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메시지] 실족하지 않는 거룩한 삶으로의 부르심

실족하지 않는 거룩한 삶으로의 부르심

예수님의 두 번째 수난 예고(막 9:30-32) 이후에 이어지는 마가복음 9장 33-50절의 단락은 ‘지극히 작은 자’(the least), ‘이름’(name), 그리고 ‘실족’(temptation to sin)이라는 catchword 개념을 중심으로 한 유사어 반복을 통해 ‘섬김’(service), ‘환대’(hospitality), 그리고 ‘심판’(judgment)과 관련된 주제로 이어집니다. 마가복음 9장 42-50절에서 심판관 관련된 catchword는 ‘실족하게 하다’(skandalizo: to cause to stumble)입니다. 이 단어는 다른 사람뿐만 아니라(막 9:42) 자신을 향한 유혹을 피하기 위한 극단적인 자기 부인에 대한 경고로 이어집니다(막 9:43, 45, 47).

(막 9:42) 그리고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들 가운데에서 하나라도 걸려 넘어지게 한다면, 그의 목에 큰 맷돌을 두르고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오히려 낫다. (43) 그리고 만일 너의 손이 너를 걸려 넘어지게 한다면, 그것을 잘라 버리라. 두 손을 가지고 게헨나(지옥), 곧 꺼지지 않는 불 속으로 떨어지는 것보다, 불구로 생명에 들어가는 것이 너에게 더 낫다. (44) NA27, 28 & UBS5에는 없습니다. (45) 그리고 만일 너의 발이 너를 걸려 넘어지게 한다면, 그것을 잘라 버리라. 두 발을 가지고 게헨나(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절름발이로 생명에 들어가는 것이 너에게 더 낫다.  (46) NA27, 28 & UBS5에는 없습니다. (47) 그리고 만일 너의 눈이 너를 걸려 넘어지게 한다면, 그것을 빼어버리라. 두 눈을 가지고 게헨나(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하나의 눈을 가지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너에게 더 낫다. (48) 그곳(게헨나)에는 그(게헨나)들의 벌레가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는다. (Translated by YG Kim)

마가복음 9장 41-42절은 대조적 병행 관계(antithetical parallelism)라는 문학적 장치를 통해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으면서, 동시에 참된 제자도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에 서로 상반되는 극단적인 결과를 제시합니다. 예수님께서 9장 41절에서 지극히 작은 자에게 물 한잔을 나누는 ‘환대’(hospitality)를 통한 종말론적인 보상(eschatological recompense)을 제시하셨다면, 42절에서는 지극히 작은 자들 가운데에서 하나라도 실족하게 하는 행동에 대한 가장 심각한 심판의 경고를 제시하십니다.

마가복음 9장 42-48절에서 반복적으로 사용되어서 본문의 내용을 연결하는 ‘스칸다리조’(skandalizo: to cause to stumble)의 명사형은 ‘스칸다론’(skandalon)입니다. 이 명사의 의미는 ‘덫’(trap), ‘걸림돌’(stumbling block), 또는 ‘장애물’(obstacle)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사용하시는 ‘스칸다리조’는 비유적으로 상대를 ‘넘어지게 하는 장애물을 놓다’라는 의미를 일차적으로 가지고 있고, 본문의 문맥에서는 ‘죄를 짓게 하거나, 믿음을 떠나게 하다’라는 의미로 사용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마가복음 9장 42절에서 이 동사는 예수님을 믿는 “이 작은 자들 가운데에서 하나라도 걸려 넘어지게 하는” 행위 자체를 의미합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다른 사람을 실족하게 하는 행위는 단순히 육체적 해를 입히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약하거나 사회적 지위가 낮은 사람들 가운데에서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의 영적 몰락(spiritual downfall)이나 또는 배교(apostasy)에 이르게 하는 행동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행동을 하는 자들을 향해 극단적인 형벌의 이미지를 제시합니다. 마가복음 9장 42절에 기록되어 있는 ‘큰 맷돌’(a millstone of donkey)은 사람이 손으로 돌리는 작은 맷돌이 아니라 당나귀가 돌리는 매우 크고 무거운 맷돌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당나귀가 돌리는 큰 맷돌을 목에 두르고 바다에 던져지는 행위는 단순한 익사(溺死)의 형식의 형벌이 아니라 당시 로마 시대의 사형 집행 방법일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Darrell Bock, Mark,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5, pp. 263-64).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로마 사회에 익숙했던 폭력적인 처형 방식을 언급하여서 죄의 결과가 가져오는 영원한 심판의 무게를 수사학적인 장치를 통하여 가르치십니다.

마가복음 9장 43-48절에서 예수님께서는 42절에서 지극히 작은 자를 실족하게 하는 행위의 경고에 관한 논리의 확장을 통해 자기 스스로 실족하게 하는 행위에 대한 경고로 초점을 전환해서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의 근원을 은유적으로 신체의 세 가지 중요 부위인 ‘손’(cheir: hand), ‘발’ (pous: foot), ‘눈’(ophthalmos: eye)으로 설명하여서 죄의 심각성을 함축적으로 강조하십니다.

손과 발과 눈은 죄와 관련된 상징적 행위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먼저 ‘손’은 죄를 짓는 도구(Instrument of action)로 사용이 되고, ‘발’은 죄가 있는 장소로 가는 수단(Means of transport)으로 사용이 되고, 마지막으로 ‘눈’은 죄의 유혹이 들어오는 통로(Entry point of temptation)로 사용이 됩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아주 강력한 표현을 통해 한쪽 손이 죄를 짓는 도구가 되면 그것을 ‘잘라 버리라’라고 말씀하고 계시고(막 9:43), 한쪽 발이 죄를 짓는 수단이 되면 그것도 ‘잘라 버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막 9:45). 더 나아가서, 한쪽 눈이 죄의 유혹이 들어오는 통로가 되면 “그것을 빼어버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막 9:47). 이러한 예수님의 명령은 비유적인 표현으로 문자적 의미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죄를 지은 손과 발과 눈을 제거하는 비유적 의미는 무엇입니까?

먼저는 죄를 짓는 도구로 사용되는 손의 행동을 멈추라는 명령이고, 죄가 있는 장소로 가는 수단으로 사용되는 발이 그 장소에 가지 않도록 하라는 명령이고, 마지막으로 눈을 통하여 들어오는 죄의 유혹에 대한 생각이나 욕심을 품지 않도록 주의하라는 명령입니다.

만일 이러한 예수님의 명령을 따르지 않으면 영원한 심판의 결과는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 속 곧 게헨나(geenna: Gehenna)로 떨어지는 것입니다. 게헨나는 예루살렘 남서쪽의 힌놈 골짜기(Ge-hinnom)에서 유래한 명칭입니다. 이곳은 구약 성경에서 몰렉에게 아이들을 희생시키던 장소였으며(렘 32:35), 이후 쓰레기를 태우는 소각장으로 사용되면서 악인에게 임할 영원한 불과 고통의 장소로 상징되었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흔적으로 인하여, 게헨나는 영원한 불과 고통이 가해지는 악인들의 종말론적 처벌 장소 곧 지옥을 상징하게 되었으며, 유대교 및 초기 기독교 문헌에서 가장 흔하게 사용되는 영원한 처벌 장소의 명칭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게헨나가 주는 고통을 강조하기 위해서 이사야서의 마지막 말씀인 66장 24절을 인용해서 설명하십니다. 이사야서의 마지막 결말 부분을 생각해 보면 이방인들 가운데에서도 하나님의 선택을 받아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제사장과 레위인으로 부르심을 받을 것입니다(사 66:21). 그러나 끝까지 반역한 자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인데, 이러한 모습을 회개하고 돌아와 하나님을 예배하는 열방들이 바라보는 모습입니다(사 66:24; cf., 사 14:11).

예수님께서는 이사야서 66장 24절에 기록되어 있는 지옥의 모습을 통하여 영원한 형벌의 장소인 게헨나를 불이 꺼지지 않으며, 벌레가 죽지 않는 장소로 표현하십니다(막 9:48).

(사 66:24) “그들이 나가서 나를 거역한 사람들의 시체를 볼 것이다. 그들을 먹는 벌레가 죽지 아니하며 그들을 태우는 불이 꺼지지 않기 때문에 그들이 모든 사람에게 역겨운 것이 될 것이다.” (바른 성경)

결과적으로 예수님께서는 손과 발과 눈을 통한 죄의 근원에 대한 절대적인 단절을 통해 영원한‘생명’(zoe: life) 곧 ‘하나님의 나라’(the kingdom of God)에 들어가는 절대적 가치의 얻어야 한다고 강조하십니다(막 9:43, 47).

마가복음 9장 49-50절은 9장 33-48절의 결론에 해당이 되는 부분으로 ‘불’(pyr: fire)과 ‘소금’(halas: salt)이라는 핵심적인 이미지를 통하여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짊어져야 하는 정화(purification)와 헌신(commitment) 그리고 공동체의 평화(communal peace)의 중요성을 강조하십니다.

(막 9:49) 왜냐하면 모든 사람들이 불에 절여질 것이다. (50) 소금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만일 소금이 소금기 없게 되어버리면 무엇으로 그것을 맞추겠느냐? 소금을 너희들 안에 가지고 서로 평화를 이루어라.” (Translated by YG Kim)

먼저 예수님께서는 게헨나에 던져지는 영원한 불의 심판을 피하기 위해 모든 사람들이 ‘불’에 절여지는 과정을 겪게 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이 과정을 통하여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시험의 과정을 통하여 정화되는 과정을 설명하시는데, 이 과정은 레위기 2장 13절에 기록되어 있는 소제물을 하나님께 드릴 때 모든 제물에 소금을 쳐서 제물의 순결을 강조하는 모습을 상기시킵니다. 이러한 배경에서 불은 게헨나에서 사용이 된 꺼지지 않는 불의 의미가 아니라(막 9:48),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이 되는 정화의 불, 곧 시련이나 고난의 불을 의미합니다. 이 불은 악을 끊지 못하는 자들에게는 영원한 심판의 불이지만, 참된 섬김을 통하여 지극히 작은 자들을 높이 여기고, 다른 사람뿐만 아니라, 자기 스스로가 죄에 결려 넘어지지 않도록 노력하는 자들에게는 하나님 앞에서 깨끗하게 정화되는 역할을 합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모든 사람들이 불에 절여질 것이다”(막 9:49)라는 예수님의 은유적 표현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시험을 통해 언약적 순결함을 얻는 과정이고, 더 나아가서 50절에서 이어지는 소금의 상징적 의미를 드러내는 과정을 표현합니다.

일반적으로 소금은 짠 맛을 내는 염분을 스스로 잃어버리지 않지만, 당시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사용된 사해(Dead Sea) 소금은 석고(gypsum)와 같은 미네랄(mineral)이 포함되어서 염분이 빠지기도 하였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맛을 잃은 소금을 정체성을 잃어버린 제자들과 비유하여서, 이러한 제자들은 세상에 아무런 유익을 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강조하십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소금을 너희들 안에 가지고 서로 평화를 이루어라”(막 9:50)라는 말씀을 통하여 공동체의 화목에 관한 최종적인 권면의 말씀을 하십니다. 제자들이 소금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는 내적으로 참된 지혜(wisdom)를 소유하고 있고, 외적으로는 다른 사람들과 평화의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함축적인 의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내적인 순결 곧 참된 지혜와 외적인 평화를 통하여 제자들이 공동체 안에서 평화를 이루어 가기를 소망하십니다.

<함께 나누기>

  1. 마가복음 9장 33-50절은 어떠한 catchword로 연결되어서 중심 주제를 설명하고 있습니까?
  1. 마가복음 9장 42-48절에서 반복적으로 사용되어서 본문의 내용을 연결하는 ‘스칸다리조’의 의미를 설명해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이 동사를 사용하셨을 때 그 의미는 무엇입니까?
  1. 마가복음 9장 42절에 기록되어 있는 ‘큰 맷돌’이 예수님 당시에 어떠한 역사적 배경 가운데에서 사용되었습니까?
  1.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손’, ‘발’, 그리고 ‘눈’이 가지고 있는 죄의 상징적 행위를 설명해 보십시오. 우리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죄를 지은 손과 발을 끊어 버리고, 눈을 뽑아 버리라는 의미를 문자적으로 해석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함축적인 의미는 무엇입니까?
  1. 예수님께서 지옥으로 설명하신 ‘게헨나’에 관하여 설명해 보십시오. 이사야서 14장 11절의 말씀과 66장 24절의 말씀을 읽고, 그 의미가 어떻게 예수님의 말씀에 적용이 되었는지 설명해 보십시오.
  1. 마가복음 9장 42-48절에서 사용된 ‘불’의 이미지와 49-50절에서 사용된 ‘불’의 이미지는 서로 다릅니다. 어떠한 차이점이 있습니까?
  1. 예수님 당시에 소금이 맛을 잃어버린 이유가 무엇입니까?
  1. 제자들이 소금을 가지고 있다는 비유적 의미는 무엇입니까?

복음에 빚진 자 김윤규 목사 (토론토 쉴만한물가 교회)[칼럼: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메시지] 실족하지 않는 거룩한 삶으로의 부르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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