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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하나님의 교육명령] 우리 집 성탄, 후대에게 믿음이 전해지는 자리

우리 집 성탄, 후대에게 믿음이 전해지는 자리

  성탄이 가까워지면 집 안의 공기가 먼저 변한다. 달력의 날짜가 바뀌기 전에, 가족의 표정이 먼저 바뀐다. 퇴근길에 무심코 들른 마트에서 작은 전구 하나를 집어 들고, 아이가 좋아하던 귤을 한 망 더 담는 날이 있다. 그날 이후 거실 한쪽이 조금 밝아지고, 부엌의 소리가 조금 부드러워진다. 성탄은 대개 그렇게 시작된다. 설교보다 먼저, 찬양보다 먼저, 집의 기척으로 온다.

  가족에게 성탄은 “행사”가 아니라 “기억”이어야 한다고 믿는다. 아이가 어릴 때 기억하는 성탄은 비싼 선물이 아니라, 선물을 열던 순간 옆에 있던 얼굴이다. 포장지의 색이 아니라, 그날 저녁 식탁에 있던 따뜻한 시선이다. ‘무엇을 했는가’보다 ‘누구와 함께 있었는가’가 기억을 만든다. 그래서 성탄을 준비하는 첫걸음은 거창한 계획이 아니다. 집이 집답게 숨 쉬는 시간을 다시 확보하는 일이다. 빨라진 속도를 한 박자 늦추고, 서로의 말을 끝까지 들어 주는 시간을 조금 늘리는 일이다. 그때부터 집은 성탄의 무대가 된다. 더 정확히 말하면, 집은 성탄의 무대가 아니라 성탄의 자리이다. 하나님이 찾아오시는 자리, 서로가 서로에게 선물로 주어지는 자리, 후대에게 믿음이 전해지는 자리이다.

  성탄은 집안의 네 장면에서 가장 선명해진다. 일어날 때, 집에 앉았을 때, 길을 갈 때, 누웠을 때. 이 네 때는 특별한 프로그램이 없어도 신앙이 자라는 “하루의 예배동선”이 된다. 성탄의 기념과 기억은, 그 네 때에 조용히 스며들 때 깊어진다.

소리 내어 읽는 성탄

  어느 해 성탄 전야였다. 아이는 트리 앞에서 한참을 서성이다가 뜻밖의 질문을 던졌다. “예수님은 왜 하필 아기로 오셨어?” 그 질문 앞에서 잠시 말문이 막혔다. 설명을 준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교리문답처럼 답하고 싶지 않았고, 대충 넘기고 싶지도 않았다. 그때 떠오른 방법이 하나 있다. 설명 대신 본문을 읽는 일이었다.

  누가복음 2장을 펴고, 한 단락만 소리 내어 읽었다. 길게 읽지 않았다. 정확히 읽으려 했다. 한 문장 한 문장, 아이가 들을 수 있도록. “그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낯선 이름이 나올 때 아이는 웃었고, “방이 없더라”는 구절에서 잠시 표정이 굳었다. 본문을 다 읽고 나서, 대답은 오히려 아이에게서 나왔다. “예수님은 불편한 데도 오셨네.” 그 한마디가 그해 성탄의 설교였다.

  D6 신앙은 ‘들음’에서 시작한다. 그 들음은 특히 “소리 내어 읽는 들음”이다. 눈으로만 읽을 때보다, 소리로 읽을 때 말씀이 집의 공기를 바꾼다. 아이의 귀가 먼저 열리고, 어른의 마음도 함께 열린다. 그래서 성탄을 기억으로 남기고 싶다면, 가족이 함께 성경을 소리 내어 읽는 시간을 한 번이라도 만들면 좋다. 단 한 번이어도 좋다. 단락 하나여도 좋다. 중요한 것은 길이가 아니라 방향이다. 

식탁의 작은 예전

  성탄의 중심은 놀랍게도 식탁에 가깝다. 성탄을 기념하는 방식은 화려한 장식보다 가족의 식탁에서 더 오래 남는다. 식탁은 설명보다 정렬이 먼저 일어나는 자리이다. 그날 무엇을 먹었는지보다, 누가 누구를 기다렸는지, 누가 누구의 말을 끝까지 들어 주었는지가 남는다.

  식탁은 ‘작은 예전’이 되기 좋다. 예전은 거창한 의식이 아니다. 반복되는 작은 몸짓이 마음을 하나님께 정렬시키는 방식이다. 성탄의 식탁 예전은 특히 단순할수록 오래 간다.

예를 들면 이런 흐름이다.

불을 하나 켠다: 

한 문장을 읽는다: 

한 사람씩 축복한다: 

한 가지를 나눈다: 

한 가지 순종을 정한다: 

  이때 식탁 대화는 세대가 영적으로 링크되는 자리이다. 가르치려 애쓰지 않아도 된다. 함께 듣고, 함께 질문하고, 함께 반응하면 된다. 

  식탁에서 성탄을 기억으로 남기고 싶다면, 선물 교환을 식탁의 끝에 두는 것도 방법이다. 선물이 앞에 오면 마음이 흩어지기 쉽다. 식탁에서 말씀이 앞에 오고, 축복이 앞에 오면, 선물은 “기쁨”이 된다. 그 순서가 아이의 기억을 다르게 만든다. 아이는 포장지를 기억하기보다, “우리 집은 예수님을 먼저 맞이했구나”를 기억하게 된다.

문턱을 낮추는 성탄

  성탄이 깊어질수록 집 안의 온도는 바깥을 향해 열린다. 하나님이 우리 집에 오셨다는 고백은, 우리 집이 누군가에게 작은 마구간이 될 수 있다는 고백으로 이어진다. 거창한 선교 계획이 아니라, 문턱을 낮추는 작은 실천이다.

  이웃–전파는 멀리 가는 일이 아니라 가까이 열리는 일이다. 전화 한 통, 메시지 한 줄, 도시락 한 번, 커피 한 잔, 아이가 적은 카드 한 장. 그런 것들이 성탄을 “기념”에서 “기억”으로 바꾼다. 기억은 대개 누군가의 마음에 남는 형태로 새겨진다. 그것이면 충분하다. 그 기억이 곧 신앙의 씨앗이다. 성탄은 지나가도, 그 씨앗은 자란다.

마지막으로, 가족이 함께 드릴 수 있는 짧은 축복기도를 남긴다.

“예수여, 우리 집에 오신 분이여. 우리의 말과 눈빛과 식탁과 잠자리에 당신의 평화를 주소서. 후대에게 믿음이 전해지고, 이웃에게 따뜻함이 흘러가게 하소서. 올해의 성탄이 기념으로 끝나지 않고 기억으로 남게 하소서. 아멘.”