼를 어떻게 삶의 현장에서 풀 수 있습니까? 우리들이 자신의 화로 인하여 분노할 때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우리들은 어떻게 분노를 조절할 수 있습니까?
- 바울은 27절에서 자신의 서신에서 일반적으로 사용하는‘사탄’(Satan)이라는 단어(e.g., 롬 16:20; 고전 5:5; 7:5; 고후 2:11; 살전 2:18; 살후 2:9; 딤전 1:20)를 사용하지 않고, ‘마귀’라는 단어(엡 4:27; 6:11)를 사용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마귀’가 가지고 있는 비방의 역할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우리들의 모습 가운데에서 다른 사람을 비방하는 모습들이 있지는 않습니까? 만일 이러한 모습들이 있다고 하면 우리들은 어떻게 마귀에게 우리들의 마음의 장소를 내주지 않고 새 사람을 입은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갈 수 있습니까?
김윤규 목사 (토론토 쉴만한물가 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